뉴스로 책 읽기 - 서지문의 뉴스로 책 읽기 1
서지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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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 여의 집필기간 동안에 나의 칼럼은 매회 절규가 되었다. 물론 내 정치 감각이 예리하지 못해서 분석이 정밀하지 못한 면이 있겠지만 어쨌든 나와 같은 울분, 위기감, 그리고 부당함에 괴로운 독자들에게는 나의 칼럼이 그들의 분노를 대변해주는 작은 카타르시스의 장이었다고 한다. - '저자의 말' 중에서

 

 

국내외 이슈를 성찰하다

 

이 책의 저자 서지문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 학사, 웨스트조지아 대학 영문학과 석사, 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1978년부터 35년간 고려대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고려대 명예교수다. 석사취득 직후부터 시작된 저자의 집필은 국내 국, 영문 일간지와 주간지에 문학과 시사를 넘나들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저서로는 <인생의 기술: 빅토리아조 문필, 사상가들의 윤리적미학이론 연구>, <Remembering the Forgotten War>(공동집필, 편집), <동양인이 흠모한 공자, 서양인이 사랑한 공자>,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 <영국소설을 통해 본 영국신사도의 명암〉등이 있다. 또한 일찍부터 한국문학의 영역을 통한 세계화에 사명감을 갖고 한국 단편, 장편, 시 등을 영역하고 영미권에서 출판하여 한국문학 해외선양에도 공로가 크다.

 

조선일보의 유명 칼럼 [서지문의 뉴스로 책 읽기]는 무게감을 지닌 정론으로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국내외 전반에 걸친 이슈를 연관이 있는 출판물과 접목시켜 조용한 듯하면서도 거침없는 표현으로 독자를 휘어잡고 있기 때문이다. 35년간 대학교 강단에서의 명강의로 정평이 났을 때처럼, 핵심을 놓치지 않되 쟁점을 둘러싸고 있는 사안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다. 이 칼럼 120편을 묶어서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부르키니의 여인들

 

부르키니burquini를 아는가? 어쩌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지도 모르겠다. 이는 무슬림 여성들이 입는 수영복의 일종으로 무슬림 여성들이 입는 전통의상인 '부르카burka'와 '비키니bikini'의 합성어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부르카는 무슬림 여성복식 중 가장 폐쇄적인 형태로, 몸 전체를 가리는 복식으로 눈 부위까지 망사로 가려 다른 사람과 인상착의 구분이 어렵다.

 

그런데, 왜 이런 수영복이 생겨났을까? 무슬림 여성들이 신체를 숨겨야하는 이슬람 규율을 지키며 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수영복 패션인 셈이다. 무슬림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수영은 하고 싶고 몸은 가려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많은 유럽 국가들이 이 수영복의 착용을 금지하고 있다. 즉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모로코 등의 일부 수영장에서는 착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최근엔 프랑스에서도 착용 금지 대열에 합류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서 교수는 이런 차별적 대우와 관련해 이런 칼럼(2016/8/30)을 올렸다.

 

오늘날 이슬람 여성들에게 씌운 굴레는 전 세계 여성들이 유사한 형태로 겪어 온 것이다. 유교 체제하에서 양반 계급의 여성은 길에 나갈 때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인수대비는 '내훈內訓'에서 지혜로써 남편을 깨우치고 인도하는 아내를 이상적 아내로 꼽았지만 또한 아내는 남편이 발로 차더라도 반항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존귀했던 서양의 숙녀도 숙녀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갖은 제약은 물론 수모도 견뎌야 했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반실화소설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에서 탐스러운 머릿결의 과부 소멜리나는 외지인과 하룻밤을 지냈다는 이유로 교회 앞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목이 잘린다. -

 

그러면서 칼럼의 말미에는 "이슬람 여성을 무학無學과 여성 할례, 명예살인, 부르카 착용, 일부다처제의 굴레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금지보다 그들의 증오와 반감을 누그러뜨릴 우정과 인내, 선의의 설득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글을 남겼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선 틀릴지 몰라도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다를 뿐인 것이다. 그리고 다르다는 것도 인간의 생활의 한 부분 아니겠는가?

 

 

 

구관이 명관

 

현재 대한민국이 흘러가는 방향에 대해 심히 걱정되는 부분이 많다. 도무지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하고 마치 망둥이처럼 펄떡거리기만 한다. 얼마 전엔 남북간의 지도자가 평화회담을 한 후, 서울시청에 김정은을 찬양하는 현수막이 내걸리기도 했다. 반면에 탄핵을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 모임이라는 소위 '태극기 집회'는 불법으로 간주하거나 허용하더라도 집회 장소에 매우 인색한 편이다. 현 정부는 지난 시절의 모든 정부는 모두 말살하고 자신들의 이념을 앞세워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열정이 활활 타고 있다. 이와같은 정치 작태에 관해 서 교수는 이미 경고성 칼럼(2017/3/21)을 올렸다. 

 

우리의 반미주의자들은 이런 미국의 행동을 요즘 한국의 '사드' 도입을 저지하려고 중국이 벌이는 조폭적인 행패와 비교해 보았을까?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화 저지가 1차적 목표였지만 어쨌든 우리나라를 보전해 주고 막대한 원조를 주면서도 '동맹국'으로 대등하게 대우했다. 반면 중국은 6·25 때 백만 대군을 보내 한국을 쓸어 없애려 했던 나라다. 그런데도 한국은 1992년 수교 후 이웃으로 중국의 경제 개발을 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칭 신형 대국이니 G2니 하며 우리를 짓밟고 능멸하려 든다.


