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
이렇게 보면, 코로나19는
단지 경제의 외생변수가 아니라 지금까지 진보와 발전으로 여겼던 경제성장에 내재한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이제는
성장신화의 미몽에서 깨어나라고 우리를 깨우는 죽비소리다. 결국, 바이러스
재난의 근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극복할 것은 바이러스가 아닌 우리 자신이고, 싸울 것은 사람과 자연을 희생하여 성장을 거듭해온 탐욕의 경제다. 코로나19는 현상으로는 질병의 문제지만 근본으로는 자연과 경제 문제다.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했다(프란치스코 교종,
<찬미받으소서>). 기후문제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문제다(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코로나19를 질병으로만 접근하면 이 바이러스 감염병이 가리키는
문제의 본질과 근원을 놓치고 결국 문제해결에 실패할 것이다.
(24)
성장은 언제나 큰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탈성장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적은 것이 많은 것이고, 단순한 것이 좋다고 말한다. 탈성장을 세상을 보는 또다른 시각이다. 소유와 소비, 경쟁과 독점, 효율과 이윤, 통제와
지내, 무한한 욕구가 성장을 나타낸다면, 단순과 절제, 협력과 나눔, 환대와 보존, 돌봄과
공생, 자족과 충분함은 탈성장을 가리킨다. 탈성장과 관련된
다양한 삶의 태도는 더는 성장할 수 없다는 좌절에서 비롯된 강요된 선택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도가 ‘좋은 삶’에 필수적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자발적 선택이다. 탈성장은 우리 각자의 내면의 성찰과 변화를 요청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변화는 우리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절제는 탈성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
차원의 덕(德)이다. 절제의
내면화로 탈성장에 조응하는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양식이 가능해진다.
(28)
돌연변이는 보통 바이러스 표면에 있는 2~3개의 단백질의 ‘머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해서 인간 세포에 ‘정박’하여
침입할 수 있게 된다. 해마다 생산되는 백신은 바로 그곳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단백질들의 ‘줄기’들은
안정적이고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바로 이 변하지 않는 ‘줄기’들을 무력화하는 방법으로, 여러 해 동안 지속될 수도 있는 모든 바이러스
변종에 대해 전부 면역력을 갖게 하는 범용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 대해서는 사실상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연구는 존재하지만 수익성이 없기 때문에 거대 제약회사들은 범용 백신을 개발하거나 제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36)
나는 자본주의가 대다수 인류에게 소득을 만들어주고, 일자리와 의미
있는 사회적 역할을 제공하고, 화석연료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을 멈추고,
생물학의 발전을 공중보건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우리 시대의 문명적 위기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위기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독립된 별개의 문제가
아닌 복잡한 하나의 총체적 위기로서 보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의
초자본주의는 인간 종의 생존에 필요한 생산력의 진보를 막는 절대적인 족쇄가 되었다.
(45)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의 지구 평균기온보다 약 1℃ 올라간 현재의 수준에서도
우리는 이미 너무나 큰 규모로 지구의 한계를 초과하고 있어서 어느 때고 걷잡을 수 없는 폭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험에 처해 있다. 더욱이 이 메커니즘은 대단히 복잡해서 우리는 그런 일이 진행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현 상태가 이어진다면 보수적인 추정으로도 80년 내에 지구 평균 기온이 3~6℃ 상승한다는 것이다. 최소로 잡아도 16년 이내에 우리가 맞이하게 될 2℃ 뜨거워진 지구도 인간 종에게는 ‘극히 위험한’ 조건이다. 역치라고 하는 3~4℃
지구 평균기온 상승은 인류 문명의 핵심적인 기반시설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전지구적인 산업의 확장은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조건도
만들어냈다. 산업활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함에 따라서 인간은 야생 동식물과 자연 서식지를 침범하였고, 수많은 미지의 질병을 갖고 있는 동물들이 인간 주거지와 더욱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이미 수십 면 동안 이번 세기에 전세계적인 전염병이 필연적으로 창궐한 것이라고 경고해온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104)
인류의 당면 위기 중 하나인 기후위기를 넘어서려면 탈탄소가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한 에너지 전환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인류가 처한 위기 중 하나는 생물종
멸종이다. 2000년부터 매년 약 650만ha의 산림이 사라졌고(우리나라 전체 산림면적과 비슷한 규모), 100종 이상의 생물종이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게 유엔 생물다양성과학기구의 설명이다. 지구 전체 동식물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런 속도라면 지난 1,000만 년의 평균
멸종 속도보다 수십, 수백 배 빠르다. 원인은 도시화 등
인간의 토지이용 변화와 그에 따른 동식물의 서식지 감소가 압도적이다. 이어서 식물 채집과 사냥, 그리고 기후변화가 세 번째 위협요인으로 꼽혔다. 자칫 6,000만 년 전 공룡이 멸종한 뒤 처음으로 지구가 대멸종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요지다.
(156)
우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건강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통용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은 당연한 듯이 쓰이고 있는 ‘건강권’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이후이고, 현재도 모든 국민이 차별 없는 건강권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건강권이란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고 선언적이라 실제로 구체화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건강권 중 일부인
공평한 의료접근성의 실현조차 건강보험 역사가 40년이 넘은 현재에도 요원하다. 하물며, 모든 시민을 위한 건강 유지 증진 정책은 항상 부수적이고
우선순위에서 떨어진다. 우리나라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는 해방 이후 민간에 맡겨져 거의 방치되어왔고, 건강보험 등 각종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비효율과 상업성으로 인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의료 공공성이 매우 취약한 범주에 속한다.
