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나락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조이스 박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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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당신의 단편을 묶은 행복의 나락이 도착했습니다. 하필이면 눈보라가 몰아치던 중이라 책은 한기를 잔뜩 품고 있었습니다. 표지에 맺힌 습기를 닦아내고 따뜻한 방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다 만 <위대한 개츠비>를 마저 감상했어요. 당신의 작품을 읽기 전에 나름의 준비운동이 필요했으니까요. 왜냐면 저는 당신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못했거든요.

 

당신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당신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썼다는 위대한 개츠비도 소문으로만 들었어요. 돈 많은 개츠비라는 사람에 관한 책이라는 소문이었지요. 저에게 영미문학은 접근하기 어려운 세계였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인지하는 저에게 가 본적도 없었고, 접할 기회도 없었던 그쪽 나라의 문화가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의 선입견은 어른이 돼서도 깨뜨리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동안 외국문학과는 거리를 두다 이제 조금씩 시선을 넓히는 중입니다.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은 영화 <지니어스><미드나잇 인 파리>였습니다. 그 속에서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느라 빚을 내고, 빚을 갚기 위해 또 글을 쓰는 당신을 보았지요. 심하게 휘청이며 살아가는 당신을 믿는 사람은 오직 맥스웰 퍼킨스 뿐이었습니다. ‘작가 스콧을 발견하고, 당신의 책을 세상에 내놓고, 끝까지 당신에게 글을 쓰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사람, 당신의 영원한 편집자말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당신은 삶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습니다. 환상 속에서 반짝이던 당신은 그렇게 소멸되고 말았지요.

 

당신의 단편 다섯 작품을 엮은 행복의 나락을 읽으면서 삶의 이중주를 연주한 당신을 보았습니다. 환상을 좇아가던 사람들이 결국에는 환멸을 경험하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당신의 삶이 그들과 같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환상과 환멸이 공존한다는 역자의 말처럼 당신의 삶에도 두 가지의 선율이 함께 연주되었습니다. 아마도 삶의 이중주는 당신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이 연주하는 곡이겠지요. 사랑이 올 때 이별이 같이 오는 것처럼 삶의 기쁨 뒤에는 꼭 슬픔이 숨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 사실을 잊고 나에게는 늘 좋은 것만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살았습니다. 환상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갔지요.

 

그러나 저는 이제 환상보다 환멸을 먼저 생각합니다. 삶이 더 이상 나에게 환상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의 끝은 환멸이라는 걸 너무 잘 아는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꿈꾸고 설레는 일보다 상처를 끌어안아야 하는 일이 더 많다는 걸 배웠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소멸할 환상일지라도 삶을 반짝이게 하는 무언가가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것이 신이 허락한 내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환상과 환멸이 같이 오는 것은 내 삶에 생명력을 주기 위한 신의 배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죽어있는 날들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마음에 다양한 감정이 일렁여 끊임없이 피고 지는 날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요. 당신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끝내 소멸할지라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환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게 아닐까요?

 

당신의 작품을 로 읽으면서 당신이 정말 빛나는 문체를 지닌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을 만큼, 당신의 문장들이 좋았어요.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문체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스콧! 혹시 언젠가 당신의 글을 우리말로 바꾼 역자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시길! 축배를 들기 위해 와인 잔을 부딪칠 예정이라면, 그 옆에 체리가 듬뿍 담긴 바구니를 함께 준비하세요. ‘체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역자에게 충분한 감사 인사가 될 테니까요.

 

저는 이제 당신과 맥스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야겠습니다. 당신에 대해 조금 알았으니 두 사람이 편지를 읽으며 당신을 더 깊이 알아가야겠습니다. 물론 책으로 읽지 못한 위대한 개츠비도 읽어야겠지요. 그러다보면 당신에게 또 편지를 쓰게 될 날이 오겠지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스콧! 저의 다음 편지도 기다려주세요. 또 편지할게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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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행
호시노 도모유키 외 지음 / 문학세계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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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단편을 모은 『인간은행』을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번역하신 김석희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덕분이었지요. 김석희 선생님과 저는 페이스북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아직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글 속에 담긴 마음을 읽으며 공감하는 사이지요. 


