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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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까당신이 제부쉬낀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었지요러시아의 유명한 작가도스또예프스끼의 데뷔작이고서간체로 된 소설이라서 꽤나 유명세를 탄 책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저는 이런 류의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은 왜그렇게 길고도 긴지그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읽은 건내게도 서간체 소설이라는 꿈이 한 자락 있기 때문입니다언젠가 편지로 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편지 이야기를 긴 글로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꿈꾸고 있기 때문이지요당신의 이야기가 내게 어떤 아이디어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신의 편지가 실린 책을 펼쳤습니다.

 

4월 8제부쉬낀이 당신에게 쓴 편지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당신의 집 건너편에 사는 중년의 하급 관리인 제부쉬낀그는 당신에게 부성애를 앞세워 다가가고당신도 그의 우정을 받아들입니다그러나 제부쉬낀과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사람들이지요제부쉬낀이 묘사하는 하숙집의 풍경을 읽는 내내 나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지하실 집을 떠올렸습니다습한 냄새가 진동하는 어둠의 공간제부쉬낀이 사는 곳은 그런 이미지였으니까요형편없는 집에 살면서도 제부쉬낀은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자신의 외투 하나 사지 못하면서 당신에게 설탕을 주고돈을 주지요당신은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받고뭐가 더 필요하다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합니다나는 당신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제부쉬낀이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당신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어쩌면 당신은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당신이 제부쉬낀과의 관계에서 수없이 밀고 당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습한 냄새를 몸에 휘감은듯한 마음으로 당신들의 편지를 읽었습니다저는 당신과 제부쉬낀이 서로 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제부쉬낀은 감정의 과잉을 보여주는 사람이었고당신은 감정의 절제를 보여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제부쉬낀의 편지들은 읽기가 버거웠습니다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 수다쟁이 같았지요반면 당신의 글은 깔끔했습니다특히 당신이 노트에 써놓았다는 자전적 이야기는 흡인력이 좋았어요그 뒷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궁금할 정도였지요어쩌면 제부쉬낀과 같은 집에 살던 소설가보다 당신이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제부쉬낀과 당신의 편지를 읽으면서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실상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아니면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문학적 빈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지요제부쉬낀은 문학적으로 빈곤한 사람이었고그나마 당신은 문학을 찾아 읽는 사람이었으니까요당신도 문학적 풍요를 누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제부쉬낀과 나란히 서 있으니 당신이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 같더군요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당신은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풍요로운 삶을 꿈꾼 사람이었지요그랬기 때문에 당신은 부유한 비꼬프와 결혼할 생각을 했겠지요. ‘소설 따위가 여자를 다 버린다고 말하는 그 사람 말이에요!

 

그래요나도 알아요어쩌면 당신의 상황에서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걸그러나 마지막까지 제부쉬낀에게 이런 저런 일들을 부탁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당신은 알았겠지요제부쉬낀이 당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가난한 사람들사이에서도 먹이사슬이 존재한다는 걸당신 덕분에 새삼 깨달았습니다.

 

당신과 제부쉬낀의 편지는 내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었습니다여전히 정리 되지 못한 생각이 많은 걸 보니당신들의 편지가 왜 고전으로 불리며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흘러 내려오고 있는지 알 것 같군요아마도 당신의 편지는 오랜 시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질문을 던질 것 것입니다.

 

