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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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이 기록된 글을 읽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었지요.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인간실격』을 읽었을 뿐입니다만, 당신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이건 역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군!’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론가들은 당신의 이야기가 다자이 오사무의 여느 작품과 확연히 다르다고들 하지만 글쎄요, 저는 ‘또 다른 요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그만큼 결이 많이 닮아 있었지요.

당신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장녀였습니다. 이혼을 한 후 친정으로 돌아와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요. 도쿄가 아닌 이즈의 산장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사는 삶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으나, 속으로는 어떤 열망을 죽이고 또 죽여야하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 때문에 살고 있다고 할 만큼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귀족의 품격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게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식사예절을 지키지 않아도 천박해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만들어진 우아함이 아니라 DNA에 새겨진 우아함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혹자들은 어머니를 향해 우아할 뿐, 경제적인 능력도 생활력도 없다고 비난하더군요. 그래서 당신의 삼촌이 집을 팔고 이즈로 내려가라고 했을 때도 그의 뜻에 따랐다고요. 그러나 나는 당신 어머니가 무능했다고 단언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오지의 삶을 연장시킨 사람이 바로 어머니였으니까요. (어떤 사람이든 한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람은 '무능'할 수 없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다른 요조의 이야기’라고 느낀 건, 당신 동생 나오지 때문이었습니다. 요조와 나오지가 동일 인물이라고 해도 무색할 만큼 그 둘은 닮아 있었지요. 두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내지 못해 끝내 자신의 삶을 몰락시켰지만,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노력은 했으나 그 노력이 제대로 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아, 날마다 저물다 결국 영원히 저물고 말았지만요.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가즈코 당신이 주인공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사양’이라는 걸 깨닫고, ‘아, 다자이 오사무는 나오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물론 당신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선택한 ‘한 사람’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는 아침에 찬란하게 뜨는 해도 결국은 지고 만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녁 때 지는 해’를 뜻하는 ‘사양’을 제목으로 걸었겠지요.

그런데 가즈코... 나는 이 책의 주인공으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당신만큼은 ‘오늘의 해가 져도 내일의 해가 뜬다’는 것을 믿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긴 밤이 와도 결국 아침이 온다는 것을, 어머니가 저물고, 나오지가 저물고, 우헤하라 마저 저문다고 해도 당신이 원하면 당신의 날들은 날마다 떠오른다는 것을 당신이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생명을 품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당신은 그 믿음을 가졌을 테지만요.

당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온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당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저 또한 당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덮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군요. ‘사양’입니다. 그러나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온다해도 해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겠지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걸 믿는 사람에게는 찬란한 아침이 찾아올 것입니다. 저 또한 그걸 믿으며 지는 해를 바라봅니다.
내일 다시 떠오를 가즈코, 그럼 안녕.
2021년 5월 18일,
74년을 건너와 만난 당신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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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머리는 문해력이다 - 당신의 아이를 바꾸는 문해력
진동섭 지음 / 포르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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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머리는 문해력이다를 읽은 건, 문해력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문해력에 대해 제대로 알면 아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이 책은 <공부가 뭐니?>의 전문가 패널이자 전 서울대학교 입학사정관이었던 진동섭 선생이 집필했다. 나는 그의 전작인 입시설계, 초등부터 시작하라를 읽은 적이 있는데, 사실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입시설계를 초등 때부터 하라고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은 한결같이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입시설계의 기초가 독서에 있다는 뜻이었다.

 

공부머리는 문해력이다는 전작보다 더 체계적으로 독서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교육과정의 흐름을 짚어주고, 어떻게 독서하며 문해력을 키워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저자는 그 중 하나의 방법으로 한 권의 책을 깊게 읽기를 제안한다. 한 권의 책을 깊게 읽으면 내면화가 이루어지고, 책 내용을 수용하고 비판하면서 넓은 세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고 다른 이들과 토론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내 생각을 적용하고, 확장할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이들의 주장을 들으며 수긍할 점과 비판할 점을 정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가능해지지려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확보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과정에는 이런 시간이 거의 없다. 저자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고, 깊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수업으로 정해진 독서시간에 독서하는 방법만알려주고, ‘글쓰기시간에 글 쓰는 방법만알려주고 있다며 안타까워 한 것이다. 나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아이들에게 독서하는 방법뿐 아니라 책을 읽을 시간을 마련해주고, 글 쓰는 방법뿐 아니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시간이 확보된다면 문해력이 낮다고 모두들 걱정만!하는 일은 없을텐데 말이다.

