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정말로 저는 떠나야 돼요. 제가 여기 남아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자동인형인 줄 아세요? 감정 없는 기계처럼 보이나요? 내
입에 문 빵 조각을 빼앗기고 내 컵에 담긴 생명수가 엎질러지는 걸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기고 작다고 해서, 영혼도 마음도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잘못
생각하셨어요! 나도 당신처럼 영혼을 갖고 있어요. 당신과
똑같이 마음이란 걸 갖고 있어요! 하느님이 나에게 미모를 선물하시고 부유함을 허락하셨다면, 내가 지금 당신을 떠나는 게 힘든 것처럼, 당신도 나를 떠나기 힘들었을
거예요. 나는 관습이나 전통이나 죽어 없어질 육신을 매개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하는 거예요. 우리 둘 다 무덤을 지나, 하느님의 발치에 동등하게 서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동등하니까요!”
(37-38)
“한동안은 아마 지금과 같으시겠죠. 아주 잠깐 동안요. 그 후에는 냉정해지실 거예요. 그러다 변덕스러워지시겠죠. 그러다 엄해지실 테고, 저는 나리의 마음에 들려고 많은 고생을 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 많이 익숙해지시면 어쩌면 다시 저를 좋아하게 되시겠지요. 절 사랑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실 거라는
말이에요. 나리의 사랑은 6개월이나 그 이전에 거품이 되어
사라질 거예요. 남들이 쓴 책을 보니, 남편의 열정은 아무리
오래 지속돼 봐야 그 정도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친구와 동료로서는 저의 친애하는 주인께서도 저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121)
“이제 어떤 상황인지 알겠지. 그렇지? 청춘과 한창 시절의 반을 말할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보내고, 반을 쓸쓸한 고독 속에서 보내고 난 뒤에 처음으로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을 찾아낸 거요. 당신을 찾은 거요. 당신은 나와 꼭 맞는, 보다 나은 나의 인격이자 나의 선한 천사요. 나는 당신에게 강한
애정으로 묶여 있소. 당신은 선량하고 재능 있고 사랑스러워. 내
가슴엔 뜨겁고 엄숙한 정열이 있소. 그게 당신에게로 기울어져, 나의
중심과 생명의 샘으로 당신을 끌어들이고, 나의 존재로 당신을 감싸지.
순순하고 강한 불길로 타오르며, 당신과 나를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소 이것을 느끼고 알았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던 거요. 나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고 말하는 건 공허한 조롱이오. 그녀가 끔찍한 악마일 뿐이라는 것은 당신도 확인했잖소. 내가 당신을
속이려 한 것은 잘못이었소. 하지만 당신의 성격에 존재하는 완고함이 두려웠소. 편견이 미리 뿌리를 내릴까 봐 두려웠소. 위험한 고백을 하기 전에
당신을 안전하게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소. 겁쟁이 같은 짓이었어. 지금처럼
당신의 고결한 마름과 아량에 먼저 호소했어야 했는데, 고통스런 내 삶을 솔직하게 열어 보였어야 했소. 내가 얼마나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삶에 굶주리고 목말로 했는지를 당신에게 설명했어야 했소. 나의 결의가 아니라(이 단어로는 약해) 내가 성실하게 지극히 사랑하고 그 보답으로 성실하게 지극히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에 저항할 수 없는 나의 천성을
먼저 보여 주었어야 했소. 그 후에 내 정절의 서약을 받아 달라고 청하고, 당신의 서약을 나에게 달라고 청했어야 했소. 제인…… 이제 나에게 서약해 주시오.”
(191)
‘외롭다’고
표현한 이유는, 내 눈에 보이는 골짜기 굽이에, 나무에 반쯤
가려진 교회와 사제관을 제외하고는 건물을 하나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 저 멀리 끝에 부유한 올리버 씨와 그의 딸이 살고 있는 베일 저택의 지붕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가리고, 돌로 된 문설주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곧 나의 작은 마당과 그 너머 풀밭을 가르는 쪽문을 밀어 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리버스 씨의 포인터인 늙은 개 카를로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았다. 세인트 존은
팔짱을 끼고 거기에 기대 서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언짢아
보이는 얼굴로 근엄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들어오겠느냐고 물었다.
(207)
그가 새 책 한 권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시집이었다. 현대 문학의 황금기였던 그 시절의 운 좋은 독자들이 자주 볼 수 있었던 진정한 작품 중의 하나였다. 슬픈 일이다! 이 시대의 독자들은 그때만큼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운 내시길! 여기서 비난이나 불평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시는 죽지 않았고 천재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물욕의
신이 아무리 힘을 뻗친다 해도 이런 것들을 속박하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시와 천재는 언젠가
그 생명과 존재와 자유와 힘을 다시 주장하고 나설 것이다. 하늘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강력한 천사들이요! 더러운 영혼이 승리하고 약한 영혼이 파멸에 눈물 흐릴 때, 그들은
미소 짓는다. 시가 파괴되었다고? 천재가 추방되었다고? 아니다! 범부들이여, 그렇지
않다. 질투심으로 그런 생각에 이끌리지 마라. 아니다, 시와 천재는 살아 있을 뿐 아니라, 권력을 쥐고 명성을 되찾을 것이다. 어디에나 퍼지는 그들의 신성한 힘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비천한 지옥에 남겨질 것이다.
(334)
나는 이제 결혼한 지 10년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대단히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내 생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나만큼 남편에게 가까웠던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만큼 절대적으로
그의 ‘뼈 중의 벼요, 살 중의 살’이었던 여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에드워드와 아무리 오래도록
같이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각자 가슴에서 뛰는 심장 박동에 싫증 내지 않듯이, 그도 나와 함께 있을 때 싫증이라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다.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혼자 있을 때처럼 자유로운 동시에 같이할 때처럼 즐겁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오래도록 이야기한다. 우리의 얘기는 서로의 생각을
좀 더 생생하게 귀로 전해 준다. 나는 온전히 그에게 신뢰를 보내고,
그는 온전히 나에게 신뢰를 바친다. 우리는 성격적으로 매우 잘 맞고 그래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