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혜시는 여기서 커다란 나무를 비유로 들면서 장자의 말을 사람들이 듣지 않는 까닭은 크기만 하지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버린다’고
말한 데서 천하의 이야기꾼 장자가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혜시가 장자의
아픈 데를 찌른 거죠. 하지만 장자는 세상에서 쓸모가 있다고 하는 자들이 ‘이성(狸狌)’, 곧
살쾡이로 비유하면서 바로 반격합니다. 시랑(豺狼)이라 하지 않고 이성이라고 한 것은 상대가 절친한 벗인지라 많이 봐준 표현입니다. 시랑은 승냥이로 흔히 살쾡이보다 악질적인 짐승으로 그려지거든요. 어쨌든
이놈들은 몸을 바짝 낮추고 있다가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데 뛰어난 자신의 재능을 믿고 높은 곳 낮은 곳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날뛰다가 결국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고 맙니다. 사람으로 치면 남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마는 전쟁광들이라고 할 수 있죠.
(91)
마무리하자면 장자는 커다란 나무는 바로 쓸모없기 때문에 도끼에 찍혀나갈 염려도 없고 어떤 사물도
해칠 염려가 없는데 어찌 쓸모없다는 이유가 괴로운 것이겠는가 하고 반박합니다. 결국 장자는 쓸모없음이
바로 큰 쓸모이고, 큰 쓸모가 바로 양생(養生)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요.
(148)
<1장>을
통해 장자는 모든 존재가 평등한 제물의 세계를 들려 주었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죠. 인간 세상에 만연한 것이 차별입니다. 그런 차별은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가? 장자가 보기에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근원에는 언어가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물을 분류합니다. 이 분류는 대단히 폭력적입니다. 장자는 이러한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차별이 없는 세상을 희구했던 옛 성인 요와 순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152)
여기서 도를 대단한 추상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
만나는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이 바로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가 보기에 사물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나누기 시작하면 그런 사람의 눈에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연히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겠죠. 누가 현자인지 보일 턱이 없습니다. 그런 걸 보면
노예의 무리의 섞여 있는 백리해가 현인인 것을 알아보고 양 다섯 마리를 주고 풀려나게 한 진나라 목공이나, 현인
월석보를 말 한 필과 바꿔 온 제나라 재상 안영 같은 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173)
그에 따르면 성인은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옆구리에 낄 정도로 스케일이 큰 존재이지만
늘 만물과 함께 하려 하고 희미한 도에 자신을 두어서 노예도 존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것은 나에게
이롭고 어떤 것은 해롭다는 식으로 분류하여 이로훈 것은 취하고 해로운 것은 피합니다. 그런데 성인은
만물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한 사람도 똑같이
존중합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것이지요. 굳이 성인이 아니라도
그런 경우는 있습니다.
(182)
우리는 어떤 권위에 의존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려고 하지만 장자가 보기에 그런 것들은 모두 화성(化聲), 곧 변화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처럼 일시적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둠에 갇힌 존재일까요? 어떻게 해도 행복해지거나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일까요? 장자는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로 ‘천예(天倪)’라고 하는 자연의 도를 따라 만물을 조화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도를 따르게 되면 세상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시비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가 바라는
경지입니다.
(193)
장자가 꿈을 꿉니다. 유명한 호접몽(胡蝶夢)입니다. 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닙니다. 사람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그런지 ‘적지(適志)’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뜻에 꼭 맞아서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장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나비가 된 것이죠. 사실
난다는 표현은 인간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쓰이지요. 장자의 첫 이야기는 대붕이
날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바로 장자 자신이 날아가는
장면입니다. 대붕은 구만리의 하늘을 타고 납니다. 그리고
장자는 ‘물롸’, 곧 나비가 됨으로써 하늘을 납니다. 구만리의 하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비의 날개는 아주 가벼우니까요.
(202)
“우리의 삶은 끝이 있지만 지식은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을 가지고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면 위태롭다. 그런데도
지식을 추구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착한 일을 하더라도 명예에 가까이 가지는 말며, 나쁜 일을 해도 형벌에 가까이 가지는 말고, 중간을 따르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으면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고, 생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고, 어버이를 모실 수 있으며, 천수를 다 누릴 수 있다.”
