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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 - 통영의 부둣가에 도착하는 나를 기다려 주세요 ㅣ 지역문학총서 28
테라오 요시코 지음, 김봉희 옮김 / 경진 / 2021년 4월
평점 :

한 여자를 알고 있다. 일본으로 유학 온 조선인 남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국 조선으로 오는 마지막 배에 몸을 실었던 여자. 그는 화가인 남자와 결혼해 원산에서 생활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과 함께 부산을 거쳐 제주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제주는 그들이 안착할 곳이 아니었다. 여자는 가족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결국 자신의 부모가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두 아들을 데리고 홀로 일본으로 돌아간 여자, 그녀는 얼마 후 신분을 속여 배를 타고 온 남편과 해후한다. 일주일의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은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여자는 살아있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1956년, 남편의 친구가 들고 온 남편의 뼈 일부를 집 마당에 묻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을 뿐이다. 그 여자는 ‘야마모토 마사코’. 혹은 이중섭의 아내라 불린다.
또 한 여자를 알게 됐다. 일본으로 유학 온 조선인 남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통영으로 왔다가 홀로 일본으로 돌아갔던 여자.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자신을 데리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편지를 쓰고 또 썼던 여자. 외로움으로 죽어갔으나 그리움으로 하루를 살았던 여자는 한참 후 밀항선을 타고 온 남편을 만났다. 둘은 함께 다시 밀항선에 올랐고 조선으로 향했으나, 조선과 일본 그 사이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여자는 ‘테라오 요시코’. 혹은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라 불린다.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는 홀로 일본으로 돌아간 요시코가 통영에 있는 남편 박재성에게 쓴 편지 127통을 소개한 책이다. 1936년 동경의 길상사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키우고, 조선에서 짧은 신혼생활을 하다 헤어진 두 사람은 편지로 소통했다. 요시코는 많은 날동안 편지를 썼고, 박재성은 뜸하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코의 마음속에는 박재성 뿐이었다. 요시코에게 박재성은 남편이자, 예술가였다. 그녀는 박재성이 하루 빨리 자신을 데리러 와 둘이 함께 통영으로 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박재성이 작가로서의 삶을 포기 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박재성이 좋은 작가가 되기를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극작가 박재성의 아내, 요시코의 편지』는 1946년 10월1일에 시작돼 두 사람이 만나기 직전으로 추정되는 1947년 8월 25일에 끝이 난다. 편지에는 헤어져 있는 연인의 애절한 그리움이, 여전히 식지 않은 뜨거운 사랑이 절절히 넘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소식이 더딘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기도 힘든 요시코의 마음이 ‘감정의 과잉’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원래 ‘감정의 과잉’이 만들어내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사랑에 아파해본 사람이라면, 기다림에 고통스러워 해본 사람이라면 눈물로 쓴 그녀의 편지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밀항선을 타고 건너 간 박재성이 요시코와 함께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왔다면, 이 편지들은 긴 그리움을 건너 완성된 사랑의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테라오 요시코’의 편지는 요절한 천재 극작가의 일본인 아내가 남긴 편지가 되었다...
‘테라오 요시코’. 그녀가 쓴 편지를 읽으며, 80년 전, 이 땅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살아갔던 ‘한 사람’이 있었음을, 그녀의 이름이 ‘테라오 요시코’였음을 기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