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불에 익힌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훨씬 용이해졌고 이 또한 뇌 발달에 크게 기여합니다. 그런데 더 의미 심장한 변화는 인가니 불을 사용하면서 뇌가 더 커질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2}

덕의 원래 의미는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가장 순수하게 정제된 마음의 상태라고 했지요. 그래서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닐 삶의 향기와 힘을 발산하는 동력으로 회복돼야 합니다. '이 있어야 인간은 지식의 저장고가 아니라 지혜의 발휘자로, 도덕을 연구하는 자가 아니라 도덕을 실천하는 자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서 일상적으로 민주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겁니다.

(71)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그 길을 바로()’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라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인간은 이제 천명을 따르지 않고 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도의 출현은 바로 중국 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온 인간의 독립선언이에요. 도의 출현 이전에 중국인이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이었습니다. 도가 출현하고 나자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또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새롭게 갖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도와 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道德)’은 바로 이 도와 덕을 붙인 말이지요.

(77)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중략>

노자는 여기서 특정한 기준을 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한다고 보는 공자 식의 문명을 반대할 뿐이에요.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안다(美之爲美)”는 것은 정해진 미, 정의된 미,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미에 동조한다는 것입니다.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안다(善之爲善)”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정해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공통의 본질적 특성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합의한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특성에 기반한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합의해야 할 것 혹은 동의해야 할 것으로 강요됩니다.

(86)

노자는 이런 연유로 공자와 다른 방식으로 객관성, 투명성, 보편성이 확보된 질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고자 자신만의 도를 건립하면서 인간 세계, 인간의 내면성으로부터 인사이트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관성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 밖에 펼쳐진 자연에서 인사이트를 구하지요. 자연에는 주관성이나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데, 노자는 이를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자연의 질서에는 더 친하게 여기고 덜 친하게 여기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떤 주관적 가치도 개입시키지 않고 아주 평등하게 대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의미에서 자연 질서는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103~104)

無名 天地之始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有名 萬物之母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본질주의적 실체관에 익숙한 우리가 이 구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는 천지의 시작이댜라고 해놓으면 천지가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거니 천지가 로부터 발생했다고 이해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이는 잘못입니다. 동양 철학을 가까이하려면 한자를 신중하게 다루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자는 시대마다 의미를 더하거나 변형시켜 진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선진 시대의 철학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요즘 나오는 한자사전의 가장 앞에 기록된 뜻만을 가지고 덤비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는 요즘 이해로 보면 당연히 시작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노자는 라는 개념을 비롯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자가 말하는 비롯됨이란 없는 데사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의지해서 같이 가는 겁입니다.

(133)

모차르트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피터 월리가 쓴 <철학가게>에는 다음과 같은 모차르트의 말이 나와 있습니다.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

(181)

인간 존재의 근거가 이성 대신에 욕망으로 설명되면서 우리의 현대는 시작됩니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여 공통의 비율과 공통의 계산력을 사용하지요. 그래서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이해하면서 인간에게는 점점 물질(육체)이 더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욕망은 집단보다는 개별자에게 더 분명히 확인되죠. 육체성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됩니다. 그래서 세계는 이제 집단적 통합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적 융합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할 것입니다.

현대에서는 세계를 해석할 때 사유보다는 무시되었던 경험이 새롭게 부각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사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경험이 부각되는 시대로, 정신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던 시대에서 육체 혹은 욕망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죠. 집단에서 개별로, 보편에서 특수로, 본체에서 현상으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194)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분리된 것으로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라고 합니다. 반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입니다. 이것이 노자의 통찰입니다.

(205)

도가사상에는 광이불요(光而不耀)’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표현들도 있습니다. ‘광이불요빛을 발하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음을 의미합니다. 외부의 것들을 제압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절제와 그 절제가 빚어내는 탄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말이지요. ‘화광동진자기 빛을 다른 흙먼지들과 함께 펼쳐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빛이 난다 함은 하나의 방향으로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대립면의 긴장을 품은 사람은 하나의 빛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구슬처럼 빛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돌처럼 소박하지요.

(242)

노자는 <도덕경> 41장에서 대기면성(大器免成)’을 말합니다. 즉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굳지 않고 그냥 너덜너덜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로 읽어도 됩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 구절을 대기면성으로 읽지 않고,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새기죠. 이런 말도 할 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노자의 의도가 반영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기면성이라는 구절 앞에는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다(大方無隅)”고 기록되어 있고, 그 뒤에는 정말 큰 음에는 소리가 없고, 정말 큰 형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구절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245)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일을 그르치는 지름길입니다. ‘내 아들을 반드시 의사로 만들어야겠다는 부모의 선의(善意)가 탈을 내잖아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치자가 어떤 신념을 고집하는 한, 그 신념으로만 세계를 해석하게 되어 그 신념을 집행하는 것을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자처하게 되어 버립니다. 선의 확신에 빠져버리는 것이죠.

(253)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구나.

덜어낸다는 것은 이미 내면에 들어 앉아서 지배력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약화시킨다는 뜻이죠. 즉 그런 것들을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면 무위에 이르게 됩니다. ‘무위란 아무것도 안하는 게 아닙니다. ‘무위란 세계와 관계할 때 기존의 견고한 틀이나 방식에 갇힌 상태가 아님을 뜻해요. 이미 있는 신념, 이념, 가치관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서 자신이 고유하게 생산한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하는 겁니다. 세계를 볼 때 기준을 갖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론을 가지고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안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태도가 무위입니다.

(254)

無爲而無不爲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을 말할 때, 노자의 시선은 절대 무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무위를 지나 무불위에 가서야 멈추지요. 노자의 시선이 닿고 싶어 하는 곳은 바로 무불위의 지경입니다. 노자가 무위를 강조한 이유는 무불위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현실을 초탈하려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현실적 성취를 매우 중시했던 철학자입니다. 세상 속으로 아주 깊숙이 들어간 철학자였죠.

(258)

사람들은 세계와 어깃장 나는 데서 방황합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세계의 변화는 사람에 맞추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계는 감정이 없이 그저 변할 뿐입니다. 사람이 세계와 어깃장 나지않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할 일은, 세계가 자신에게 맞추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고정되어 있거나 일정한 틀을 고수하고 있다면, 변화하는 세계에 맞추는 일은 불가능하죠.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세계에 유연하게 맞출 수 있으려면 무위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사건이 생길 때나 새로운 정책을 결정할 때, 혁신에 성공하는 나라는 항상 새로 전개될 패러다임에 맞는 판단과 결정을 합니다. 반대로 혁신에 실패하는 나라들은 항상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미래를 설계하지요. 바로 유위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변합니다. 움직입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지요. 우리의 판단, 우리의 행동은 항상 변화하는 세계와 함께해야 합니다.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함께하라는 것이 무위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272)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겪은 여러 시행착오들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세 가지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첫째,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뻐 보이질 않습니다. 자식의 꿈과 희망을 존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닌 자식의 성공이나 출세를 사랑해선 안 됩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더 예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덜 예뻐진다면 아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가지고 온 성적표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 기다려줘야 합니다. 간혹 실패하더라도 기다려줘야 해요. 실패를 통하지 않고는 배울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눈앞의 작은 실패들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학습장을 잃게 됩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다리기. 다만 진심으로. 여기서 가정의 행복이 나오고 창조적 성휘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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