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의 몸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몸의 토대인 생명과 자연에 대한 앎의 비전을 가져야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안의 자연성이 회복되면서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삶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거죠. 그러면 예기치 않은 재난이나 고난에 처하더라도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36)

하루의 리듬, 일상의 흐름을 잘 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 항목은 쏙 빠져 있어요. 밤에 잠을 못 자는데 로열젤리나 홍삼을 아무리 많이 먹으면 뭐합니까. 또 하나, 물질이 아닌 정신의 면역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마음이 불안지옥인데, 각종 비타민을 먹는다고 그게 재대로 효능을 발휘할까요? 약간만 스트레스 받아도 소화가 안 되는 게 우리의 몸인데, 감정, 정신, 마음, 이런 영역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소홀한 거죠. 달라이라마께서 유튜브로 하는 설법에서 누누이 강조하듯이 이제 생리적 위생뿐 아니라 정신적 위생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50)

일단 불교는 이전의 모든 사상을 전복하면서 등장했고, 이후에도 기존의 지배적인 사유구조를 해체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 점만 보더라도 그야말로 청년의 사상이죠. 그에 비하면, 중화 문명의 도교나 유교, 즉 공자나 노자의 사상은 노년의 사상이에요. 청년의 역동성이나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화사상이 노년의 로고소라면, 불교는 청년의 파토스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불교는 마음을 탐구하는데, 그 마음의 격정이 가장 심한 때도 청년기잖아요. ‘질풍노도의 시절이라고 하죠. 불교는 바로 그 역동성이 산물입니다.

(90-91)

불교는 또 굉장히 실용적인 사상입니다. 왜 인생은 이토록 괴로운가를 탐구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우리가 보통 느끼는 세속적인 괴로움이라고 하면 보통 인간관계의 애착에서 오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 애착의 대상을 상실했을 때 괴로움이 생기죠. 실연을 당하거나 가족을 잃거나 할 때 극심한 괴로움을 느낍니다. 또 하나는 물질적으로 내가 뭘 얻고 싶은데 못 얻는 걸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죠. 불교는 바로 이런 괴로움을 타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괴로움을 없앤다고 하면 보통 기복종교를 바로 떠올립니다. ‘절에 가서 열심히 절하고 기도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해결될 거야.’ 혹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거야등등. 하지만 이것은 불교 이전에, 종교가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종교는 신의 뜻을 이루는 일인데 그렇게 사리사욕에 물들어 있으면 과연 신이 들어주실까요?^^ 입장 바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더구나 불교는 붓다라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붓다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고,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112)

사후의 지복을 원한다면, 누구든 애착을 갖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정과 집착을 부추기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살아서도 늘 무겁고, 사후에도 혼이 탁해서 구천을 맴돌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점에서 <동의보감>의 비전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절에서 장수로, 장수에서 신선으로 가는 이 경로의 핵심은 장수나 신선 자체가 아니라 존재가 점점 더 자유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데 방점이 있는 겁니다.

(122)

그래서 자신을 돌아볼 때 이타심을 기준으로 삼으면 상황이 명료해집니다. 내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내가 지금 굉장히 불만족스럽다는 뜻이에요. 나 자신이 만족스러우면 절대로 그렇게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아요. 불성, 깨달음, 열반, 이런 언어를 들으면 무척 고원하고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거 같은 생각이 드는데, ‘내 마음의 행로가 어디를 향하는가?’ 이런 걸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 먼 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충만함, 그 충만함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이타심, 이것이 붓다의 마음이라는 거 잊지 마시고요.

(137)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존재는 삼독, 즉 세 가지 독에 물들어 있다는 거였습니다. 앞에 말씀드렸던 탐진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삼독이고요. 그래서 삼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설법을 많이 하십니다. 계속해서 <숫타니파타>의 구절들을 보죠. “치닫지도 뒤처지도 않아,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어리석음을 버린 수행자는,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뱀의 경> 여기서 치닫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는다라는 말은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태과불급을 넘어선다는 것과 상통하는 말이에요. 정기신을 바탕으로 오장육부가 구성되지만 그 기운 역시 항상 넘치거나 모자라게 됩니다. 목기가 넘치면 간 기운이 넘쳐서 술에 빠지게 되고, 토기가 넘치면 비위 기능이 너무 활발해서 식탐을 주체하지 못하고, 수 기운이 범람하면 성욕이 함부로 날뛰게 되고이렇게 넘치는 것이 있으면 모자라는 것도 있겠죠. 그것을 불급이라고 합니다. 그건 또 그것대로 온갖 병증들이 만들어냅니다.