임진왜란 당시 체찰사 류성룡은 명나라 지원군의 식량을 조달하느라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의 노심초사를 명나라 장수들도 알고 측은히 여겼다. 그러나 명의 이여송 제독은 군량미 문제로 그를 꿇어 앉히고 문초했고, 임진강을 두고 대치한 명군과 왜군의 강화를 막기 위해 류성룡이 임진강 배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그를 명 진영에 불러들여 곤장 40대를 치라고 했다.

 

저자는 칼럼 말미에 "트럼프 대통령의 '당하고만 있지 않는 미국'은 우리의 반미에 어떻게 대응할까? 어떤 경우라도 중국처럼 야만적이진 않을 테니 그로써 위로를 삼을 수 있을까?"라고 우리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주고 있다. 옛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이 지난 과거를 모두 잊고, 현재의 작은 성공과 영화에 만족하며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홀로 서기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중국, 러시아, 북한, 일본 등 한반도의 남쪽을 노리는 세력이 준동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우리의 국방력은 이들 나라에 비해 열등한 편이다. 이리 되어도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는 괜찮을까? 난 지금도 나의 자식과 손자 세대를 앞서 걱정하고 있다.

 

 

최선의 추모는?

 

지금껏 우리의 정치세력은 스스로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이슈를 정말 오랫동안 우려 먹는다. 이런 일환으로 현 여권은 최근까지 세월호 침몰 사고를 기념하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가져왔다. 이런 류의 행사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를 정치적 쟁점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는 건설적인 대안을 준비하는 게 바로 정치라는 것이다. 즐거운 수학여행을 떠난 고교생들을 태운 배가 일기 상황을 고려치 않고 무리하게 출항해야만 했던 이유, 적정 화물량을 초과해서 적재한 이유 등등 향후에는 사고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청사진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성공적인 인양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미수습한 시신 9구를 찾고자 나라 재정을 무려 1천억 원을 투입했다. 이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그나마 인양이 종료되면 광화문광장에 어지럽던 천막이 걷히고, 말도 되지 않는 황당한 모략성 발언이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아 유가족들도 일상의 생업으로 돌아갈 것으로 온 국민들은 기대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 뒤에 엄청난 기름띠가 해안 생태계를 위협한다는 새로운 재난이 등장한 것이다. 이에 관련해, 서 교수는 다음과 같은 칼럼(2017/3/28)을 올렸다.


우리나라는 '망자에 대한 생자의 도리'가 과도해서 생자들의 삶이 잠식되는 일이 적지 않다. 조선조 양반들은 시묘살이를 하느라 산소 옆 움막에서 변변히 먹지도 못하고 한겨울에도 삼베 옷을 입고 살았다. 그래서 삼년상이 끝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골병이 들지 않는다 해도 당대 최고 인재들이 망자를 시중드느라 산 백성을 여러 해 외면한 것은 미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세월호 인양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름 유출 가능성이 처음부터 제기됐다. 그런데 유족의 '망자에 대한 도리'에의 집착과 국민의 안쓰럽고 죄스러운 마음이 그 재앙 가능성을 묵살하게 했다. 막대한 인양 비용을 우리 사회의 약자를 돕는 데 쓰는 게 망자들을 더욱 뜻 깊게 기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애석하게도 유족들을 그런 방향으로 설득하려 한 정치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늘 초강경 투쟁으로 일관하는 환경 운동가들도 왜 일제히 침묵했을까?

 

마지막으로 칼럼 말미에 서 교수는 공자의 논어를 인용했다. 즉 공자는 논어 제19편 '자장子張'에서 " 상사애 기가이의喪思哀 其可已矣·(상에는 슬픔을 생각한다. 이 정도면 된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최선의 추모는 무엇이며, 그동안의 정치세력과 환경단체들은 무슨 이익을 노리고 그토록 세월호 조사와 인양을 주장했던가 말이다.  

 

 

대통령 발언의 막중함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브루투스가 시저가 독재할 것이 두려워 살해했다고 말하며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서 안토니가 등장해 시저가 얼마나 로마 시민을 사랑했는지를 뜨겁게 웅변했다고 기술한다. 이 웅변 뒤에 로마 시민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렇다. 로마 시민들은 브루투스를 죽이라고 격렬히 외친다. 이처럼 지도자의 말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문재인 대통령은 세월호 유족들에게나, 영화 <택시운전사> 관람 후에나, 철저한 진상 조사를 약속했다.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괴담'은 처음부터 거짓이었기에 침몰 원인은 명백했고 구조 책임을 잊은 당사자의 처벌과 함께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다. 이제 또다시 광부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철저히 파헤치겠다고 발언했다. 언제까지 파헤쳐야 직성이 풀릴까?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하여 서 교수는 칼럼(2017/8/22)에 이런 글을 올렸다.

 

대통령의 북핵 관련 인식과 발언 역시 너무도 심각하다. 문 대통령은 자기 나라 국토, 국민이 핵 공격을 받을까 봐 속이 타들어 가는 미국에게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즉 북한은 한반도 밖인 미국을 공격할 수 있지만 미국의 북한 공격은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내 동생이 미쳐서 총을 난사하겠다고 날뛰고 있지만 동생이 발포하기 전에는 절대 그 총을 뺏으려 하면 안 된다는 선언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나는 발악하는 동생 앞에 내 자식들을 발가벗겨 내놓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주문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과 문 대통령이 지켜주어야 할 대상이 김정은 정권인가, 북한의 2천만 동포인가.

 

 

 

지금도 연재중

 

정치, 문화, 시사, 페미니즘, 인종차별 문제까지 주제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특히,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는 국민들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선사한다. 이는 글쓰기를 사명감과 '죄 닦음'으로 여기고 단어와 문장에 신중을 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사명감을 맛 보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펼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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