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사, 기쁨과 희망의 여정
김선필 지음 / 눌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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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주교 신자다. 어릴 때 친구들 따라 교회를 전전하다 일곱 살 때 성당에 정착했다. 그 후로 40년 동안 천주교 신자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신심이 깊은 건 아니다. 물론 젊은 날 많은 시간을 교회 사목에 투신하며 그 분 가까이에 머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삶이 퍽퍽할 때는 신앙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먹고 사니즘’이 중요한 상황에서 삶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신앙인이 된다고 해서 신심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지 않는다. 마치 인생에 생기는 여러 굴곡처럼 심신이 올라갈 때도 있고 바닥을 칠 때도 있고,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때도 있다. 그래서 내 신앙 그래프는 수많은 곡선들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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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모습도 이와 닮아있다. 신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이 있었을 때도 있었고,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세상의 어둠을 외면한 때도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그래프도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곡선을 갖고 있다. 교회라고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늘을 향해 쫙- 치솟는 그래프를 그리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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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명확해 진 것은 최근에 읽은 《한국 천주교회사, 기쁨과 희망의 여정》(김선필, 눌민, 2021) 덕분이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 속에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데, 시선이 좀 남다르다. 그동안 한국천주교회사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조선시대 때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의 편지를 읽기 위함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알아야 그들의 편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 관련 책들을 더러 읽었는데,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읽은 책들과 조금 다른 결을 갖는다. 그것은 저자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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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선필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천주교 신앙을 이어받아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결국 평신도의 삶을 선택’했다. 광주와 수원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배웠고, 제주도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한국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종교사회학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신학을 배우고 사회학을 공부한 ‘사회학자가 한국교회를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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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건 목차에서 발견한 ‘황사영’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정조 승하 후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황사영은 조선의 실상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베론으로 숨어들어 토굴에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하얀 명주천 위에는 조선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이름과 조선의 현실, 서양의 큰 배를 보내 죽어가는 신자들을 구해달라는 청원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북경에 전해지기 전에 조선에서 발각되었다. 이 일로 황사영은 능지처참(팔 다리, 어깨 가슴 등을 각각 벤 후, 심장을 찌른 뒤 머리를 잘라내는 형벌)당하고, 가족들은 거제도와 제주도, 추자도로 흩어져 살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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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은 물론 교회 밖에서도 황사영에 대한 시선은 엇갈린다. 그가 교회를 위해 일하다 죽은 ‘순교자’라는 시선과 나를 팔아먹으려 한 ‘매국노’라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황사영에 대해 김선필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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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은 교회의 입장에 충실했던 신앙인이자, 순교자였습니다. 또한 자신과 동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노력했던 인권운동가였습니다. 반면 나라를 중요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황사영은 개인의 이익을 나라보다 우선시한 배신자일 수 있습니다. 황사영이라는 다면적인 인물을 한쪽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황사영의 공과(功過)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가 처했던 상황과 고뇌, 그리고 당시 교회와 한국 사회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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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교회가 시작된 1784년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맹인모상(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맹인이 코끼리를 만진 후 자신이 만지고 느낀 코끼리가 진짜 코끼리라고 말하는 것을 비유)’처럼 일부만을 보지 말고 전체를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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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시선으로 교회의 역사를 짚어간다. 교회가 빛과 그림자로 존재했던 시간들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분석하고 그 이유를 제시한다. 덕분에 나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가진 교회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때 교회가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일본에 협조한 이유에 대해 오랜 시간 박해를 받다 이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교회가 또 다시 박해를 받고 무너질 것을 우려해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고 그때의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핍박받는데 교회가 혼자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냐고 하던 내가 ‘교회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됐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변화다.)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교회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학순 주교 사건을 비롯해 김수환 추기경님의 행보들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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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 밑줄을 치며 읽은 《한국 천주교회사, 기쁨과 희망의 여정》에는 실로 거대한 자료들의 등장한다. 한국천주교회 초창기 자료는 물론, 교황의 사목교서, 공의회 자료, 단행본, 신문기사, 수많은 연구자들의 논문까지! 저자는 8년 동안 이 자료들을 보고 또 보며 한국천주교회가 앞으로 나가야 할 ‘기쁨과 희망의 여정’에 대한 글을 썼다. 한 사람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도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일인데, 한국천주교회의 200년 역사를 톺아보는 일은 얼마나 고단한 여정이었을까! 고단했으나 분명 기쁨의 여정이었을 시간을 건너 교회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제시한 저자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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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이 책을 읽으면 교회뿐 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질 것이라고. 세상에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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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X다 - 부디 당신은 O를 골라요
김별로 지음 / 포르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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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를 장착한 리얼 항암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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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X다 - 부디 당신은 O를 골라요
김별로 지음 / 포르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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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을 받았다. 2년에 한 번씩 하는 단순한 건강검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됐다. 얼마 전부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오래 전 나를 고통으로 밀어넣었던 증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하던 마음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될 대로 되라지! !’ 체념으로 바뀌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인생, X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은 건, ‘항암 분투기라는 말 때문이었다. ‘항암 분투기투병기라는 말인데... 긴 시간을 앓아본 사람은 안다. ‘투병기라는 단어 속에 얼마나 날카로운 고통이 깃들어 있는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널을 뛴다는 걸.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말이다. 나도 그랬다. 조직검사를 하면서 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다행히 암은 아닙니다라는 의견을 들었을 때는 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약을 쓰긴 하겠지만, 낫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은 나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고,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며 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낫지 않는 병을 앓으며 차라리 죽고 싶었다. 환부 때문에 아이들을 안아줄 수 없어 우울했고, 거울에 비친 내가 아닌 나를 보며 거울을 내려치고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그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투병기라니, 읽지 않겠어!

