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인간은 나의 덩치를 보고 언제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저렇게 커다란 동물을 무엇에다
쓸까? 태초부터 인간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인간이
처음 바다로 다가왔을 때부터 쭉 그를 관찰해 왔다. 그 결과 인간의 몸은 깊은 바다 밑을 알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물에 뜨는 것을 이용해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36-37)
인간들이 바다에서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미심쩍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은 정어리도 다른 정어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도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들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나니 영 기분이 언짢았다.
(60)
내 이야기가 믿기지 않니? 할아버지 향유고래는 눈으로
계속 말했다. 너는 까마득히 먼 옛날 고래들과 라프켄체 사람들이 바다에서 약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해. 우리 고래들은 크고 강한 반면, 인간들은 작고 연약하지. 우리 고래들은 먼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인간들은 우리가 안전하게 머물게 될 그 장소에 이르는 길만 알고
있어.
(76-77)
꿈속에 나타난 장소는 우리 고래들이 모두 라프켄체 사람들을 따라가게 될 바로 그곳이었다. 해님의 보금자리를 둘러싼 바다는 언제나 투명할 정도로 맑고 고요했다. 오징어들이
새까맣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데다, 거센 파도로 일지 않아 짝짓기하기에 안성맞춤인 듯 보였다. 게다가 주변에 어떤 위협도 없어서 참고래, 향우고래, 그리고 남방긴수염고래가 아주 작은 밍크고래 옆에서 자신의 웅장한 몸을 한껏 과시하기에 딱 좋았다. 그리고 바다에는 작은 생물체들이 풍부해서 대왕고래와 혹등고래, 그리고
모든 종류의 수염고래들이 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고래들이 입만 벌리고 있으면
엄청난 양의 물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물을 다시 뿜어낼 때 수염이 맛있는 크릴새우만 걸러 내
목구멍에 남겨 주기 때문이다. 등이 은빛인 돌고래와 일각돌고래는 바다 밑 모래 속에 숨어사는 넙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지만, 볼썽사납게 싸우지는 않았다.
(108-109)
인간들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거야.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그들의 탐욕과 야망을 막을 수 없어. 그들은 우리가 본 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지역에서 오는 거야. 그들은
오르노스곶이라고 부르는 곳에 오기 위해 여기처럼 엄청나게 큰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거지. 거기에 가면
배와 난파선의 잔해들이 해안에 잔뜩 쌓여 있단다. 그것들은 말은 못 하지만 인간들이 얼마나 무모한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셈이지.
(116)
그래서 나는 등에 아홉 개의 작살이 꽂힌 채, 다른
고래잡이배를 찾으러 넓은 바다를 나갔다. 인간들이 무서워 벌벌 떨며 모차 딕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달빛
향유고래인 나의 임무는 그들을 쫓아 바다에서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 인간들을 계속 쫓아다녀야 할 저주받은 운명.
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의 힘.
나, 바다의 가차 없는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