 

이 책을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떤 교육과정으로 배우는지 알고 싶고,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읽고 제대로 의사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싶다면 말이다. ‘문해력을 키워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다면 그런 이유도 좋다. 단어를,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면 공부머리도 좋아진다니까.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펼치는 부모님들이 문해력을 글을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해력은 글은 물론 다른 사람의 생각도 제대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해력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데 꼭 챙겨야할 필수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른들이여! 우리 아이들이 필수템을 잘 챙길 수 있도록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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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 - 통영의 부둣가에 도착하는 나를 기다려 주세요 지역문학총서 28
테라오 요시코 지음, 김봉희 옮김 / 경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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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알고 있다. 일본으로 유학 온 조선인 남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국 조선으로 오는 마지막 배에 몸을 실었던 여자. 그는 화가인 남자와 결혼해 원산에서 생활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과 함께 부산을 거쳐 제주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제주는 그들이 안착할 곳이 아니었다. 여자는 가족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결국 자신의 부모가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두 아들을 데리고 홀로 일본으로 돌아간 여자, 그녀는 얼마 후 신분을 속여 배를 타고 온 남편과 해후한다. 일주일의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은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여자는 살아있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1956, 남편의 친구가 들고 온 남편의 뼈 일부를 집 마당에 묻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을 뿐이다. 그 여자는 야마모토 마사코’. 혹은 이중섭의 아내라 불린다.

 

또 한 여자를 알게 됐다. 일본으로 유학 온 조선인 남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통영으로 왔다가 홀로 일본으로 돌아갔던 여자.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자신을 데리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편지를 쓰고 또 썼던 여자. 외로움으로 죽어갔으나 그리움으로 하루를 살았던 여자는 한참 후 밀항선을 타고 온 남편을 만났다. 둘은 함께 다시 밀항선에 올랐고 조선으로 향했으나, 조선과 일본 그 사이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여자는 테라오 요시코’. 혹은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라 불린다.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는 홀로 일본으로 돌아간 요시코가 통영에 있는 남편 박재성에게 쓴 편지 127통을 소개한 책이다. 1936년 동경의 길상사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키우고, 조선에서 짧은 신혼생활을 하다 헤어진 두 사람은 편지로 소통했다. 요시코는 많은 날동안 편지를 썼고, 박재성은 뜸하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코의 마음속에는 박재성 뿐이었다. 요시코에게 박재성은 남편이자, 예술가였다. 그녀는 박재성이 하루 빨리 자신을 데리러 와 둘이 함께 통영으로 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박재성이 작가로서의 삶을 포기 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박재성이 좋은 작가가 되기를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1946101일에 시작돼 두 사람이 만나기 직전으로 추정되는 1947825일에 끝이 난다. 편지에는 헤어져 있는 연인의 애절한 그리움이, 여전히 식지 않은 뜨거운 사랑이 절절히 넘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소식이 더딘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기도 힘든 요시코의 마음이 감정의 과잉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원래 감정의 과잉이 만들어내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사랑에 아파해본 사람이라면, 기다림에 고통스러워 해본 사람이라면 눈물로 쓴 그녀의 편지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밀항선을 타고 건너 간 박재성이 요시코와 함께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왔다면, 이 편지들은 긴 그리움을 건너 완성된 사랑의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테라오 요시코의 편지는 요절한 천재 극작가의 일본인 아내가 남긴 편지가 되었다...