 

첫 마음과 달리 책을 구입한 건 기억때문이었다. 물론 편집자치고 이 작가를 모르는 이는 없다고 장담한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에 혹!한 것도 있었다. 그가 누군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최종적으로 이 책을 선택한 건 인터넷 서점에서 미리 본 한 줄 때문이었다.

 

고창에 내려오던 날, 집 앞 골목에서 나를 보며 성호를 그으시던 어머니가 있고

 

내게도 날마다 아픈 나를 위해 성호를 긋던 엄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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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서문부터 유쾌했다. 아픈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머가 가득했고, 통통 튀는 문장에는 생명력이 가득했다. 역시 카피라이터다웠다.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신선하게 읽힌 건 그의 글 솜씨 때문이었다. 단어를 가지고 노는 경지가 남다른 클라스라고나 할까.

 

코감기로 병원을 찾았다가, 암 진단을 받은 저자의 항암 분투기는 서울과 고창과 일본과 강릉을 넘나든다. 그가 서울의 병원에서 얌전하게!’ ‘항암!’만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항암 치료에 앞서 암 관련 책을 수 십 권 독파한다. 그리고 분투를 시작한다. 먼저 고창에서 리셋버튼을 누르, 일본의 타마가와 온천에갔다가, 다시 동쪽에 있는 강릉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 결국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뉴클리어 런치 디텍티드!라고 외치면서. (스타크래프트에서 핵을 투하할 때 나오는 경고 메시지인데,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코에 핵을 투하하는 항암을 하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저자의 항암 분투기를 읽으면서 참 많이 웃었다. 아프다는 사람이 이렇게 웃겨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저자는 글을 참 유쾌하게 썼다. 특히 일본에서 받은 감동을 전하며 쓴 마무리 발언은 진짜 포복절도 할 정도였다. 게다가 책에는 밑줄을 긋고 싶을 만큼 암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많았다. 진단부터 항암까지 어떤 절차가 있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내게 혹은 내 주변에 이런 일이 닥친다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이 유쾌하고 재밌다고 해서 그의 아픔이 보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웃고 있어도 진짜 슬픈 사람의 눈에서는 슬픔이 보이는 것처럼, 저자의 웃음 속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의 서문을 읽으며 저자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내 삶의 궤적이 그의 삶과 약간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고, 나는 그가 쓴 첫 책의 독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완쾌를 기원했다. 보험회사에서 단 번에 1억을 줄만큼 고위험군에 속하는 암일지라도, 그의 유쾌함으로 잘 이겨내기를, 불법 쪼개기를 해서 소음이 가득한 방이 아니라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고요한 그 방에서 톡으로 전송받은 선물을 잘 누리시기를! 그리하여 새로 태어난 김별로라는 이름이 반짝반짝 빛나는 길()’이 되기를, 오래오래 그 길이 빛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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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이야기의 이야기 상상 청소년소설 1
이만교 지음 / 상상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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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제 자네의 이야기를 읽었네. 이만교작가가 쓴 《이야기의 이야기의 이야기》였지. ‘얼굴서책’을 통해 만난 벗들이 자네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네. 그런데 하나같이 속 시원하게 얘기해주지 않고, 그저 깨작깨작 감질나게 하지 않겠나.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가 친히 ‘등잔서점’에 주문을 넣고, 자네의 이야기를 받아 펼쳐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책은 무사히 도착했네. 표지를 보니 갓을 쓰고 도포를 두른 어떤 사내의 목에 칼날이 겨누어진 그림이 있더군.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서 띠지를 풀어보았네. 그제야 그림의 전체가 보이더군. 사내 발밑에 둘둘 말린 종이 같은 게 보였네. 사내는 바위를 딛고 서 있었어.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위처럼 보이는 것들도 이야기가 적힌 종이 같더군.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이런 그림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다네.