그런데 바렌까가난한 삶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 당신경제적인 가난을 버리고 정신적인 가난을 택한 당신안녕한가요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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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1 -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1
정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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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산은 ‘거대한 산’ 같은 사람이었다. 너무나 크고 높아서 다가갈 수 없는 존재. 그냥 ‘저기 산이 있구나’하며 조선의 훌륭한 학자 정도로 인식하던 그를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건 그가 죽은 막내 아들에게 쓴 편지 덕분이었다.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아 내리 여섯을 먼저 보낸 아버지 다산이 내게 들어왔을 때, 나는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무척 괴롭다’고 토로하는 솔직한 아버지 다산에게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그의 편지를 찾아 읽었고, 나름대로 해석한 것들을 <나는 다산의 편지를 읽으며 “사람이 되기로 했다”>라는 글로 쓰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다산은 신유년 이후 유배지에서 보낸 다산이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에 관한 책들도 대게 강진에서 생활하던 다산을 다루는 책이었다. 강진에 있던 다산은 ‘학자’였다.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학자.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다산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한 편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전 생애가 궁금했고, 그에 대한 또 다른 글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한국일보에서 정민 교수가 연재하는 <다산독본>이라는 글을 발견했고, 그 글이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이라는 책으로 엮여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은 그야말로 내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 내가 알던 다산의 모습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재조립되었다. 책의 소제목처럼 다산에게는 ‘천주와 정조’라는 두 개의 하늘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은 나를 흥분하게 했다. 정민 교수의 글을 통해서 내안에서 정약용은 입체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사에 정약용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에 천주교를 뿌리내리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들이 모두 그와 엮여있기 때문이다. 서학을 공부하며 ‘천주교’를 가장 먼저 접한 인물인 이벽은 정약용의 사돈이었다. 이벽은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전의 처남이었다. 북경에 가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는 정약용의 매형이고, 천주교를 믿으며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 사형 당한, 조선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은 정약용의 이종사촌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은 평신도를 이끄는 명도회의 회장이었으며,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몸을 피해 배론 토굴에서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전할 길고 긴 편지를 쓴 황사영은 그의 조카사위였다. 정약용을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의 천주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약용이 남긴 기록에는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기록의 삭제. 여기에 의문을 품게 된 정민 교수는 수많은 사료를 찾아 읽으며, 삭제된 기록들을 맞추어 나간다. 퍼즐을 하나 하나 맞춰가며 그는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다산의 글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 또한 정민 교수가 찾아낸 자료들을 함께 읽으며 전율했다.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자료를 찾아낼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퍼즐들을 맞출 수 있는지 놀랍고 놀랍고 또 놀라웠다. 정민 교수가 찾아낸 자료들에 의하면 다산은 천주교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 정민 교수는 밀정이 주문모 신부를 밀고하는 현장에 있다가 그를 대피 시킨 인물도 정약용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여러 사료들을 통한 새로운 발견이다.


정조와 다산의 관계 또한 새롭게 인식되었다. 다산이 회갑때 직접 작성한 「자찬묘지명」과 다산의 연보를 기록한 『다산의 한 평생』 같은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정조와 다산의 깊고 깊은 우정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다산을 둘러싼 인물관계에 대한 이해가 생겼고, 젊은 날의 다산이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알게 됐다. 다산을 학자의 틀에 가둬놓고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던 나를 반성하게 하는 글이었다.

 
평생을 시기와 질투 속에서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살았던 다산.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마음이 쓰렸다. 이제야 다산의 편지를 조금 더 깊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강진으로 오기까지 그가 겪어낸 삶을 살펴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덕분에 그가 내게 사람으로 다가왔다면, 정민 교수가 쓴 『정민의 다산독본, 파란』 덕분에, 정약용은 입체적인 사람이 되어 내 앞에 앉게 되었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너무 많지만, 그래서 긴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정민 교수가 어서 해배 후 다산의 삶을 집필해서 내 앞에 데려다 주기를! 그리하여 완벽한 학자 정약용 말고, 진짜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 정약용’을 만나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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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 '배교자' 이승훈의 편지
윤춘호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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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에 있는 한국천주교회역사관에서 당신이 정약종에게 써준 세례증명서를 보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은 권일신을 대부로 모시고 당신에게 세례를 받았다지요. 정약종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아오스딩이라고도 부르는 그 세례명을 조선에서는 위오사뎡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세례증명서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그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증명하는 종이 위에 당신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백돌이라는 이름이었지요. 베드로라는 세례명의 한글 표기였습니다.

 

당신은 내게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이승훈이었던 당신이 이백돌이 되었다가 다시 이승훈이 되고, 다시 이백돌 되었다가 또 다시 이승훈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정하며 이백돌이라는 이름을 지워갔지요.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교회에서는 배교자라고 낙인찍히고, 조선에서는 천주교의 삼흉이 되어버린-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습니다.