 

테라오 요시코’. 그녀가 쓴 편지를 읽으며, 80년 전, 이 땅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살아갔던 한 사람이 있었음을, 그녀의 이름이 테라오 요시코였음을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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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이 보여준 세상
샘 귈름 지음, 율리아 귈름 그림, 조이스 박 옮김 / 후즈갓마이테일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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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다른 나라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빠가 사우디라는 나라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곳이 어디 있는지,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빨강 파랑 마름모가 찍힌 편지 봉투에 편지를 넣어야 아빠에게 간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중학생 때 처음 세계사를 배웠다. 선생님이 칠판에 그린 세계지도가 내가 만난 첫 세계지도였다. 우리나라 지도를 외워서 그리는 것도 어려운데, 선생님은 전 세계를 머리에 넣고 다니는구나... 싶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세계라는 단어가, 지구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게 들어온 건, 내가 라면을 먹을 때(하세가와 요시후미 / 장지연 옮김, 고래이야기) 라는 그림책 덕분이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세상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려주는데, 너무 충격이었다.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순간들이 거기에 있었다.

 

달님이 보여준 세상(글 샘 귈름, 그림 율리아 귈름 / 조이스박 옮김, 후즈갓마이테일)이 건넨 충격도 비슷했다. 한 아이가 안 자겠다고 버틸 때, 다른 곳의 아이들은 어떻게 자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인데,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이 있다니!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만약에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책을 읽었다면 나는 더 넓은 세상을 지닌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단 칸 방에서 다섯 식구와 옹기종기 모여 자고 있을 때, 누군가는 언제 난파될지 모르는 배 위에서 자고 있고, 누군가는 일을 하다 쓰러져 잠들고, 누군가는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잠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말이다. 나는 그 누군가를 궁금해 했을 것이고, 그들의 삶을 추적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가슴 깊이깊이 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계사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잠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심각하거나 슬프지 않다. (그냥 읽는 내가 울컥할 뿐 -_-) 작가는 한 결 같이 따뜻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한다. 여기에는 이렇게 잠든 아이가 있고, 저기에는 이렇게 잠든 아이가 있다고. 세상에는 다양한 이 있다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같이 잠든 사이니까 너희는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니 여기’, ‘지금’, ‘만을 생각하지 말고, ‘저기’, ‘그때’, ‘를 생각하는 마음을 품자고. 그것이 달님이 세상을 보여준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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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의 인문학 - 하루 10분 당신의 고요를 위한 시간 날마다 인문학 3
임자헌 지음 / 포르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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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만나다>

 

나는 선비를 좋아한다. ‘선비라는 단어에 담긴 고고함과 유유자적함과 사람을 향한 연민정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마음에 품고 행동하는 진짜 선비를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첫 선비는 정약용이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 할 줄 알고, 놀고 싶을 때는 무단조퇴를 감행하며 노닐고, 사람을 향해 연민을 품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사람. 그러나 처음부터 정약용이 내게 선비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내게 거대한 산이었다. 그의 어마어마한 업적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은 내가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가 죽은 막내아들의 무덤에 바친 편지 한 통을 읽고 그를 사람으로 다시 만났다. 그 속에는 거대한 업적을 남긴 실학자 정약용이 아니라 아들을 잃고 오열하는 아버지 정약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정약용이라는 사람과 우정을 맺기 위해 노력했다.

 

이라는 것이 그렇다. ‘거대한 산사람으로 만들고, 역사 속에 박제된 사람도 되살려 내 진실한 우정을 맺게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내가 먼저 그들의 글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온 그들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 챙김의 인문학(임자헌, 포르체)우정의 길을 내주는 책이다. 옛 선비들의 글에서 40편을 가려 뽑아 말끔한 현대어로 번역하고, 저자의 사유가 담긴 글을 덧붙인 선비와 거닐기 좋은 길이다. 이 책을 쓴 임자헌은 한국고전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옛 문헌의 글들을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맞춤형으로 번역하는 인물로 꼽힌다. 한시 번역에 정우성을 등장시키는 일을 저자 말고 누가 또 할 수 있겠는가! (p59를 참고하라!)

