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303)
사람이든 사랑이든 어떤 이념이든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것,
진실을 믿지 않고 진실을 안다는 것의 유용성도 믿지 않으며 초연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늘 사고하며 사는, 내면이 지성적인 자가 갖춰야 할 바른 자세라고 본다. 어딘가에 소속되며 평범해진다. 신념, 이상, 여인, 직업 이
모든 것이 감옥이고 족쇄다. 존재는 자유로운 것이다. 야망도
우리가 그로 인해 자부심을 갖는다면 한낱 짐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밧줄임을 안다면 야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안 된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도 묶이지 말 것! 다른 이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명상하되 황홀경에 빠지지 말고, 생각하되 결론을 구하지 말자. 우리가 신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감옥 마당에서 간수가 잠시 한눈을
파는 바람에 생긴 이 짧은 휴식 시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사형이 집행될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면 그 다음날에 집행될 것이다. 계획하고 추구했던 것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종말이 오기 전에 햇볕 아래서 거닐자. 태양이
우리의 주름살 없는 이마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바람은 기대를 접은 자에게 시원하게 불어오리라.
(310)
나를 찾는 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내가 찾아낸
것은 의심스러우며, 내가 얻었던 것은 이미 내게 없다. 나는
길을 걷듯 잠을 자지만 사실은 깨어 있다. 나는 잠을 자듯 깨어 있고,
나는 내게 속해 있지 않다. 결국 삶이란 근본적으로 거대한 불면이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의식이 또렷한 인사불성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323)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행동의 한 형태다. 절대적인
백일몽 상태에서, 끼어드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마침내
우리 자신의 의식조차 진창에 빠져 미지근하고 축축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327)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어울려 살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그 말의 위험을 모른 채 하는 말처럼, 만일 수많은 행복한 부부들이 상대방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정말로 이해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모든 결혼은 다 잘못된 결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악마’의 영역인 비밀스러운 장소에 간직된 남성상과 여성상은 배우자가 구현할 수 없고 상대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이상형이자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한 이들은 자신의 좌절된 욕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때로 불의의 습격이나 퉁명스러운 모욕으로 인해, 그들 안에 숨겨진
있던 악마, 고대의 이브, 기사와 요정 등이 행동과 언어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334)
예술의 역할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타인들도 느끼게 하는 것,
우리의 개별성을 제공하여 이를 통해 타인들이 스스로에게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의 진정한 실체는 절대로 전달될 수 없고, 나의 느낌이 심오할수록 소통은 더욱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내가 느낀 것을 타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나의 감정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즉 그들이 읽었을 때 내가 느낀 바를 정확히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예술의 정의에 따르면 여기서 타인이란 특정한 이 사람마다 저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뜻한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내 느낌의 진정한 본질을 다소 왜곡하더라도
나의 감정을 전형적인 인간 감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343)
여행은 독서와 같고, 독서는 다른 모든 것과 같다…… 나는 고전과 현대물이 고요히 공존하는 박학다식한 삶을 꿈꾼다. 그
삶에서 나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통해 내 감정을 새롭게 할 수 있고 명상하는 이들과 대체로 생각만 했던 자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한데, 그들 사이의 모순에 기반한 사고로 나 자신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에 대한 이러한 꿈은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집어들자마자 사라져버리고, 책을 읽는 실제 행위는 읽고 싶다는 모든 욕구를 없앤다…… 마찬가지로
어쩌다 기차역이나 항구 같은 출발지에 가까이 가는 순간, 여행에 대한 모든 상상은 창백하게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확실한 두 가지, 나처럼 아무 가치 없는 두
가지로 돌아온다. 바로 아무도 모르는 나그네 같은 나의 일상, 그리고
잠들지 못한 자의 불면증 같은 나의 꿈이다.
(348)
사랑과 잠, 마약과 술은 예술의 기본 형태와 다름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과 같은 효과를 낸다. 하지만 사랑과 잠과
마약에는 환멸이 따른다. 사랑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실망을 준다. 잠을
자면 깨어나야 하고, 또 자는 동안은 사는 게 아니다. 마약을
복용하면 자극을 얻는 데 사용한 육신이 손상을 입는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예술에는 환멸이 따르지 않는데, 예술은 처음부터 환상을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로부터
깨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 안에서 우리는 자는 게 아니라 꿈꾸기 때문이다. 예술을 향유했다고 내야 하는 세금이나 요금은 없다.
(361)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있다면, 즉 돈이나 친교, 또는 사랑이나
명예, 호기심 등, 조용히 혼자서 만족시킬 수 없는 욕구들을
해결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찾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롭다. 만일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고귀한 영혼과 정신을 갖고 있다 해도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귀족적인 노예, 지적인 노예일 뿐이고 결코 자유롭지 못한다. 그렇게 태어났다면 당신의 비극이 아니라 ‘운명’ 자체의 비극이다. 하지만 삶이 당신에게 노예가 되도록 강요한다면
당신은 불운하다. 이 경우 비극은 당신 것이고, 당신을 따라
다닌다.
(364)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 자신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삶에 충실하다가도 때로는 의구심이라는 이상한
감정이 엄습한다. 내가 과연 존재하는지, 혹시 내가 누군가의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나는 사실 어느 소설 속 인물이고 문체의 긴 파동을 타고
복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 속 현실 안에서 움직이는지도 모른다고, 꽤 구체적으로 상상해본다.
(369)
삶과 멀리 거리를 두고 기대앉아 있노라면, 내가
결코 쓸 수 없을 문장들이 무기력한 나에게 들려오고, 결코 묘사할 수 없을 풍경들이 나의 명상 속에서
명료하게 표현된다. 모든 단어가 제자리에 들어 있는 완벽한 문장을 짓고, 정밀한 희곡의 줄거리가 마음속에 전개되고, 모든 단어들 속에서 위대한
시를 구성하는 어휘와 운율을 느끼며, 끝없는 열정이 보이지 않는 노예처럼 그림자 속에서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이 모든 감각이 내 몸에서 활동을 개시하기 직전인 상태로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는 순간, 단어들은 달아나고 희곡도 죽어버리고 율동적인 속삭임을 하나로 모으던 살아있는 결합
관계도 사라져버린다. 그 자리엔 아득한 그리움, 머나먼 산
위를 비추던 햇빛의 자취, 황량한 변두리의 나뭇잎을 날리는 바람, 결코
밝혀지지 않은 친족 관계, 타인들이 즐기는 난잡한 잔치, 언젠가
우리를 뒤돌아봐줄 것 같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여인만이 남는다.
(390)
내 영혼은 비밀스러운 오케스트라다. 내 안에서 어떤
악기가 연주되고 울리는지, 현악기인지 하프인지 심벌즈인지 북인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이 교향곡 같다는 것만 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