 

이승훈이었던 당신이 이백돌이 된 것은 1784년의 일이었습니다. 사신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다가 북당에서 세례를 받았지요. 당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예수회 소속의 프랑스 선교사 그라몽 신부였지만, 당신에게 세례를 권한 사람은 이벽이었습니다. 정약용의 사돈이자, 당신 아내의 사돈이었던 이벽 말입니다.

 

그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당신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요. 무반으로 이름을 날리던 가문의 이벽을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이승훈,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조선에 들어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지요. 뿐만 아니라 미사도 집전하며 마치 사제처럼 행동했습니다. 당신과 당신이 뽑은 동료 열 명은 그렇게 조선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동료들이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베푸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당신은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책에서 당신은 임시성직제도를 사제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놀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당신도 동료들도 알고 있었다고요. 그러나 나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독성죄를 짓는다는 걸 알면서도 미사를 집전했다는 것을, 당신이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베푸는 일을 사제놀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요. 적어도 내게 당신은 조선의 첫 세례자로서 진중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나는 당신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믿음이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첫 세례자라는 이름이 당신의 영혼을 얼마나 무겁게 했는지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당신이 윤유일 바오로를 통해서 북경에 선교사 파견을 청하며,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도 내려놓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그때 깨달았습니다. 당신에게 이 세상 누구도 짊어지지 않은 무거운 짐이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처남이었던 정약용에게 쓴 편지를 읽으면서 좀 놀랐습니다. 처남인 정약용을 향한 당신의 마음이 애증을 넘어 증오로 치닫고 있다는 걸 느꼈으니까요. 마지막 편지 속에서 당신은 단어를 고르고 골라, 정약용을 비약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정약용의 이미지를 깨부수려는 것처럼, 고약한 단어와 문장으로 그를 몰아갔지요. 이 모든 일들이 작가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란 걸 알고 있지만, 어쩌면 정말로 당신은 수많은 동료가 죽어갈 때 혼자 살아남은 정약용을 미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서 당신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사료와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주인공이 되어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것은 부풀려지고, 어떤 것은 줄어들었지요. 그래도 주석을 함께 읽으며 오해를 덜어 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그라몽 신부에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예수회 소속이었던 프랑스 선교사, 북당에서 당신에게 세례를 준 사제말입니다. 조선의 천주교회가 자라나는데 프랑스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만 생각했지, 한 번도 당신에게 세례를 준 사제가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그라몽 신부에게 보낸 편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린-를 읽으며, 그가 당신에게 얼마나 큰 마음을 내주었는지, 그 마음이 조선 교회에 어떤 씨앗을 뿌렸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라몽 신부는 당신을 만날 날부터, ‘미지의 세계로 불리는 조선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겠지요. 그 기도 덕분에 조선에는 복음의 씨앗이 퍼져나갔지만, 당신은 괴로워했습니다. 믿음을 현실로 가지고 올 수 없어서, 믿음과 현실을 모두 끌어 안을 수 없어서. 책을 읽는 내내 믿는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 인 줄 몰랐다며 다산에게 호소하던 당신의 모습이 따라다녔습니다.

 

천주를 믿는 일이 무척 힘들었어. 한 번 믿으면 되는 것인 줄 알았어. 한 번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네. 신앙은 내게 끝없는 결단을 요구했네. 신앙은 내게 끝없는 용기를 요구했네. 신앙은 내게 끝없는 희생을 요구했네. 신앙은 그 결단과 희생과 용기를 밑거름 삼아 성장하는 것이었어. 그러나 나는 신앙이 요구하는 것을 계속 내 줄 능력이 없었네. 아무나 천주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p40)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당신 왜 배교를 반복하고 번복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 또한 믿는다는 것이 괴로웠던 날들이 있었으니까요.

