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자유가 없다면 인문정신은 숨을 쉴 수도 없고, 창조적인 수많은 작품도
존재할 수 없다. 내게 가끔 생기는 장난기가 강연장에서 또다시 도졌다.
아니, 지금 자유로워 보이는 젊은 대학생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운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강연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한 편의 시를 읽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21)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자연공원에 방목된 동물이 더 자유로운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허용된 자유는 언제든 허락한 측에서 철회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자유, 아니
정확히 말해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연공원의 동물들은 자신을 가두는
사방의 벽 쪽으로 가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가운데로 모인다. 하긴 벽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 얼마나 불쾌한 일이겠는가.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체제가 우리를 핍박하려고 할 때, 우리는
나약하게 외칠 것이다. “저는 한계를 지켰는데, 왜 그러세요?” 너무나 어리석고 나약한 한탄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허용된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
(23)
시는 소설이나 희곡처럼 단순히 문학 일반에 속하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 시는
문학의 가능성이다. 형식도 모방하지 않고 내용도 모방하지 않아야 시가 된다. 혹은 형식도 강요되지 않고 내용도 강요되지 않아야 시가 된다. 그렇다. 시는 글로 표현된 자유정신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시는
난해하다는 인상이 든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일체 외적인 것으로부터 단절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니까 느끼고 욕망하고 생각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시라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자유를 행사하는 진정한 시인
경우에는 어디엔가 힘이 맺혀” 있어야만 한다는 역설한다. 그의
말대로 진정한 시에는 반드시 시인의 자유정신이라는 보석이 박혀 있기 마련이다. 시인 자신이니까 살아
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자유’가 없다면 시를 썼다고 해도 쓰지 않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45)
그가 쓰고 싶었던 자신에게 철저한 글, 즉 시가 어떻게 친절할 수
있겠는가. 다른 장르의 글과 달리 시는 자신이니까 쓸 수 있는 글,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글이다. 시를 읽는 것은 당연히 나와는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타인의 속내와
그 삶을 읽는 것이다. 어떻게 타인의 속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시 읽기의 어려움은 수학이나 철학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46)
이제 더욱더 궁금해진다. 김수영은 가슴에 어떤 이상을 품고 살았던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김수영은 시인이 되려고
했고, 시인으로 살고자 했다. 다시 말해 김수영의 이상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시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지금부터
차근차근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숙고해 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시인은 평범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일반 사람은 관습이나 교육에 따라 사물이나 자신을 이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세계와 불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세계가 조율한
대로 소리를 내니, 타인이나 사회와 불화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시인은 투철한 자기 이해에 이르러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관습의
목소리나 타인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에서 추방할 수 있고, 나아가 잃어버린 자신만의 목소리를 되찾아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55)
그래서 그는 사태와 자기가 하나로 붙어서 생긴 타성을 ‘벽’이라고 부르며 경계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벽(壁)’을 보면 된다. ‘벽’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숙명이다. 이 ‘벽’에 한두 번이나 열 번 스무 번이 아니라 수없이 부닥치는 동안에 내 딴에는 인간 전체에 대한 체념이랄까-그런 것이 생긴다. 그래서 나도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본의 아닌 철학자가
된 셈이다.”
(123)
바로 이것이다. 김수영이 추구했던 새로움은 단독성의 발견에서 오는
새로움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지금 독자들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단독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새로울 수 있었고, 단독성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행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얻었다. 반면 김춘수와 같은 모더니스트들은 새로운 시적
테크닉은 시도했지만 단독성을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당연히 그들의 시는 그만큼 시적 보편성도 상실했다. 김수영이 동시대 모더니스트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확신하도록 한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흥미롭지 않은가. 머리로만 쓰는 시와 온몸으로 쓰는 시가 이토록
확연히 다른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144)
그가 “시인은 영원 배반자”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 (…)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밖의 모든 책임을 시인으로부터 경감하라!” - <시인의
정신은 미지>(1964.9)
(153)
불행히도 모든 교육은 단독성을 개화시키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신봉하는 가치를 주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순간, 당연히 가정이든 학교든 군대든
회사든 권력을 쥔 자들로부터 탄압받기 마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생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로부터 스스로 단독성을
부정하는 개인들이 탄생한다. 외적인 탄압과 억압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과 달리, 이런
불행한 개인들은 오히려 타인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쉽다. 그들이 유니폼, 즉 동일한 형식을 즐기는 것은 이런 이유인지 모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제스처를 버리고 권력이 허용하는 제스처를 취해서 자신의 단독성을 은폐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는 자신들이 애써 은폐하려던 단독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조금씩 자신이니까 살 수 있는
삶, 자신이니까 느낄 수 있는 감성, 자신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를 영위할 것이다.