(179-180)
1800년까지는 누구나 이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선거대의제는 민주주의의 정반대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에 그리스에서
전래된 용어로 이름을 붙인다면 올바른 명칭은 ‘선거 과두정’이
될 것이며, 그 뜻은 “우리가 우리를 통치하도록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통치”이다. 선거에 나온 후보자들이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서 ‘민주주의자’를 자처한다는 발상이 생겨난
것은 1800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였다. 그 뒤로는
이 잘못된 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혁명가, 신층 중간계층, 지식인, 학자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1920년경에 이르면 그것은 사회 일반에 수용되기에 이른다. 즉
선거대의제가 민주주의라고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182~184)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
민주주의는 가장 공평하다. 즉 법 앞에 평등하다. 공직자는 추첨으로 임명되고, 권력에는 책임이 지워지고, 모든 질문은 열린 토론에 붙여진다.(<역사>, 3권 80장 6절)
플라톤(기원전 428~348)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승리하여, 몇 사람은 처형되고 또 몇 사람은
추방되고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통치권력이 동등하게 분배될 때 민주주의가 성립된다.(<국가>, 8권)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추첨으로 공직을 임명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과두정치였다.(<정치학> 4권, 1294a)
키케로(기원전 104~43)
통치권이 한 사람에게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군주제라고 부른다. 특정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통치권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귀족정이라고 부른다. 통치권이 민중의 손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국가론>, 1권, 41권, 42권)
엘리엇(1490~1546)
도시와 자치령은 전 시민의 합의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믿을 만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 자신이 보유한 미덕과 지혜로써 공공선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가장 뛰어난 시민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일이 흔했다. 이런 통치방식은 그리스어로 ‘데모크라티아(Democratia)’, 라틴어로 ‘포퓰라리스 포텐티아(Popularis Potentia)’, 영어로 ‘평민에 의한 통치(rule of the commonalty)’라고 불렸다.(<위정자론>)
알투시우스(1557~1638)
민주주의는 그 본성상 자유와 평등한 존경을 요구한다. 평등한 존경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에 존재한다. 시민들은 번갈아가며 통치하고 복종한다.
모두가 똑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사적 삶과 공적 삶이 교차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 문제에 대해서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개인은 언제나 순종한다.(<정치학>, 39, 61>
홉스(1588~1679)
통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군주제는 단 한 명이 통치권을 갖는
경우이고, 데모크라시는 민회에 통치권이 있는 경우이며, 귀족정은
임명되었든 선출되었든 아무튼 나머지 사람들과 구별되는 일부 특정 사람들로 구성된 기관이 통치권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리바이어던>)
몽테스키외(1689~1755)
공화국에서 민중이 주권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민주주의다. …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방식이다.(<법의 정신>, 2권2장)
루소(1712~1778)
“추첨의 의한 선발은 그 본성이 민주적이다”라고 몽테스키외는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 그러나 나는 이미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상(理想)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선거의 추첨을 결합할 때, 군사직위처럼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한 자리는 선거를 통해 임명해야 한다. 추첨은
사법관 같은 경우에 적합하다. 양식이 있고 정의롭고 정직한 것으로 충분히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경우
말이다. 잘 구성된 국가에서는 이러한 자질은 모든 시민에게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사회계약론>)
시에예스(1748~1836)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공무원을 직접 임명한다. 우리의
계획에서는 시민들은 대체로 직접 대리자를 선발한다. 따라서 입법행위는 민주적이지 않다. 그것은 대표제가 된다.
버크(1729~1797)
[‘민주주의’를 묘사하면서] 여기서는 모든 공무 혹은 공무 전반을 민중이 직접 개인적으로 처리했고, 법은
민중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공무원이 직무에 소홀한 점이 있었을 때에는 당사자에게(만) 그 책임을 물었다. (OO경에게
쓴 편지)
메디슨(1751~1836)
민주주의에서 민중은 모여서 직접 통치한다. 공화국에서 민중은 대표자들과
대리인들을 소집하여 통치를 위탁한다.
(228)
이제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이라는 구호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분권은 권한을 단순히 넘겨받은 것 이상의 자치에 근접해야 하고, 균형발전은
기업과 기관 이전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런 구호는 이제 폐기됨이 옳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하면 세상이, 삶의 질이 더 나아지나. 그것을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지향이 없다. 발전이라는 것이
서울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함인가. 도시화되는 것을 뜻하는가. 서울의
복제품을 여기저기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제 균형발전이라는 용어는 “순환과
공생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자”는 구체적인 언어로, 지방분권이라는
용어는 “자치와 자급의 지역공동체를 만들자”는 말로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성장과 발전 대신, 순환과
공생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잘되는 놈만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의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부분을 착취해 성장하고, 경쟁과 도태로 거르는 방식이 아닌 협동과 연대의 방식으로 가장 기본적인 지역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행정체계와 시장체계에 예속되지 않고 관계가 이들을 제어하고 부릴 수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