 

당신의 삶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이야기 해준 당신 덕분에 조선의 천주교에 대해서, 북경에 있던 사제들에 대해서, 내가 아끼는 정약용에 대해서, 그리고 잊힌 이름인 당신 이승훈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다산에게 질문한 것처럼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믿는 이로서 잘 살아가는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나의 생을 통해서 조금씩 깨달아 보겠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때 마주 앉아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이승훈 형제님, (이 호칭이 당신이 원하지 않는 호칭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만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피 흘리며 죽어간 동료들과 함께 있든 그렇지 않든 오늘은 제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배교자와 천주교의 삼흉 사이에서 번뇌하고 끝내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사라진 당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만이라도 당신의 영혼이 조금은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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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다산이오 - 유배 18년, 다산 정약용의 내면 일기
김형섭 지음 / 산처럼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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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교과서에서 본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아버지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막내아들을 기억하며 쓴 편지였다. 정약용이 아들의 무덤 앞에 바치는 편지를 읽으면서 거대했던 정약용이 평범한 사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이토록 정약용을 파게 될 줄.


‘정약용’이라는 이름을 파헤치게 된 건 그가 유배지에서 쓴 편지들 때문이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 된 정약용이 마재에 남아있던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말이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겠거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쉬운 얘기가 아니었다. 정약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충분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약용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책 중에서 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골라 읽었다. 정민 교수가 정리해 놓은 『다산의 재발견』과 『삶을 바꾼 만남』, 『다산 증언첩』을 시작으로 여러 판본의 다산 자료들과 다산의 일생을 정리해 놓은 『다산의 한평생』을 읽었다. 그리고 다산의 둘째 아들의 시선으로 다산의 삶을 정리한 『다산의 아버님께』도 펼쳤고, 그가 쓴 산문을 번역한 책들에 이어 그가 남긴 지인들의 묘지명까지도 훑었다. 거기에 정약용이 관여했다고 전해지는 한국천주교회사 초창기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까지 들여다봤다. 그래도 나는 다산을 ‘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조각 이어붙인 정보들을 가지고 그가 남긴 편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훨씬 잘 읽혔다. 편지를 읽을 때마다 조선시대에 박재돼 있는 편지를 ‘지금 여기’로 불러오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고지식하고 꼰대같은 학자 아버지 말고, ‘사람이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 정약용’의 말들을 쉽게 전하고 싶은 열망. 나는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내 삶의 에피소드를 얹어 그의 편지를 소개하는 『다산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를 쓰기 시작했다.


다산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과거의 편지를 읽고 현재의 이야기를 엮어가기에 내 깜냥이 부족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작년 말까지 서른여섯 개의 꼭지를 쓰는 것이 목표였는데, 스무 개의 꼭지를 완성했을 뿐이다. 열여섯 개의 꼭지를 더 쓰기 위해서 내겐 더 많은 생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자료들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 무렵 ‘도서출판 산처럼’에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다산이오』 (이하 『나는 다산이오』로 표기)를 출간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책을 주문했다.


『나는 다산이오』는 다산의 유배생활 18년을 일기 형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정조가 다산의 재기를 돕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책을 선물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정조의 죽음과 정약종의 책롱 사건으로 다산이 옥에 갇혀 취조를 당하고 장기(포항)으로 유배를 떠나는 일로 이어진다.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 때문에 한양으로 압송돼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고 그곳에서 해배될 때까지 살아가는 다산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책의 장점은 다산의 유배 생활을 한 흐름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살펴 본 편지 관련 책을 통해서는 장기에서 다산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다산이오』는 다산이 쓴 편지 뿐 만 아니라 그가 남긴 많은 기록들을 살펴 다산의 삶을 재구성했기에 그동안 여러 책에서 생략했던 다산의 날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다산이 시골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장기에서 『촌병혹치』라는 의서를 쓰고, 큰 아들 학연이 「종축회통」이라는 농서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다산이 장기에서도 백성을 위한 저술을 했다는 것을 몰랐고, 둘째 아들 학유만 농사에 관련된 책을 썼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 속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아내를 향한 깊은 마음도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어 기뻤다. 무엇보다 유배인으로 살았으나, 하늘이 허락한 날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그를 만날 수 있어서 고마웠다.


혹시 다산이 유배지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한 흐름에 읽고 싶다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냈는지가 궁금하다면, 다산의 삶이 궁금한데 다른 책들이 어려워서 시작하기가 두렵다면 이 책을 펼쳐보시라!


