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이건 메리언이 원하는 대로 불러요. 일지도 좋고 일기도 좋고 전능하신 메리언의 마법 연대기라고 불러도 난 상관없어요. 이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그걸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결정하면 돼요.” 그녀는 메리언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흔들며 스스로도 놀랄 만한 열성을 보인가. “나중에 기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해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의미까지도요. 자신에게
지니는 의미.”
(370)
지도에는 수많은 상징이 뿌려져 있었다. 도시. 비행장. 철도와 버려진 철도. 호수와
말라붙은 호수. 경주로를 나타내는 타원형과 유정탑을 나타내는 작은 유정탑. 점멸신호등을 나타내는 붉은 별. 깔끔하고 보기 좋은 단순화. 비행기가 격추되기 전까지는 그도 자신의 기술을, 삼차원의 공간과
인쇄된 지도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나는 여기 있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로는 아무리 멀리 여행해도 늘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기분을, 고립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궤도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방정식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지도로 표시될
수 있는 세계의 기저에 또다른, 포착하기 어려운 차원이 있는 것만 같았다.
(371)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든 걸 놓치고 지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대륙을 종단할 때 우리는 비행기 날개 너비밖에 되지 않는 하나의 길만 따라갈 것이며 오직
한 종류의 지평선만 볼 것이다. 동쪽으로는 아라비아와 인도, 중국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지나갈 것이고 유럽의 주둥이와 아시아의 꼬리를 가진 소련이라는 거대한 동물 또한 그렇게 보낼 것이다. 우리는 남아메리카도, 오스트레일리아나 그린란드, 버마, 몽골, 멕시코, 인도네시아도 전혀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주로 물을 볼 것이다. 우리는 주로 물을 볼 것이다. 액체 상태이거나 얼어붙은 물, 우리의 경로엔 주로 물이 있을 테니까.
(385)
우리는 진짜 두려울 때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고 싶은 갈급한 욕망을 느낀다. 고통과 공포를 체험하게 될 물체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체다. 우리가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으며 우리가 배 자체다. 하지만 비행에서는 두려움이 허용될 수 없다. 자기 안에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며, 그 다음엔 비행기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441)
가넷새의 돌진. 자신의 쓴 말이 떠오른다. 연료가 줄어드는 걸 바라보며 그 말대로 실천하리라 결심한다. 그렇게
결심하지만, 계속 날아간다. 살고 싶다는 걸 깨달은 걸까? 이 기억은 이상하게 빈 채로 남아 진실을 끌어내려는 그녀의 노력에 저항할 것이다. 나중에 그녀는 자신이 상반되는 바람들을 지녔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살고
싶은 동시에 죽고 싶고, 세상으로 돌아가 새 삶을 살면서 모든 걸 바꾸고 싶은 동시에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기도 한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