(263)
물욕을 탐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한다는 뜻이 아니라 외부의 물욕을 나서서 맞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머물지 못하는 것은 이목의 욕망을 따라 마음을 가만히 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이목의 감각을 닫아서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극을 그대로 두되
그것을 따라가려는 심지(心知)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귀신도 찾아와서 머물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고대의
성왕인 우임금과 순임금, 그리고 전설의 주인공 복희씨와 궤거씨는 모두 이런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272-273)
“말이란 바람이 일으킨 물결처럼 일정함이 없고 행동에는
득과 실이 있습니다. 바람이 일으킨 물결은 쉽게 동요되고 득과 실이 있는 행동은 쉽게 위태로워집니다. 그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으니 교묘한 말과 지우친 말 때문입니다. 짐승이 죽을 때가 되면 마구 짖어대서 숨이 거칠어지는데 이때 거친 마음이 아울러 생깁니다. 과실을 따지는 문책이 정도에 지나치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으로 대응하면서도 스스로 그런 줄 모르니, 만약 참으로 그런 줄 모른다면 그 결과를 누가 알겠습니까. 그 때문에
법언에 이르길 ‘명령을 멋대로 바꾸지 말며 억지로 이루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한도를 넘어서면 넘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명령을 바꾸고 억지로 이루는 것은
위태로운 일입니다. 일이 잘 이루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한 번 잘못된 일은 미처 고칠 수
없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사물의 자연스러움을 타고 마음을 자유롭게 노닐게 해서 어쩔 수 없음에 맡겨 마음을 기르면
지극할 것이니 어찌 꾸며서 보고하겠습니까. 군주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으니, 이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371)
“자연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사람이다. 자연히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자연을 따라 살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길러 천수를 마쳐서 중도에
요절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앎이 성대한 사람이다. 비록
그러하나 근심이 있으니 앎이라는 것은 마주하는 것이 일정한 뒤라야 꼭 맞게 되는데 마주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자연이라고 생각한 것이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닌 줄 알며, 내가
인간에 속한 것이라 여긴 것이 자연이 아닌 줄 알겠는가. 참다운 사람이 있은 뒤라야 참다운 앎이 있게
되는 것이다.”
(387)
“옛날 참된 사람은, 그 모습이 산처럼 우뚝 솟아 있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며, 부족한
것 같지만 남에게 받지 않으며, 몸가짐이 법도에 꼭 맞지만 고집하지 않으며, 텅 빈 것처럼 허술하지만 꾸미지 않았다. 환하게 밝아서 마치 기뻐하는
것 같고, 임박해서 움직여 마지못한 듯하며, 가득히 자기
안색을 나타내는 일도 있지만 몸가짐이 법도에 맞아 자신의 덕에 머물며, 넓은 마음으로 세속과 함께하는
것 같지만 오연히 제약받지 않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감추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무심히 말을
잊어버린다.”
(393)
“죽거나 태어나는 것은 명이다. 밤낮처럼 일정함이 있는 것이 자연인지라 사람이 관여하지 못하니 이것이 사물의 본모습이다. 저들은 단지 하늘을 부모로 여겨 온몸으로 사랑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높은 대상이겠는가. 사람들은 단지 세상의 군주가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온몸을 바치는데 하물며 참다운 군주이겠는가.”
(401)
“도는 제 모습과 분명함은 있지만 작용이 없고 눈에
보이는 형체가 없는지라, 전해줄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으며, 터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으니, 스스로 뿌리가 되어 하늘과 땅이 아직 있기 이전에 예로부터 분명히 있어
온 것이다. 귀신과 상제를 신령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만들며, 태극보다 앞서 존재하면서도 높은 체하지 않으며, 육극 아래에 머물면서도
깊은 체하지 않으며, 하늘과 땅보다 앞서 있으면서도 오래된 체하지 않으며, 상고보다 오래되었으면서도 늙은 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