(175)

그리고 이건 제 소견인데, ‘우리는 동등해라는 견해를 고집하다 보면 그 또한 폭력적인 동일성에 빠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주의가 주장한 과격한 평등주의가 실패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물론 이건 앞으로 더 깊이 탐구해 볼만한 과제입니다. 아무튼 비교라는 척도가 작동하는 한 모든 견해는 다 망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우월하다, 열등하다, 동등하다, 이 셋은 다 같은 범주의 산물이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식의 척도에서 벗어나는 거겠죠.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되 어떤 방식으로든 비교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붓다의 평등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91-192)

저는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라는 이 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정진이라는 말에는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이미지가 있죠. 짐을 걷고 걸어가는 황소, 그 황소의 끈기와 우직함을 떠올려 보세요.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야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진정한 평온을 누릴 수 있다는 거죠. 이런 사유를 누가 허무와 적멸의 사상이라고 하겠습니까?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구절도 참 좋아하는데, <숫타니파타>의 단골멘트 중 하나예요. 우리 삶이 지닌 원초적 슬픔과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붓다의 자비심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238)

내가 지금 보고 경험하는 세계는 어떤 종류의 마주침 속에서 잠시 구성된 것일 뿐입니다. 연기조건이 만들어 낸 환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설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내 눈앞에 리얼한 세계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지?’ ‘이게 가짜라고? 미친 거 아냐?’ 등등. 서양철학사, 과학사가 그렇게 세상을 파악해 왔고 우리도 20세기 내내 주객 이원론’, ‘물질의 합법칙성’, ‘변증법적 발전등을 수도 없이 들어 왔기 때문에 그런 식의 사유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269-270)

그다음 여름의 기운인 화는, 우리 몸에서는 심장과 소장입니다. 간과 담을 가까이 있으니까 금방 이해되는데, , 소장은 좀 생소할 수도 있어요. 현대의학에서 보자면, 심장은 순환계고, 소장은 소화계에 속하는 장기니까요. 하지만 한의학적으로는 분류의 기분이 오행의 기눙이기 때문에 심장과 소장을 화기에 배속시킵니다. 그다음 토는 비위를 말합니다. 비위, 즉 비장과 위장은 몸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모든 걸 조정해 주는 거죠. 음식물을 완전히 분해한 다음 영양분을 몸 전체로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조정과 배분, 이런 활동은 토의 기운이라고 보는 겁니다.

(304)

내가 왜 이렇게 불편하지?’, 아니면 마음이 왜 이렇게 불안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그 지점에서부터 차츰차츰 나아가면 되는데, 인과법을 쓰지 않고, 바로 먹을 걸로, 술로, 유흥으로 도피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무마하면서 습관적으로 돈을 벌고, 돈을 버는 데서 오는 성취감을 조금씩 느끼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불안이 점점 커져 가는데 임시로 막아 놓고 사는 거죠. 그래서 중년 이후가 되면 다 마음이 헛헛하다, 답답하다고 하는데, 이 헛헛함과 답답함은 그만큼의 덩어리가 뭉쳐 있어서 어디서부터 뚫고 나가야 될지를 모를 때 오는 겁니다.

(328)

불교는 참 특이한 게 무신론이잖아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신들의 세계에 가거나 신이 되어 태어나는 것조차 윤회의 한 코스라고 여기거든요. 인간, 아수라, , 축생, 아귀, 지옥, 이렇게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종교는 죽은 다음에 신들에 세계에 태어나는 걸 목표로 하죠. 그래서 많은 제물을 바치고 날마다 예배를 드려서 그 신에게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들의 세계에 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목표를 하지 않습니다. 내세에 대한 표상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 거기에 다시 끄달리게 됩니다.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닐까”, 이런 걸 의식하면서 자기검열에 빠지게 되겠죠. 그럼 일단 마음이 늘 초조합니다. 생리적 균형도 깨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음허화동이나 상화망동의 상태에 빠지기 십상이에요.

(374)

이렇게 다섯 가지 스텝을 인생 전체로 놓고 봐도 되고, 하루에 적용해도 됩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존감이 따라서 액션이 달라질 거 아닙니까? 몸에 차오르는 자존감이 있다면 활기차게 시작할 테지만, 자존감이 낮으면 더 움직이기 싫겠죠(비겁). 그리고 누구든 오전과 오후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죠(관성). 그러다 해가 져서 집에 들어오면 책 읽고 명상을 하고 지혜를 일구는 시간(인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가 마무리돼야 깊은 수면을 들고 다음 날 아침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운명의 지도는 하루도 되고 일 년도 되고 십 년도 되고 평생의 전 과정도 다 설명해 줄 수 있는 그런 밑그림입니다.

(400-401)

그래서 모든 괴로움은 다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에요. 나를 확장하고 계속 증복시키려다 보니 괴로움을 겪는 거예요. 게다가 자본주의는 소유밖에 없는 거죠. 이렇게 와 소유, 이런 자아에 대한 집착이 허망하다는 걸 불교는 계속 강조하는 겁니다. “열반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고귀한 님들은 이것을 진리로 아는 님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기 때문에 탐욕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든다.”<두 가지 관찰의 경>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우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것이고, 그러면 탐욕에서 벗어나 지극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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