『인간은행』을 받아들고 표제작부터 읽어볼까 하다가 역자가 글의 목차를 구성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순서대로 읽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엮을 때 흐름을 생각하지 않는 편집자는 없으니까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순서대로 읽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글들이 품고 있는 분위기가 어떤 흐름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걸 ‘나’→‘우리’→‘나’로 해석해보았습니다. 치매 아버지를 모시는 ‘나’에서 시작해 인간과 자연이 포함한 공동체를 거쳐서 다시 ‘나’란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글로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책의 가장 앞자리에 있던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에서는 호시노 도모유키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할까요? 당신은 치매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나’의 이야기가 사회 공동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문제는 결국 ‘사회공동체’ 모두의 문제라는 걸 말하고 있었지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몇 가지의 키워드를 발견했습니다. ‘노인문제’, ‘노동’, ‘생명’, ‘육식’, ‘젠더’였지요. 길지 않은 소설 속에 이렇게 다양한 키워드를 녹이다니! 저는 당신의 능력에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표제작 <인간은행>은 결코 자본주의를 떠날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걸 원하는 것은 아니며, 그 마음을 이용하는 또 다른 인간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카’의 등장은 소름이 돋을 만큼 공포스러웠다는 걸 고백해야겠군요. 


누군가 『인간은행』에 실린 당신의 작품 중에서 단 한편만 골라달라고 한다면 저는 서슴없이 <스킨 플랜트>를 선택할 것입니다. 당신의 어마어마한 상상력에 온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타투에서 시작된 작은 행동이 헤어스타일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당신이 궁금해졌습니다. 도대체 당신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자라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단순한 생각 하나를 거대한 생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스킨 플랜트>를 읽으면서 가장 소름끼쳤던 것은 인간의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쾌락을 위해 인간을 포기한 인간들이 그대로 사라져버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다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꽃의 아이들’로요.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신이 따뜻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써도 결국에는 ‘함께’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읽지마>는 읽지말라는데도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매력인 작품이었고, <모미 쵸아요>는 ‘홈리스 축구단’이 있다는 걸 알려준 작품이었습니다. ‘하자센터’에 강연을 갔었다는 부분이 흥미로웠던 것은 ‘굉장히 재미있는 교육을 하고 있어서 마음 편한 장소였지만, 문제는 졸업한 뒤 한국 사회에 맞추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들었다’는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와 비슷한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에 대해서 알고 있거든요.  


<핑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에 도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19년 전에 돌았던 방향을 마치 되감기 하듯이 반대로 감아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요. 어떤 방향으로 돌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몇 바퀴를 돌아 어디로 가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도착지로 정한 곳이 어디였는지 궁금하신가요? 그건 다음 기회에! (하하하) 


<선배 전설>에서는 ‘홈네스’를 통해서 언어유희를 느꼈고, 집을 버림으로써 집을 얻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작품에서 당신은 ‘집’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저는 그 단어가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결국 인간은 모든 것을 버려야 자유를 만날 수 있구나! 깨달았지요. (그래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요. 흑흑)


<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에서는 한국 영화 <기생충>과 카프카의 작품 <변신>이 떠올랐습니다. 물난리가 난 지하방의 모습과 산도를 통해서 지구에 사는 생명체를 낳는 모리세의 모습이 두 작품을 떠올리게 했어요. 그리고 진심으로 궁금했습니다. 당신의 집에 물난리가 난 적이 었었는지... 수해 복구하는 장면이 너무 사실적이었거든요. 


<눈알 물고기>를 읽기 시작했을 땐 ‘울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게 됐다’는 이야긴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맘 놓고 울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역시 당신은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펼쳐냈지요.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저는 당신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까마귀가 된 남자 <쿠엘보>와 일본인으로 불리는 걸 싫어했지만 결국 일본인임을 인정해야 했던 <치노>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어요. 책 읽기를 마치면서 ‘나’로 시작해 ‘우리’를 거쳤던 이야기들이 다시 ‘나’로 끝나는구나... 하면서 책장을 덮었습니다.


