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걷다 - 인문학자 김경집이 건네는 18가지 삶의 문답
김경집 지음 / 휴(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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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덜어내려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떠돌던 발길이 서점에 닿아 책장에 꽂혀 ‘등뼈’를 드러내고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지요. 그러다 『생각을 걷다』를 만났습니다. ‘생각’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와 책을 빼들었어요. 그제야 ‘인문학자 김경집이 건네는 18가지 삶의 문답’이라는 부제가 보였습니다. 반가운 이름에 마음의 손을 흔들어 보았는데, 보셨을까요?      


<<생각을 걷다>>, 김경집, 휴

제가 ‘김경집’이라는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만난 건, TV에서였습니다. 한 프로그램에 선생님께서 패널로 출연해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편지에 관해 읽고 쓰는 저에게는 반가운 이야기였던터라 선생님의 이름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 인문학』을 읽으며 ‘인문학자’인 선생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어요. 엄마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엄마는 교양인>이라는 책을 구상했던 저에게 참 의미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 후 『인문학은 밥이다』를 구입했는데, 그 두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생각을 녹여야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하기도 했지요. 깊고 단단한 글들을 마음이 닿을 때마다 몇 페이지씩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인문학은 밥이다』를 다 읽지 못했는데 선생님의 새로운 책 소식을 접했습니다.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였지요. 목차를 훑어보니 곁에 두고 읽으면 좋을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구입했어요. 책장에 꽂아두면 언젠가 또 꺼내 볼 날이 올테니까요.      


 『생각을 걷다』는 제가 네 번째로 만난 선생님의 책입니다. 목차를 살펴보기도 전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어떤 이는 내가 절에 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웅전에 들어가서 합장하며 부처님께 인사하는 게 영 마뜩잖은 눈치다. 내가 가톨릭신자인 걸 아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숲을 이루는 나무의 지혜>를 시작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이 구절들을 읽으며 저는  『생각을 걷다』가 제 책장에 꽂히게 되리란 걸 예감했어요.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대웅전에 들어가 합장하며 부처님께 인사하던 신부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부님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어요. 가톨릭의 사제가 부처에게 인사를 하다니! 어린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저를 향해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종교가 중요하면, 다른 이의 종교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요. 그리고 ‘우리는 나와 다른 이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 때 처음, 다른 이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문장을 읽으니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왠지 이 책을 읽다보면 엉켜있는 생각의 실타래들이 풀릴 것 같은 예감도 들었고요. 그래서 책을 집으로 데려와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겸손은 말과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낄 때 실존한다.’


‘인문 정신은 역동적이다. 물론 때론 아주 조용히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인문 정신은 역동적이어야 한다.’     


프롤로그부터 밑줄을 긋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 문장이 있었지요.     


‘내게 가장 역동적인 일은 책을 읽는 일이다. 남들은 책 읽는 일이 아주 정적인 일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물론 몸을 크게 움직일 일 없고 의자에 앉아 고요히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니 일견 그렇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뇌세포는 총동원되어 긴장하고 끊임없이 묻고 캐고 따지는 일에 몰두한다.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것만 동적인 게 아니다. 뇌의 근육과 가슴의 올들이 촘촘히 일어선다. 그러니 그것만큼 역동적인 일은 달리 찾기 어렵다.’     


