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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평점 :
나의 ‘요셉’이었던 당신에게
가끔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깹니다. 그럼 나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토닥거려요. 그렇게 밤사이 당신이 두고 간 흔적을 잠재웁니다. 이상하게 당신이 꿈에 나오면 가슴이 아픕니다.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통증을 느낍니다. 호흡이 곤란하거나 부정맥처럼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게 아니라, 뭐랄까. ‘가슴이 시리다’고 할까요? 심장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시린 가슴을 데우려고 커피도 마셔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책도 읽어보지만 통증은 멍처럼 오래 남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라져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혈관에서 빠져나온 적혈구가 사라지듯 추억 속에서 빠져나온 당신도 사라지고, 나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한 동안 괜찮았던 가슴에 다시 통증이 일어난 건 『먼 바다』 때문입니다. 공지영 작가가 쓴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 말이에요. 책이 출판되기 전에 출판사 블로그에 올라오는 연재 글을 보면서 예감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내가 좀 아프겠구나, 하고. 이 책이 추억 속에 있는 당신을 소환해 내리란 걸 알았으니까요.
『먼 바다』는 성당 주일학교에 다니던 미호가 신학생이었던 요셉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서울의 어떤 성당에 다니며 서로를 마음에 품었던 두 사람이 40년 의 시간을 건너 뉴욕에서 만나는 이야기로.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떠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얻은 습관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헤맸던 시간이었죠. 성경을 읽으며 그 시간은 참 긴 시간이구나 했는데, 미호와 요셉이 만나기로 한 장소에 있던 공룡을 보니, 40년이 무척 가벼워 보였습니다. 1억 5천 년 전에 이 지상에 살았던 공룡 앞에서 40년은 ‘지나간 어제’ 같았으니까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을 건너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의 추억을 나누고 기억의 퍼즐을 맞춰갑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퍼즐 조각을 맞추듯 맞춰 가지요. 두 사람은 서로가 다르게 갖고 있는 조각들을 기억의 퍼즐판 위에 놓으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갑니다. 뒤늦게, 같은 그림으로 완성된 그들의 퍼즐판을 보면서 궁금했습니다. 내 기억 속의 그 날들과 당신 기억 속의 그날들이 같은 모습일까.
언젠가 우리도 오랜 시간을 건너 마주 앉아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날이 올까요? 한 때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길이 있고, 나에게는 내 길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땅을 향해 걸으며 삶을 깨달았던 것처럼, 나도 내 인생의 새로운 땅에 안착하기 위해 걷고 또 걸으면서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빛나야 한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통증으로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네요. 하지만 걱정말아요. 추억으로 밀려온 당신은 내 일상에 부딪혀 사라지니까요. 내가 ‘그 시간의 기억 속에서 당신을 지우지 않는다’고 해도, 삶은 당신의 기억을 조금씩 가지고 가니까요.
……
이제 『먼 바다』가 데려다준 당신을 보내야겠습니다. 파도처럼 밀려왔던 당신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부디 잘 가시기를. 추억의 먼 바다가 다시 당신을 보내면, 나는 추억 속으로 다시 당신을 보내며 손을 흔들게요. 당신은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반짝일 수 있도록.
잘 가요, 나의 요셉.
안녕, 나의 첫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