『인간은행』을 통해서 ‘호시노 도모유키’라는 작가를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왜 당신을 소설적 후계자로 지목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끝을 모르는 당신의 상상력에 감탄했고, 그 안에 녹아있는 따뜻함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쯤에서 당신을 알게 해준 김석희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군요. (김석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자 그럼, 언젠가 김석희 선생님을 통역사로 모시고 당신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는 상상력이 성장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2020년 8월 27일 목요일 서울에서 독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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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편지 (어나더커버 특별판, 양장)
조현아 지음 / 손봄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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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편지'를 검색한다. 누군가의 편지가 세상에 나왔을까 싶어서. 편지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놓치는 편지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돈을 벌어 편지책들을 사 모은다. 그러나 구입한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읽지는 못한다. 편지책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삐집고 들어오는 것들이 삼백만 삼천개 정도는 되니까. 그래서 늘 책상 주변은 새로 들인 책들로 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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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부터인가, 편지책을 검색하면 <연의 편지>가 가장 먼저 보였다. 실존 인물의 편지가 아닌것 같아서,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패스하다, 어제 갑자기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책이이길래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야? 책을 클릭했더니... 만화책이었다. 그런데 그 밑에 달린 댓글이 칭찬일색. '학교폭력을 다루는 이야기인데, 너무 따뜻하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구입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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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책과 함께 <연의 편지>가 도착했다. 만화책이니까 후루룩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책을 펼쳤다. 하.. 그림 참 좋다. 일단 표지그림이 좋았다. 고장난 버스 안을 개조해서 만든 따뜻한 공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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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이소리. 반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공격당하는 친구를 돕기 위해 나섰다가 공격받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자신이 도왔던 친구가 전학을 가고, 소리 또한 학교를 옮기게 된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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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새로 학교를 다니게 된 곳은 '청량중학교'. 2학기가 시작되는 날 전학을 온 소리는 엄청 긴장한다. 예전 학교에서 당했던 일들을 똑같이 당하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면서. 그러다 책상 밑에 붙어 있는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새로 전학 온 소리를 위해서 누군가 쓴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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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소리가 편지를 찾으러 다니면서 펼쳐진다. 학교 폭력과 우정이 편지와 사연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하...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따뜻했다. 그리고 또 믿게됐다. 누군가를 향한 편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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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실존인물의 편지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편지관련 만화를 찾아내야겠다. 편지가 얼마나 아름다울수 있는지!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수 있는지 전해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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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편지>를 모두에게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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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 사랑, 삶 그리고 시 날마다 인문학 2
김경민 지음 / 포르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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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콘서트에서 <서른 즈음에>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20대 초반이었다. 그가 아주 덤덤한 목소리로 “또 하루 멀어져간다”하다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스물의 청춘이 서른의 삶에 대해 뭘 안다고... 머리는 그 삶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슴이 그걸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매일 이별하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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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펼쳐들고 울컥 한건, ‘이별’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몇 개의 이별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문 앞에 세워두고 있는가. 만남과 함께 나란히 찾아와 기다리고 있지만, 언제나 그의 존재가 ‘느닷없다’고 느껴지는, 그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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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를 쓴 김경민 작가는 이별에 관한 시를 <이별과 상실 그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된다>로 나누었다. 그가 나눠놓은 작은 소제목들을 보면서 내게 이별은 이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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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 ‘도착’해 그 ‘능력’을 보여주면, 우리는 ‘애도’하며 ‘이별의 태도’를 관찰한다고. 그렇게 한 발짝 떨어져 이별을 관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어김없이 이별은 ‘완성’되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삶을 시작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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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다 내 마음을 붙잡은 건 ‘이별의 태도’에 실린 <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는 시였다. 양애경 시인, 그가 쓴 시를 읽으며 무너진 마음을 추슬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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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에서 잠깐 멈추다> - 양애경 -

