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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행
호시노 도모유키 외 지음 / 문학세계사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단편을 모은 『인간은행』을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번역하신 김석희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덕분이었지요. 김석희 선생님과 저는 페이스북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아직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글 속에 담긴 마음을 읽으며 공감하는 사이지요.
『인간은행』을 받아들고 표제작부터 읽어볼까 하다가 역자가 글의 목차를 구성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순서대로 읽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엮을 때 흐름을 생각하지 않는 편집자는 없으니까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순서대로 읽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글들이 품고 있는 분위기가 어떤 흐름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걸 ‘나’→‘우리’→‘나’로 해석해보았습니다. 치매 아버지를 모시는 ‘나’에서 시작해 인간과 자연이 포함한 공동체를 거쳐서 다시 ‘나’란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글로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책의 가장 앞자리에 있던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에서는 호시노 도모유키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할까요? 당신은 치매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나’의 이야기가 사회 공동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문제는 결국 ‘사회공동체’ 모두의 문제라는 걸 말하고 있었지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몇 가지의 키워드를 발견했습니다. ‘노인문제’, ‘노동’, ‘생명’, ‘육식’, ‘젠더’였지요. 길지 않은 소설 속에 이렇게 다양한 키워드를 녹이다니! 저는 당신의 능력에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표제작 <인간은행>은 결코 자본주의를 떠날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걸 원하는 것은 아니며, 그 마음을 이용하는 또 다른 인간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카’의 등장은 소름이 돋을 만큼 공포스러웠다는 걸 고백해야겠군요.
누군가 『인간은행』에 실린 당신의 작품 중에서 단 한편만 골라달라고 한다면 저는 서슴없이 <스킨 플랜트>를 선택할 것입니다. 당신의 어마어마한 상상력에 온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타투에서 시작된 작은 행동이 헤어스타일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당신이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당신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라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단순한 생각 하나를 거대한 생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스킨 플랜트>를 읽으면서 가장 소름끼쳤던 것은 인간의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쾌락을 위해 인간을 포기한 인간들이 그대로 사라져버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다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꽃의 아이들’로요.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신이 따뜻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써도 결국에는 ‘함께’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읽지마>는 읽지말라는데도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매력인 작품이었고, <모미 쵸아요>는 ‘홈리스 축구단’이 있다는 걸 알려준 작품이었습니다. ‘하자센터’에 강연을 갔었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던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교육을 하고 있어서 마음 편한 장소였지만, 문제는 졸업한 뒤 한국 사회에 맞추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들었다’는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와 비슷한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에 대해서 알고 있거든요.
<핑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에 도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19년 전에 돌았던 방향을 마치 되감기 하듯이 반대로 감아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요. 어떤 방향으로 돌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몇 바퀴를 돌아 어디로 가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도착지로 정한 곳이 어디였는지 궁금하신가요? 그건 다음 기회에! (하하하)
<선배 전설>에서는 ‘홈네스’를 통해서 언어유희를 느꼈고, 집을 버림으로써 집을 얻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작품에서 당신은 ‘집’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저는 그 단어가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결국 인간은 모든 것을 버려야 자유를 만날 수 있구나! 깨달았지요. (그래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요. 흑흑)
<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에서는 한국 영화 <기생충>과 카프카의 작품 <변신>이 떠올랐습니다. 물난리가 난 지하방의 모습과 산도를 통해서 지구에 사는 생명체를 낳는 모리세의 모습이 두 작품을 떠올리게 했어요. 그리고 진심으로 궁금했습니다. 당신의 집에 물난리가 난 적이 었었는지... 수해 복구하는 장면이 너무 사실적이었거든요.
<눈알 물고기>를 읽기 시작했을 땐 ‘울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게 됐다’는 이야긴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맘 놓고 울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역시 당신은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펼쳐냈지요.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저는 당신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까마귀가 된 남자 <쿠엘보>와 일본인으로 불리는 걸 싫어했지만 결국 일본인임을 인정해야 했던 <치노>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어요. 책 읽기를 마치면서 ‘나’로 시작해 ‘우리’를 거쳤던 이야기들이 다시 ‘나’로 끝나는구나... 하면서 책장을 덮었습니다.
『인간은행』을 통해서 ‘호시노 도모유키’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왜 당신을 소설적 후계자로 지목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끝을 모르는 당신의 상상력에 감탄했고, 그 안에 녹아있는 따뜻함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쯤에서 당신을 알게 해준 김석희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군요. (김석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자 그럼, 언젠가 김석희 선생님을 통역사로 모시고 당신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는 상상력이 성장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2020년 8월 27일 목요일 서울에서 독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