 

이 책에서 내게 말을 걸어온 선비는 기대승, 박지원, 허균, 황현, 이가환이다. 물론 그밖에도 많은 선비들이 말을 걸어왔으나, 나는 이 다섯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내게 했는지 잠깐 소개해 보자면 -

 

기대승. 이 선비는 퇴계 이황과 주고받은 편지 때문에 알게 된 선비였다. 26살이나 차이나는 어르신이황에게 나는 당신의 생각과 다르거든요!’라며 8년이나 끈질기게 편지를 보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대승이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하는 건방진선비는 아니었다. 이황에게 예를 갖추었고, 이황 또한 아들 같은 기대승에게 열린 마음으로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마음 챙김의 인문학5대화를 나누는 관계의 아름다움에 이들에 관한 내용이 소개돼 있다.) 편지가 아닌 그의 글을 본 것은 이 책의 편에 실린 봄을 봄답게 간직하는 방법에서였다.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1년 내내 간직할 수 있는 법을 알려주는 기선비의 멋짐에 무릎을 탁!쳤다.

 

박지원. 그렇다. 그 유명한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이다. (하지만 나는 <열하일기> 읽기에 실패했다 -_-) 내가 박지원을 처음 만난 것은 죽은 누나를 생각하며 쓴 묘지명을 통해서였다. 시집가 어렵게 살던 누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무덤에 바치는 글을 썼는데 그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쾌함의 정석이 쓴 아린 글은 새롭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책에도 그는 눈물을 말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넓은 땅을 보고 한바탕 울기 좋은 땅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면 책을 펼쳐 보는 걸로! (p168을 펼치면 된다.)

 

허균. <홍길동>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도 눈물에 관해 이야기 한다. 자신의 조카가 집의 이름을 통곡헌으로 짓자 주변에서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허균은 그만의 깨인 생각으로 조카가 지은 이름을 옹호한다. 나는 허균의 글을 읽으며 오래 전 생각했던 울 수 있는 집을 떠올렸다. 맘 놓고 울고 싶을 때 찾아 갈 수 있는 집을 상상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몇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소름끼치게 반가웠다. 그리고 그가 통곡할 겨를도 없는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쓴 대목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현. 황현이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에게도 매천 황현혹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라는 말은 익숙할 것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가 바로 황현이다. 책에는 그가 남긴 유서와 평소에 그와 매우 가깝게 지냈던 구한말 문장가 김택영이 황현의 초상화를 보고 쓴 추모의 글이 실려 있다.

 

이가환. 정조시대의 천재라 불리던 사람, 정조가 승하하자 서학의 삼흉으로 지목돼 목숨을 잃은 이가환은 정약용 덕분에 알게 된 선비였다. 이가환은 자타가 공인하는 지식인 정약용이 인정한 유일한 천재였기 때문이다. (천재에 관한 그의 일화까지 쓰면 가뜩이나 긴 글이 더 길어지니 마음챙김의 인문학p378을 읽도록 하자!) 그는 조카가 처소의 이름을 가이소라고 지었다고 하자, 밥을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한숨을 쉰다. 혹자들은 무엇이든 다 있다는 그 상점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가이소‘~할 수 있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었다. ‘할 수 있다! 아자아자정신이 깃든 이름인 것이다.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이름에 이가환은 왜 한숨을 지었을까? 그것은 바로!! 책의 제5, ‘진지하게, 머뭇거리지 말고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한글로 번역된 정약용의 편지들을 읽다가 한 밤중에 울컥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편지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수백년 전 그가 한문으로 남긴 편지를 오랜 시간을 건너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죽은 학문이라고 불리는 오래된 글들을 읽고 현대어로 번역해 주는 분들이 너무 고마웠다. 죽은 정약용을 살려내 내 곁으로 보내준 그들이. 마음챙김의 인문학을 읽으면서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의 수고가 없었다면 내게 올 리 없었던 선비들을 만나며 참 고마웠다. (이 글을 통해 선비들의 글을 번역하고, 책으로 엮어준 저자와 출판사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책은 한꺼번에 후루룩 읽어도 좋지만, 가까운 곳에 꽂아두고 계절에 따라 한 편 한 편 읽으며 음미하면 더 좋을 책이다. 나는 어떤 선비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촤르르 책장을 넘겼지만, 선비와의 첫 만남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에 한 편 씩 읽어도 좋겠다. 하루에 한 사람과 마주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마음이 동하면 함께 거닐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아보면 어떨까. 나의 친구들이 이 책을 읽으며 선비들과 친구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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