(159-160)
시는 나니까 쓸 수 있는 글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경우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의 구분도
사라질 것이며, 서로가 자기 삶의 형식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즉 김수영이 말한 “모든 사람들이 착한 시인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원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현재의 시는
무효가 될 것이다. 현재의 시에는 단독적인 삶을 영위하는 모습보다는 그것을 꿈꾸는 이의 설움이 묻어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순간, 그들의
말과 행동은 서러운 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히 긍정적인 시가 될 것이다. 이런 낙원을 꿈꾸면서 당분간
시인은 타인의 제스처가 아니라 자신의 제스처를 만들어 삶을 살아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단독성을 회복할 때까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173)
눈이 시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눈은 하늘이란 지고한
권좌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여 구체적인 곳으로 내려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은 순수하고 고결하다. 신처럼 모든 것을 관조하지 않고, 스스로 더러워질 것을 감내하면서도
기꺼이 모든 것과 함께 하려고 한ㄷ. 눈은 더러운 진창도, 썩어
가는 시체도, 악취를 풍기를 오물도 가리지 않고 그들을 덮어 고결하게 승화시킨다. 눈 내리는 날 세상의 모든 존재는 빈부, 미추, 선악, 강약을 넘어서 동등하게 변한다. 부자의 집도 빈자의 집도 똑같이 흰 지붕이 되고, 대학 교수의 머리에도
구걸하는 아이의 머리에도 똑같이 흰 눈이 쌓이니까 말이다. 하늘과 땅이 지배와 피지배를 상징한다면, 눈은 지배 의지를 극복하고 구체로의 비약을 도모하는 시인 정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185-186)
모든 돌고 있는 팽이는 자시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그런데 두 팽이가
마주친다는 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팽이의 회전 스타일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허망하게도 팽이는 쓰러지고 만다. 팽이만 그런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한다. 김수영의
말대로 “생각하면 서러운” 일이다. 보통은 인간이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거나 완성되기 위해 지혜로운 사람이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통찰이 옳ㄴ다면, 이게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서도 안 되고, 누가 기대는 것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오직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197)
김수영은 시의 다양성과 문화적 실험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시의 다양성은
시인들의 삶이 각기 다른 만큼 불가피한 것이고, 시의 실험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만들려는 시인들의
투철한 의지가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의 제스처도 흉내 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자신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사상은 진정한 시인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사활을 건 문제다. 이런 사상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시적 형식과 테크닉의 모색은 단지 원숭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에서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남의 말을 자기 말인 것처럼 지껄이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화려하고 현란한 말로 남을 속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거짓말쟁이는 결국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를 완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238)
어느 개인이 공동체가 각인시킨 시선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공동체의 노예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불온한 주체가 된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온한 주체에 직면했을 때 공동체가 어떻게 몸을 도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적 인식에
이른 주체의 행동과 말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릴 것이고, 그것은 마침내 무서운 전염병처럼 공동체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킬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이 있다면 어떤 모양의 새로운 것이냐”는 김수영의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된다. 그는 어떤 새로움도 좋다는 식의 ‘새로움 강박증자’는 아니었다. 물론 그가 기존의 낡은 시적 표현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진정으로 거부한 것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고 자신만의 삶과 표현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김수영에 따르면 이런 억압을 뚫고 새로운 것을 모색할 때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것, 혹은 시적 인식이 가능한 법이다.
(267)
“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가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호흡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환경에서는 여간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분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도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요즈음 느끼는 일>(1963.2)
(330)
어쨌든 시인은 자유를 노래하는 자유로운 존재여야만 한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과 시인들이 현실적 자유를 회피하고 관념적인 자유로 후퇴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들은 시를 “적당한 감각적인 현대어를 삽입한 언어의 조탁이나 세련되어 보이는 이미지의 나열과 구성”으로 썼다. 몽상과 상상의 자유라고나 할까? 그들은 시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을 현란하고 낯선 이미지의 시나 아름답고 예쁜 시를 만들어서 증명하려고 했다. 김수영에게는 “7할의 고민과 3할의
시의 총화가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예술파 시인들에게는 현실과
자신에 대한 “7할의 고민”, 즉 사상이 부재했다. 그러니 그들은 현실에 무기력하기만 한 시만을 쓸 수밖에 없었다.
(334)
시인이 가야 할 길은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도자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문주의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표자와 피대표자라는 이분법 때문에, “작가는
달리지 않고 군중만 달리게 하는” 아이러니한 권력 현상이 발생한다. 어쩌면
참여파 시인은 자신이 왜 현실을 극복하려고 했는지 망각한 불행한 사람이다. 그들은 자유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339)
“오늘날의 시가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의 상실이라는 가장 큰 비극으로 통일되어 있고, 이
비참의 통일을 영광의 통일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 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도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 <생활현실과 시>(1964,10)
(344)
“시는 온몬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1968.4)
(370)
“무서운 것은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의 문화의 위험의 소재(所在)도 다름 아닌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치스가 뭉크의 회화까지도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그 전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하나의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문예시평’자가 역설하는 응전력과 창조력-나는 이것을 문학과 예술의 전위성 내지
실험성이라는 부르고 싶다-은 제대로 정당한 순환작용을 갖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1968.2)
(377)
인간은 정당한 목적, 바로 자유다.
그리고 새로움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는
과거에 살던 누구와도 닮지 않고 앞으로 태어날 누구와도 닮지 않을 바로 그 자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움과 자유의 존재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에 걸맞게 새로운
삶의 스타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위기에 빠질 때 작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경고는 자유가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것일 수도, 아니면
스스로 온몸으로 자유를 구가하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듦으로써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진정한 작가의 작품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벽과의 충돌을 기술하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통념을 조롱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 주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카프카가
그랬고, 바이런이 그랬고, 그리고 우리 시인 김수영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