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예술은 왜 아름다운가? 쓸모없기에 아름답다. 삶은 왜 흉측한가? 온통 목적과 목표와 의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흉측하다. 인생의 모든 길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도 떠나지 않는 장소와 아무도 도달하지 않는 장소 사이에 길이 주어진다면! 누군가 들판의 중간에서 시작해 다른 곳의 중간까지 가는 길을 만드는데 인생을 건다면! 그 길을 연장한다면 유용해지겠지만 그러지 않고 기품을 중간 구간으로만 남겨둔다면!

 

(431-432)

내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소설 속에서만 인생을 살고 현실의 삶에서는 휴식을 누리는 것이다. 책에서 감정을 읽고 현실에서는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은 소설 속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진정한 감정을 느낀다. 주인공의 모험은 곧 독자의 모험이 된다. 진실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맥베스 부인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근사한 모험은 없다.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현실의 삶에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쉴 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434)

시간이란 무엇인지 모르겠다. 시간을 재는 정확한 척도가 무엇인지.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시계로 시간을 잰다는 건 외부에서 시간을 공간으로 나누는 것이므로 가짜다. 감정으로 시간을 잰다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감각을 재는 것이므로 역시 가짜다. 꿈에서 시간을 재는 건 역시 잘못됐다. 꿈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시간을 스칠 뿐이고,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흐름 속의 무언가로 인해 바쁘거나 느리게 산다.

 

(445)

진실을 찾는 일은, 신념의 주관적인 진실이든, 현실의 객관적인 진실이든, 돈이나 권력의 사회적인 진실이든 간에,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진실을 찾는 노력으로 상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가져다준다. 인생의 커다란 행운은 우연히 티켓을 산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460)

인생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는 실험적인 여행이다. 물질을 통해 떠나는 정신의 여행이고, 여행하는 것은 정신이므로 우리는 정신 안에 산다. 그러므로 외향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더욱 강렬하고 폭넓고 격동적으로 사는, 관조하는 영혼이 있다. 중요한 건 마지막 결과다. 살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그가 살았던 삶이다. 육체노동을 한 다음처럼 꿈을 꿀 때도 사람은 피로해진다. 어느 누구도 머릿속으로 깊이 생각할 때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 수는 없다.

 

(501)

행복을 인식하지 않으면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행복의 인식은 곧 불행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행복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과 이제 곧 행복을 뒤에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에서도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곧 그걸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507)

자부심이란 자신의 위대함에 대한 감정적인 확신이다. 허영심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서 위대함을 보거나 우리를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감정적인 확신이다. 이 두 감정은 반드시 함께 다니는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감정도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감정이고 양립 가능하다.

 

(516)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나를 포기한다. 읽은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을 버린다. 나는 읽으면서 잠에 빠진다.

 

(544)

대체 내 안에는 어떤 지옥과 연옥과 천국이 있는가! 하지만 내가 삶을 반대하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는 걸 본 적 있는가…… 나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나는 포르투갈어로 쓰지 않는다. 나 자신으로 쓴다.

 

(559)

신문을 읽는 것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항상 불쾌한 일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종종 그러하다. 심지어 도덕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전쟁 아니면 혁명이 항상 신문에 나오는데, 전쟁이나 혁명이 미치는 영향을 신문에서 읽다보면 공포보다도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읽다보면 우리의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그 모든 죽음과 부상의 잔인함이나 싸우다 죽은 자들 또는 싸우지도 못하고 죽은 자들의 희생이 아니다.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들 때문에 인명과 재산을 희생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570)

평화, 그렇다. 평화다. 잉여로 남은 상태처럼 부드럽고 커다란 고요가 내 안에서 존재의 밑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이미 읽은 글들, 완수한 의무들, 삶의 발걸음과 우여곡절들, 이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어떤 고요한 것을 둘러싼 희미한 그림자, 잘 보이지 않는 후광으로 변해버렸다. 때로 영혼을 잃고 빠져들었던 노력도, 때로 모든 행동을 다 잊고 몰두했던 생각도, 두 가지 다 아무 느낌 없는 위로, 시시하고 허무한 연민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574-575)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능력을 선물했고, 자신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해줬다.

인간은 강물이나 호수에만 자기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었다. 게다가 취하는 자세 역시 상징적이다. 자신의 얼굴을 본다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했다.

거울을 발명한 자는 인간의 영혼에게 독약을 준 것이다.

 

(583)

시간 안에는 수도원이 있다. 우리의 도피 위로 밤이 내린다. 연못의 푸른 눈 속에서 마지막 절망이 태양의 죽음을 반사한다. 우리는 오래된 공원의 여러 가지 사물들이었다. 우리는 오솔길의 영국식 조경과 거기 있는 조각품들과 모습 안에 매우 관능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 의상과 검과 가발, 우아한 동작과 행렬은 우리 영혼을 이루는 실체의 진정한 일부로구나! 이때 우리란 누구인가? 날아오르려는 슬픈 시도에도 불구하고 높이 솟을 수 없는, 황폐한 정원 분수의 날개 달린 물줄기일 뿐이다.

 

(586-587)

아침 아홉시 반에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더러운 각반을 찬 평범한 노인은? 공연히 나를 성가시게 하던 절름발이 복권장수는? 담뱃가게 앞에서 시가를 피우던 얼굴이 둥글고 혈색 좋은 노인은? 낯빛이 창백한 담뱃가게 주인은? 규칙적으로 보는 사람들이기에 내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일이면 나도 프라타 거리, 도라도레스 거리, 판케이루스 거리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일이면 나 역시, 그렇다. 느끼고 생각하는 영혼이며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우주인 나 역시 이 거리를 더 이상 지나지 않을 테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어떻게 됐지?”라고 어렴풋이 떠올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일, 내가 느끼고 살아왔던 모든 것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일상의 거리에서 사라진 한 명의 행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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