책은 이야기 장수인 자네, ‘전기수(傳奇叟)’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됐네. 서당에 나가 친구들과 공부를 하던 학동이었던 자네가 어쩌다가 이야기 장수가 되었는지를 풀어내고 있었지. 나는 그저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듣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네. 그런데 말일세, 참 신기하더군. 자네는 분명히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 머리는 자꾸 ‘아, 글의 소재는 이렇게 잡는구나’, ‘이야기의 원형과 저작권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렇지. 글은 이 친구처럼 고치고 또 고치면서 원하는 한 문장을 찾는 거지’ 같은 생각이 떠다니더군. 옛날이야기 한 편을 읽으며 머리가 혼자서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네. 참 기묘한 경험이었어.

게다가... 부끄럽지만 자네에게만 고백하자면, 나는 자네가 이야기 때문에 화를 당하는 부분을 보면서 혼자 울컥했네. 이야기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네. 권력가들에게 노여움을 사든, 대중들의 미움을 사든 그것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겪는 빈번한 일이니 말일세. 어쩌면 언젠가의 내 모습일수도 있고 말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네처럼 또 이야기를 만들고 있지. 왜냐면 그것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네. 자네가 목숨을 걸고 ‘활XX’의 ‘X정이’의 이야기를 썼듯, 이야기꾼들에게는 쓰기를 멈출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니 말일세.

나는 그동안 ‘글쓰기’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네. 내 자신이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고, ‘대안학당’에 글쓰기를 배우러 오는 학동들에게 ‘잘 알려주는 선생’이 되고 싶어서였지. 그런데 말일세, 자네 이야기는 그동안 내가 읽었던 글쓰기 책중에 단연 최고였네. ‘이야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으니 말일세. 이것이야말로 1타 3피가 아니겠는가! (자네가 잘 모를듯하여 설명하자면, 1타 3피는 하나를 내고 세 개를 얻는다는 뜻이네. 한 번에 얻는 게 많다는 것이니 엄청 좋다는 뜻이지.) 내 이제 학동들이 글쓰기에 대해 물으면 자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네. 하지만 나도 ‘얼굴서책’ 벗들처럼 속 시원하게 말해 주지는 않을 거라네. 자네 이야기를 감질나게해서 그들이 직접 읽도록 만들 것이라네. 자네와 단 둘이 마주앉아야 자네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을테니까 말일세.

자네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마웠네. 덕분에 참 많은 것을 깨달았어. 그런데 말일세, 자네는 더 이상 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인가? 나는 믿지 않네. 자네가 청나라의 이야기를 혼자서 비밀 수첩에 적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네. 그러니 적당한 때에 그 이야기도 들려주시게. 선우의 이름이로든 자네의 이름으로든 청나라로 떠난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다리겠네. 아, 알겠네. 다음에 자네가 청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도 내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네. 어디 한 번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날이 새도록 이야기꽃을 활짝 피워봄세나.
그럼 몸 건강히 잘 지내다 오시게.