소설인 듯 수필인 듯 술술 읽히지만,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다산에 관한 사료를 읽었다는 뿌듯함으로 스스로가 한 뼘 더 성장했음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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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걷다 - 인문학자 김경집이 건네는 18가지 삶의 문답
김경집 지음 / 휴(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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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덜어내려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떠돌던 발길이 서점에 닿아 책장에 꽂혀 ‘등뼈’를 드러내고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지요. 그러다 『생각을 걷다』를 만났습니다. ‘생각’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와 책을 빼들었어요. 그제야 ‘인문학자 김경집이 건네는 18가지 삶의 문답’이라는 부제가 보였습니다. 반가운 이름에 마음의 손을 흔들어 보았는데, 보셨을까요?      


<<생각을 걷다>>, 김경집, 휴

제가 ‘김경집’이라는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만난 건, TV에서였습니다. 한 프로그램에 선생님께서 패널로 출연해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편지에 관해 읽고 쓰는 저에게는 반가운 이야기였던터라 선생님의 이름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 인문학』을 읽으며 ‘인문학자’인 선생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어요. 엄마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엄마는 교양인>이라는 책을 구상했던 저에게 참 의미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 후 『인문학은 밥이다』를 구입했는데, 그 두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녹여야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하기도 했지요. 깊고 단단한 글들을 마음이 닿을 때마다 몇 페이지씩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인문학은 밥이다』를 다 읽지 못했는데 선생님의 새로운 책 소식을 접했습니다.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였지요. 목차를 훑어보니 곁에 두고 읽으면 좋을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구입했어요. 책장에 꽂아두면 언젠가 또 꺼내 볼 날이 올테니까요.      


 『생각을 걷다』는 제가 네 번째로 만난 선생님의 책입니다. 목차를 살펴보기도 전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어떤 이는 내가 절에 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웅전에 들어가서 합장하며 부처님께 인사하는 게 영 마뜩잖은 눈치다. 내가 가톨릭신자인 걸 아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숲을 이루는 나무의 지혜>를 시작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이 구절들을 읽으며 저는  『생각을 걷다』가 제 책장에 꽂히게 되리란 걸 예감했어요.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대웅전에 들어가 합장하며 부처님께 인사하던 신부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부님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어요. 가톨릭의 사제가 부처에게 인사를 하다니! 어린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저를 향해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종교가 중요하면, 다른 이의 종교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나와 다른 이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 때 처음, 다른 이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문장을 읽으니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왠지 이 책을 읽다보면 엉켜있는 생각의 실타래들이 풀릴 것 같은 예감도 들었고요. 그래서 책을 집으로 데려와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겸손은 말과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낄 때 실존한다.’


‘인문 정신은 역동적이다. 물론 때론 아주 조용히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인문 정신은 역동적이어야 한다.’     


프롤로그부터 밑줄을 긋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 문장이 있었지요.     


‘내게 가장 역동적인 일은 책을 읽는 일이다. 남들은 책 읽는 일이 아주 정적인 일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물론 몸을 크게 움직일 일 없고 의자에 앉아 고요히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니 일견 그렇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뇌세포는 총동원되어 긴장하고 끊임없이 묻고 캐고 따지는 일에 몰두한다.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것만 동적인 게 아니다. 뇌의 근육과 가슴의 올들이 촘촘히 일어선다. 그러니 그것만큼 역동적인 일은 달리 찾기 어렵다.’     