우리가 사랑하면
같은 길을 가는 거라고 믿었지
한 차에 타고 나란히
같은 전경을 바라보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너는 네 길을 따라 흐르고
나는 내 길을 따라 흐르다
우연히 한 교차로에 멈춰 서면
서로 차장을 내리고
- 안녕,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어
라고 말하는 것도 사랑인가 봐
사랑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계속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끈도 아니고
이걸 알게 되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
오래 고통스러웠지
아, 신호가 바뀌었군
다음 만날 지점까지 이 생이 아닐지라도
잘 가, 내 사랑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
*
이 시만으로도 눈물이 차고 넘쳤는데, 이 시를 읽고 작가 쓴 에세이를 읽으며 엉엉 울었다. ‘행위 예술계의 대모’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가 나눈 ‘1분의 눈빛’ 때문에. 어느 가슴 속에나 그런 사랑과 이별이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가슴이 눈물을 밀어내 어쩔 도리가 없었다.
*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 본 적이 있던가? ‘이별의 완성’에 실린 성미정 시인의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도, ‘관계는 공감으로부터’에 있는 정현종의 <방문객>도, ‘사랑은 수용으로부터’에 있는 정윤천의 <천천히 와>도, 황동규의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도… 나를 울게 했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는 책 제목처럼, 내가 사랑했던 모든 기억들이 나를 울게 했다.
*
그러나 내가 책을 읽으며 울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 된다>고 했던 것처럼, 나 또한 계속 될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윤동주의 <눈 오는 지도>를 소개하면서 쓴 에세이를 읽으면서.
*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고유의 영토가 생’기고, ‘고유의 지도를 갖게 된다’고 썼다. 그 지도는 ‘둘 말고는 아무도 가질 수 없으며 제삼자는 해독할 수 없는 지도’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이별이란, 이 영토의 소멸, 지도의 분실에 다름 아니’라고.
*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영토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으며, 얼마나 많은 지도를 분실했는가? 그러나 우리는 또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또 다른 영토를 또 다른 지도를 잃어갈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잃어가는 것의 연속’이라는 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작가가 마지막 에세이에 인용한 것처럼 “삶이 행복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
나는 책장을 덮으며 다짐했다. 문 앞에 어떤 이별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도, 어느 날 ‘느닷없이’ 문을 밀고 들어오는 이별을 만나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행복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삶이니,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수많은 이별을 건너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듯, 앞으로 만날 수많은 이별을 건너 나의 삶을 만들겠다고. 매일 이별하는 삶도 위대할 수 있다고 말이다.
*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하지만,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살게도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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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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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셉이었던 당신에게

 

가끔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깹니다. 그럼 나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토닥거려요. 그렇게 밤사이 당신이 두고 간 흔적을 잠재웁니다. 이상하게 당신이 꿈에 나오면 가슴이 아픕니다.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통증을 느낍니다. 호흡이 곤란하거나 부정맥처럼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게 아니라, 뭐랄까. ‘가슴이 시리다고 할까요? 심장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시린 가슴을 데우려고 커피도 마셔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책도 읽어보지만 통증은 멍처럼 오래 남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라져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혈관에서 빠져나온 적혈구가 사라지듯 추억 속에서 빠져나온 당신도 사라지고, 나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한 동안 괜찮았던 가슴에 다시 통증이 일어난 건 먼 바다때문입니다. 공지영 작가가 쓴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 말이에요. 책이 출판되기 전에 출판사 블로그에 올라오는 연재 글을 보면서 예감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내가 좀 아프겠구나, 하고. 이 책이 추억 속에 있는 당신을 소환해 내리란 걸 알았으니까요.

 

먼 바다는 성당 주일학교에 다니던 미호가 신학생이었던 요셉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서울의 어떤 성당에 다니며 서로를 마음에 품었던 두 사람이 40년 의 시간을 건너 뉴욕에서 만나는 이야기로.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떠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얻은 습관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헤맸던 시간이었죠. 성경을 읽으며 그 시간은 참 긴 시간이구나 했는데, 미호와 요셉이 만나기로 한 장소에 있던 공룡을 보니, 40년이 무척 가벼워 보였습니다. 15천 년 전에 이 지상에 살았던 공룡 앞에서 40년은 지나간 어제같았으니까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을 건너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추억을 나누고 기억의 퍼즐을 맞춰갑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퍼즐 조각을 맞추듯 맞춰 가지요.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르게 갖고 있는 조각들을 기억의 퍼즐판 위에 놓으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갑니다. 뒤늦게, 같은 그림으로 완성된 그들의 퍼즐판을 보면서 궁금했습니다. 내 기억 속의 그 날들과 당신 기억 속의 그날들이 같은 모습일까.

 

언젠가 우리도 오랜 시간을 건너 마주 앉아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날이 올까요? 한 때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길이 있고, 나에게는 내 길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땅을 향해 걸으며 삶을 깨달았던 것처럼, 나도 내 인생의 새로운 땅에 안착하기 위해 걷고 또 걸으면서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빛나야 한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통증으로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네요. 하지만 걱정말아요. 추억으로 밀려온 당신은 내 일상에 부딪혀 사라지니까요. 내가 그 시간의 기억 속에서 당신을 지우지 않는다고 해도, 삶은 당신의 기억을 조금씩 가지고 가니까요.

 

……

 

이제 먼 바다가 데려다준 당신을 보내야겠습니다. 파도처럼 밀려왔던 당신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부디 잘 가시기를. 추억의 먼 바다가 다시 당신을 보내면, 나는 추억 속으로 다시 당신을 보내며 손을 흔들게요. 당신은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반짝일 수 있도록.

 

잘 가요, 나의 요셉.

안녕, 나의 첫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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