신축년 여름, 자네의 이야기에 홀려버린 벗이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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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 -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진 이름. 평생을 방랑자로 산 작가 김사량의 작품집
김사량 지음, 김석희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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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근대작가들의 편지를 들여다보려고 그 시대 작가들의 이름을 찾던 때였지요. 정지용, 임화, 이태준, 한설야, 이용악 등의 이름을 보던 제게 누군가 김사량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워낙 문학적 지식이 빈곤했던 터라 교과서에서 배웠던 정지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낯선 이름이었습니다만, 김사량은 정말 낯설고 낯설었습니다. ‘김사랑도 아니고 김사량이라니요. 당신이 일본어로 글을 썼고, 해방 후 북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뿐이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남긴 편지가 있을까 검색해봤지만 당신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을 잊어갔습니다. 내겐 당신 말고도 기억해야 할 이름이 많았으니까요.

 

당신의 이름을 다시 만난 건 빛 속으로(김석희 옮김, 녹색광선)라는 책에서였습니다. 당신의 작품 네 편이 실린 책이었지요. 당신의 이름만 들어봤을 뿐, 어떤 작품도 본 적이 없는 나는 설레는 맘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빛 속으로>, <천마>, <풀이 깊다>, <노마만리>를요. 작품 하나하나가 마음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잔잔하게, 그러나 넓게.

 

당신의 이름을 대표하는 <빛 속으로>는 역시 좋았습니다. 하루오, 남선생, 이군 등 모든 등장인물이 그 시절의 삶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보여주는 게 좋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해주어 좋았습니다. 저는 <빛 속으로>를 읽으면서, 한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부름으로써 그가 가진 반짝이는 빛 속으로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 만으로도요.

 

<천마>를 읽는 동안은 내내 그림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19377, 개벽사에서 발행한 별건곤의 표지였지요. 없는 게 없는 휘황찬란한 도시 속에 자살장이 있고, 그 아래는 지금 막 그곳에서 뛰어내린듯한 사람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천마>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자살장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을까, 숨을 쉬고 살아있지만 이미 영혼은 저 곳에서 뛰어내린 수많은 현룡들이 존재했겠구나 싶었습니다.

 

<풀이 깊다>에서 만난 코풀이 선생님OX를 등에 지고 있던 하얀 옷을 입은 이름 모를 사람들도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습니다. 물론 태어나고 자란 땅을 버리고 먼 길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이야기를 다룬 <노마만리>도 많은 여운을 남겼지요. 이 책에 실린 <노마만리>는 당신이 타이항산 지구의 항일근거지로 떠나는 과정을 담은 탈출기의 도입부라고 하니, 언젠가 전편을 읽을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당신의 작품을 엮은 빛 속으로를 읽고, 당신이 더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관련 자료들을 몇 개 찾아보고, 다른 이들이 쓴 당신의 이야기를 주문했습니다. 당신을 자세히 알아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책을 계기로 저는 당신의 이름을 자주 부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 여불비(餘不備)’라는 말은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당신이 <노마만리>에서 마지막 편지를 의미하는 뜻으로 썼던 그 단어말입니다. 그저 저는 총총(悤悤)’이라 적고 언젠가 또 다음 편지를 써 볼 생각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불러 당신을 만나고, 할 이야기가 또 쌓이고 쌓이면 오늘처럼 이렇게 편지 한 통을 쓰겠습니다. 우표 없이 보내는 제 편지가 방랑하고 있는 당신에게 꼭 도착하기를, 풀이 깊은 산 속이나 신사숙녀가 가득한 반점이나 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의 한 복판 어디에서라도 당신이 이 편지를 펼쳐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

어디선가 당신의 이름이 들리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빛 속으로를 통해 당신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당신의 이름을 부를 테니까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이 가진 반짝이는 빛 속으로향하는 이들과 반갑게 만나 뜨거운 악수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럼 방랑자 김사량 당신,

언젠가 또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부를 것을 약속하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당신의 방랑이 이제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맺습니다. 총총.

 

2021814,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친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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