아! 얼마나 반가운 문장들이었는지 몰라요! 그 느낌을 저도 알거든요! 책을 읽는 게 얼마나 역동적인 일인지 말이에요. 눈은 문장을 읽지만, 머릿속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빠르게 돌아가죠. 손은 펜을 찾아 들고 떠오른 생각들이 사라지기 전에 적어놓느라 분주하고요. 이런 일이 부족한 게 많은 저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 같은 학자도 그러신다니 내 책읽기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싶어 반가웠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시작된 공감은 책장을 넘기며 더 커졌습니다. 히말라야 여행을 준비하고, 네팔에 도착해 산행을 시작하는 선생님을 따라 저도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타르초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도 상상해보고, 경전을 읽고 가는 바람 소리도 떠올려 보았습니다. 수없이 들어온 “나마스테”라는 말이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뜻이었다는 걸 알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 짧은 인사가 이토록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었다니요! 누군가 나에게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건넬 때마다 그 감격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여행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요. 저는 이걸 ‘인생은 7번국도’라고 말하곤 합니다. 목적지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한 번에 가는 인생보다, 7번 국도를 타고 가면서 바다도 보고, 꽃도 보고, 길을 거니는 사람들도 만나는 게 더 멋진 인생이라고요. 몇 년 후, 삶을 통해 생각이 자라면 《인생은 7번국도》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꿈꿔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지난 가을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 머물던 날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길은 걷는 곳이기도 하지만 묻는 곳이기도 하다. 단순해지니 저절로 물음이 쏟아진다. 주변에 빼앗겼던 정신을 되찾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가을, 저는 소리가 없는 곳으로 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홀로 피정을 떠났습니다. 복잡한 모든 것에나 벗어나 단순하게 살고 싶었어요. 수도원에서 느리게 걷고, 때론 걸음을 멈추면서 수많은 질문을 만났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마음을 모았지요. 그러나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질문에는 대답 할 수 있었고, 어떤 질문에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홀로 고요히 머물며 대답을 찾으려 했던 그 시간들이 다시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으니까요. 수도원에서 보낸 며칠을 떠올리면서, 선생님 왜 그토록 걷고 또 걷는 지극히 단순한 여행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안나푸르나의 3,000미터 고도에서 고산병을 예방하는 예비약이 나무와 꽃임을 깨달으셨지요. 풍경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것도 알아채셨고요. 그리고 그곳에서 네팔의 ‘미래’인 도서관도 만났습니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도서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격하고 또 감격하셨지요. 저도 그 대목에서는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생각을 걷다』에서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삶과 죽음을 가를 그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안나푸르나의 마지막 고개를 넘으며, 잠깐 쉰다고 돌에 앉았던 선생님이 잠이 들었다는 대목을 읽는데 걱정이 됐어요. 그래도 털북숭이 서양 남자가 선생님을 깨우고, 선생님이 일어서는 걸 확인하고 갔다고 해서 안도 했습니다. 아, 그런데 피곤에 지치고 산소가 부족했던 선생님의 몸은 자꾸 오른쪽으로 쏠렸다지요. 의식도 희미해져 가던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하셨어요. “앉아!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선생님은 그 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셨고, 그러다 돌에 무릎을 찍히고 말았죠.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선생님이 가파른 벼랑 끝에 겨우 앉아 있었다는 걸 알고는 전율했습니다. 히말라야 그 산길에서 도대체 누가 한국말로 선생님께 외친 걸까요? 


저는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네팔에 도착했을 때부터 선생님을 향해 “나마스테”라고 말하며, 합장을 하던 그들의 마음이 선생님을 살린 게 아닐까, 어쩌면 매번 미사를 드릴 때마다 선생님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축복해주던 이웃들의 기도가 위험한 순간에 반짝 빛난 것은 아닐까...하고요. 그리고 더불어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합장하며 “나마스테”라고 건넨 인사가, 하느님의 어린양을 부르기 전에 곁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건넨 축복이 어딘가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누군가를 살려낼 수도 있다고요….    




선생님과 안나푸르나를 걸으며 이리 저리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제 자리에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위로받았고, 다시 읽고 쓸 힘을 얻었어요. 얼어붙어 있던 마음에 새싹 하나가 돋아나는 기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른은 반드시 청년의 삶에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세상을 바꿔줘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새길게요.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주저앉은 마음이라도 일으켜 세워주는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런 어른이 되는 길목 어딘가에서 선생님과 또 한 번 생각 위를 걷게 되기를 꿈꿔봅니다.      


고맙습니다, 『생각을 걷다』를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게 생각을 걸을 용기를 주셔서.     


                                                         2019년 1월, 글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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