아! 얼마나 반가운 문장들이었는지 몰라요! 그 느낌을 저도 알거든요! 책을 읽는 게 얼마나 역동적인 일인지 말이에요. 눈은 문장을 읽지만, 머릿속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빠르게 돌아가죠. 손은 펜을 찾아 들고 떠오른 생각들이 사라지기 전에 적어놓느라 분주하고요. 이런 일이 부족한 게 많은 저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선생님 같은 학자도 그러신다니 내 책읽기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싶어 반가웠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시작된 공감은 책장을 넘기며 더 커졌습니다. 히말라야 여행을 준비하고, 네팔에 도착해 산행을 시작하는 선생님을 따라 저도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타르초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도 상상해보고, 경전을 읽고 가는 바람 소리도 떠올려 보았습니다. 수없이 들어온 “나마스테”라는 말이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뜻이었다는 걸 알고,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 짧은 인사가 이토록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었다니요! 누군가 나에게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건넬 때마다 그 감격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여행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요. 저는 이걸 ‘인생은 7번국도’라고 말하곤 합니다. 목적지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한 번에 가는 인생보다, 7번 국도를 타고 가면서 바다도 보고, 꽃도 보고, 길을 거니는 사람들도 만나는 게 더 멋진 인생이라고요. 몇 년 후, 삶을 통해 생각이 자라면 《인생은 7번국도》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꿈꿔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지난 가을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 머물던 날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길은 걷는 곳이기도 하지만 묻는 곳이기도 하다. 단순해지니 저절로 물음이 쏟아진다. 주변에 빼앗겼던 정신을 되찾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가을, 저는 소리가 없는 곳으로 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홀로 피정을 떠났습니다. 복잡한 모든 것에나 벗어나 단순하게 살고 싶었어요. 수도원에서 느리게 걷고, 때론 걸음을 멈추면서 수많은 질문을 만났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마음을 모았지요. 그러나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질문에는 대답 할 수 있었고, 어떤 질문에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홀로 고요히 머물며 대답을 찾으려 했던 그 시간들이 다시 살아갈 힘이 되어 주었으니까요. 수도원에서 보낸 며칠을 떠올리면서, 선생님 왜 그토록 걷고 또 걷는 지극히 단순한 여행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안나푸르나의 3,000미터 고도에서 고산병을 예방하는 예비약이 나무와 꽃임을 깨달으셨지요. 풍경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것도 알아채셨고요. 그리고 그곳에서 네팔의 ‘미래’인 도서관도 만났습니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도서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감격하고 또 감격하셨지요. 저도 그 대목에서는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생각을 걷다』에서 가장 놀라웠던 장면은 <삶과 죽음을 가를 그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안나푸르나의 마지막 고개를 넘으며, 잠깐 쉰다고 돌에 앉았던 선생님이 잠이 들었다는 대목을 읽는데 걱정이 됐어요. 그래도 털북숭이 서양 남자가 선생님을 깨우고, 선생님이 일어서는 걸 확인하고 갔다고 해서 안도 했습니다. 아, 그런데 피곤에 지치고 산소가 부족했던 선생님의 몸은 자꾸 오른쪽으로 쏠렸다지요. 의식도 희미해져 가던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하셨어요. “앉아!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선생님은 그 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셨고, 그러다 돌에 무릎을 찍히고 말았죠.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선생님이 가파른 벼랑 끝에 겨우 앉아 있었다는 걸 알고는 전율했습니다. 히말라야 그 산길에서 도대체 누가 한국말로 선생님께 외친 걸까요? 


저는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네팔에 도착했을 때부터 선생님을 향해 “나마스테”라고 말하며, 합장을 하던 그들의 마음이 선생님을 살린 게 아닐까, 어쩌면 매번 미사를 드릴 때마다 선생님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축복해주던 이웃들의 기도가 위험한 순간에 반짝 빛난 것은 아닐까...하고요. 그리고 더불어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합장하며 “나마스테”라고 건넨 인사가, 하느님의 어린양을 부르기 전에 곁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건넨 축복이 어딘가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누군가를 살려낼 수도 있다고요….    




선생님과 안나푸르나를 걸으며 이리 저리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제 자리에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위로받았고, 다시 읽고 쓸 힘을 얻었어요. 얼어붙어 있던 마음에 새싹 하나가 돋아나는 기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른은 반드시 청년의 삶에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세상을 바꿔줘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새길게요.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주저앉은 마음이라도 일으켜 세워주는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런 어른이 되는 길목 어딘가에서 선생님과 또 한 번 생각 위를 걷게 되기를 꿈꿔봅니다.      


고맙습니다, 『생각을 걷다』를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게 생각을 걸을 용기를 주셔서.     


                                                         2019년 1월, 글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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