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과학을 해석하려면 과학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는가’뿐만 아니라 ‘우리는 왜 그것을 알아내려 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과학 지식이 인정되거나 거부되는지 알 수 없으며 어떤 것이 과학이 충족시킬 수
있는 약속이고 어떤 것이 의심해봐야 할 주장인지도 구별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을 질문해야만, 우리는 과학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18)
히포크라테스는 눈에 보이는 세계, 질서 잡힌 우주에 의지해 질병을
설명하려 했다. 그가 보기에 질병은 신의 분노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자애로운 신의 은혜로 치료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악마에 씐 상태이거나 신성에
씐 상태라고 오래도록 여겨져온 간질도 그가 보기에는 ‘다른 질병보다 더 영적이거나 신성하지 않으며, 그것 또한 자연적인 원인으로 생기는 것’일 뿐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지해서 질병을 신의 의지 때문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질병이 신성 때문에 생긴다는 개념은 질병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갖는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29-30)
여기에 더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진화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했다.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변화가 부패이고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것이었으며 덜 효과적이고 덜 발달된 상태로 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는 자연이 더 완전하게 실현된 종착지를 향해 발달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진화 개념과 꼭 같지는 않다. 오늘날 알려진 생물학적 진화는
정해진 목적도, 전체적인 설계도 없는 과정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목적론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의도적으로 완벽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42)
아르키메데스는 당시에 널리 받아들여지던 우주 모델 대신 다른 모델을 사용하기로 했다. 태양이 중심에 있는 모델이었다. 고대에는 우주를 상호 연관된 구체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비교적 작은 체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이 자그마한
우주가 그에게로 별로 도전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62)
나는 더 합리적인 궤도의 배열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습니다.
-
코페르니쿠스 <주해>
(86)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사건들과 새로운 관찰들이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살았더라면 이 새로운 사건들과 관찰들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대화: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대하여>
(107)
이에 더해, 실험은 반복해서 행해져야 했다. 보일은 나중에 이렇게 언급했다. ‘그 실험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한
번 이상 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이론적으로든 실용적으로든 상위 구조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의 실험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조건이나 물질이 달라지면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 번 반복해서 얻은 결과만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아야 했다.
(113)
“(진정한 자연 철학은) 손과
눈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을 통해 진전되고 이성에 의해 계속 나아간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손과 눈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자연 철학은
하나의 역량과 기관에서 다음의 역량과 기관으로 계속 돌면서 생명과 힘을 얻는다. 혈액이 손, 발, 폐, 심장, 머리를 돌면서 인체가 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방법을
부지런히 집중해서 따르고 나면 인간의 분별력 안에서 이해되지 못할 것은 없다. … 대화, 주장, 논쟁은 곧 노동으로 바뀔 것이다. 모든 현란한 견해들의 꿈,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속성, 명석한 뇌가 고안한 이런 사치품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견고한 역사와
실험과 노동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처음에 인류가 금지된 ‘지식의
열매(선악과)’를 맛보고 타락했듯이, 그들(아담과 이브)의
후예인 우리는 동일한 방법에 의해, 즉 그저 보고 사유하는 것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직 금지된 적이
없는 자연 지식의 열매를 맛봄으로써 구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구는 더 이상 감각의 확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훅이 보기에, 이제 도구는 지식의 열매이자 완벽으로 가는 길이었다.
(145)
이렇게 복잡하고 단절된 지층의 과거를 시간 순서대로 정연하게 읽어낸 것은 자연 철학계에서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럽과 영국 모두에서 광물학자들과 ‘지질학자’(여전히 새로운 용어였다.)들이 저마다 자기 지역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지층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튀비에 자신은 이론을 더 넓게 확장했다. 그는 파리 분지의 여섯 지층이 지구의 소우주라고 결론 내리고 파리 분지에서 발견한 것을 지구 전체의 이론으로
확장했다.
(177)
그리고 과학은 재미난 이야기에 약하다. 라이엘이 말한 길고 점진적인
역사는 딱히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재앙적 사건을 다시 도입한 것은 이 분야에 약간의
이야기(와 멜로드라마)를 불러왔다. 1997년에 앨버레즈는 이 가설을 <티나로사우루스 렉스와 멸망의
운석 구덩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의 대부분은 앨버레즈와
그의 연구팀을 결론으로 이끌어준 과학적 증거들을 꼼꼼하게 제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1장에는 ‘아마겟돈’이라는 제목이 달렸고,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구절이 인용됐으며, 재앙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을지에 대한 묘사가 실렸다(전체 숲에 불이
붙고, 대륙 크기만 한 거대한 산불이 땅 전체를 휩쓸었다. … 숲이
불타는 동안 또 다른 공포가 해안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과학 저술가 킴 짐머가 말했듯이, ‘갑자기 생명의 역사가 어떤 공상 과학 영화보도도 더 영화 같아졌다.’
(196-197)
월리스는 이러한 생각을 ‘원래의 유형에서 무한히 멀어지려는 변종들의
경향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글로 작성해서 편지와 함께 다윈에게 보내면서 이 글을 찰스 라이엘이나
그 밖에 관심 가질 만한 자연사학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윈은 깜짝 놀랐다. ‘이 글은 내 이론과 정확히 같은 이론을 담고 있다.’ 편지에 적힌
부탁대로 다윈은 이 글을 라이엘로 보냈다. (‘나는 이보다 더 놀라온 우연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 그게 무엇이건 나의 독창성은 깨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윈
자신의 연구에 대한 간단한 초록도 보냈다. 라이엘과 동료인 조지프 후커(왕립 식물원장이자 다윈의 친구)는 두 글 모두를 린네 학회에서 발표했다(린네 학회는 100년 역사를 가진 자연사 학회다). 1858년 8월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이 린네 학회 모음집에 나란히
게재됐다.
(245-246)
하지만 뉴턴의 물리학이 승리했다. 너무나 잘 작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뉴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잘 작동했다. 뉴턴의 중력 법칙과
운동 법칙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뉴턴은 태양계에서 작용하는
온갖 중력의 힘들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각 천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데, 각자가 움직이므로 그 영향이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대로 두면 무한히
갈 수 없고 가끔 한 번씩 신이 개입해서 천체들을 섬세한 균형 상태로 되돌리는 ‘초기화’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렇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체계라면 적어도 최초에 출발시킬 때라도 신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1690년대 초에 이렇게 언급했다. ‘행성들이 태양 쪽으로 가게 하는
하강 운동은 중력이 일으킬 수 있지만, 각자의 궤도에서 공전을 하게 하는 수평 운동을 일으키는 데는
신의 팔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서신에서도 이렇게 언급했다.
‘중력이 행성들의 운동을 일으켰을 수는 있겠으나 신의 힘이 없었다면 그 운동을 태양 주위를 운동으로 만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