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24)
“세상에 불평객이 없는 때가 없사외다. 세종대왕께옵서는 요순과 같으신 성군이거니와 재위한 지 30여 년에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가벼이 하시오니 태평성대에 그럴 만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무신의 불평은 면치 못할 일이요, 또 재야의 인재도 문장재시는 뜻을 이루기 쉽되 궁시(弓矢)를 잘하는 사람은 일생에 달할 길이 없으니 자연 문인은 교만하여지고 무사는 불평하게 되는 것이외다. 또 문신 중에는 자기의 현재 처지를 불만스럽게 여겨 매양 불평하는 이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무리를 가리켜 불평객이라 하는 것이외다”하고 한명회가 좋은
구변으로 기운차게 말하는 동안 수양대군은 혹은 눈을 감고, 혹은 눈을 뜨고, 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혹은 무릎을 치며 명회의 말에 탄복하는
기색을 보였다.
(275)
당시 이름 높던 집현전 팔학사 중에서 경학과 인격으로는 박팽년이 으뜸이요, 책론으로는 하위지가 으뜸이요, 시로는 기개가 으뜸이요, 사학으로는 유성원이 으뜸이요, 어학과 교제와 모략으로는 신숙주가
으뜸이요……. 이처럼 다 각기 특색이 있는 가운데 찬란한 문장과 풍류 해학으로는 성삼문이 으뜸이었다.
(337-338)
그러나 그까짓 것은 수양대군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런 무리가 근심되는 것은 권력을 잡은 시초가
아니요, 옛 권력이 쇠할 만한 때인 까닭이다. 수양대군의
눈앞에는 끝없는 영화가 있다.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이어질 권세가 있다(왕의
자리만 얻고 보면 말이다). 인사(人事)의 무상(無常)을 깨닫기에는
수양대군은 너무도 젊고 너무도 순조로웠다. 건강하고 젊고(사십이면
한창이 아닌가) 뜻하는 바를 못 이루어 본 적이 없는 바에 순풍에 돛을 달고 물결 없는 한바다로 선유하는
것 정도밖에는 인생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런 수양대군에게 반성이 있을 리 없고, 후회가 있을 리 없으며, 무상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얼마간 더 인생의 어리석은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이 쓰라린 무상의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10년이 얼마 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술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권세를 영원한 것으로 여겨 전력을 다하여 못할 것 없이 이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454-455)
김질이 아무쪼록 자기는 빼고, 또 왕이 듣기 싫어할
말을 빼가면서 지루하게 전말을 말하는 것을 삼문이 고개를 흔들어 막으면서 “그만해라, 네 말이 다 옳지마는 좀 깐깐하다”하고 다시 왕을 바라보며 “더 말할 것 있소. 상왕께옵서 춘추가 높으셔서 선위하신 것도 아니고
잘못하심이 있어서 하신 것도 아니시오. 나으리라든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같은 불충한 무리들에게 밀려서 선위를 하옵신 것이니까 원하는 것은 인신소당위(人臣所當爲)가 아니오? 다시
물을 것 있소. 그래서 오늘 나으리 부자를 죽여서 천하의 공분을 풀려고 하였더니 일이 뜻 같지 못하여서
이 꼴이 되었소. 마음대로 하시오”하고 왕을 상감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른다.
(458-459)
이때에 신숙주가 무슨 은밀한 말을 아뢰려고 왕의 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삼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른다.
“이놈 숙주야, 네가
나와 함께 집현전에 입직하였을 적에 영릉께옵서 원손을 안으시고 뜰에서 거니시며 무어라고 하시더냐. 내가
천추만세한 후에라도 너희는 이 아이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든 너는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냐.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한다 하기로 네가 이다지 극흉극악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놈아, 네가 대의를 저버렸거늘 천벌이 없이 부귀를 누릴 듯 싶으냐.”
(470-471)
삼문은 붓을 들어,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는 단가 한 편을 지어 쓰고, 이개도 붓을 들어,
가마귀 눈비 맞아 흰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하였고, 박팽년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腔)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 건가
하였다.
(513-514)
이 지방은 노산군이 손수 쓴 것이다. 첫머리에 ‘삼생부모영가(三生父母靈駕)’라고
썼다. 이것을 쓸 때에 가장 간절히 생각난 이는 조부 되시는 세종대왕과 아버님 문종대왕이시거니와, 금생에 한 번 대면해 보지도 못하고 또 일전에 종묘에서 그 위패까지도 철폐함을 당한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생각할 때에는 피눈물이 솟음을 금치 못하였다.
다음에 쓴 이는 조모도 되고 어머니와도 같은 혜빈 양씨와 그 세 아드님. 그 다음이 안평 숙부 부부자, 그 다음이 아버님 항렬 중에 가장
나이 많은 화의군 영, 다음에 황보인, 김종서, 정분, 허후 등 계유정난 때에 죽은 사람들을 쓰고, 또 그 다음에는 성승, 유응부, 박쟁,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을 쓰고, 다음에 외조모와 외숙 권자신의 패를 쓰고, 다음에 장인장모 되는 송현수 부처를 쓰고, 나중에 노순군의 유모
이오 부처를 쓰고, 나중에 대자로 ‘충혼원혼영가(忠魂寃魂靈駕)’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