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리라이팅 클래식 12
권용선 지음 / 그린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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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거대한 상점 아케이드에 문화와 정치, 역사를 넣어두고 분석하는 벤야민의 시선은 현대의 우리가 간과하고 있거나 애써 모른척 했던 자본시대의 어두운 자화상을 날 것 그대로 보여 준다. 유대인인 벤야민은 '부정의 방식으로밖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19p)'임으로 인해 어쩌면 사회를 부정의 방식으로 보여 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정에는 긍정이 깊이 도사리고 있으니 유태인인 자신을 부정하면서 만들어낸 긍정일 것이다. 위대한 학식을 가졌지만 학자는 아니었고, 신학에 매력을 느꼈지만 신학자는 아니었으며, 천부적인 문장 실력을 지녔지만 작가는 아니었고, 프루스트를 최초로 번역했지만 번역가는 아니었으며 시인도, 철학자도 아니었고, 그는 모든 것이 아니었기에 그 모든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밖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수 없는 벤야민은 그 특유의 아포리즘 글쓰기를 만들어낸다. 그 모든 것이 아니었으나 그 모든 것이었고, 그 모든 것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아니었던 위대한 사람, 그래서 벤야민은 우리 시대의 산책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 모든 것이었으되 그 모든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자의 삶을 살았으나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 아니라 앉아 있는 유목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케이드에 유목민의 밥상을 차린다. 벤야민은 서로의 연결고리가 없는 에세이적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그에게  알레고리는 '세계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독해하는 방식(96p)' 이며, '다르게 말하기'의 방식이다. '알레고리는 하나의 의미로 결박되기를 거부하며 다양한 의미를 향해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의미를 형성하며 진정으로 대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암호'라는 점에서 상징과 다르지는 않지만 '유일한 의미로 고정된 것을 목표로 하는 표현의 기술'인 상징과 알레고리는 질적으로 다르다.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유목민인 벤야민은 고정된 것을 지향하는 상징보다는 끊임없이 의미가 미끄러지는 알레고리적 글쓰기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벤야민은 풀어야할 삶의 수수께끼로 놓여 있는 알레고리적 사유를 통해 상징의 권위에 균열을 내면서 진보적 경향을 드러내는 고도의 정치적 기술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아케이드를 통해 자본의 정수를 보여 주고자 한다. 마침 탄생한 아케이드적 건축을 통해 알레고리적 사유를 한다. '건축가 각각의 재로를 서로 연결하고 위치 지음으로써 새로운 효과를 기대했듯이, 역사가(혹은 철학자)는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원래의 자리에서 떼어 낸 문장들을 모자이크이 파편처럼 새롭게 재배치하고 인용하는 문학적 몽타주를 통해 강력한 현실성을 불러 일으키고자'했던 것이다. 현대예술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면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방식,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추구하는 글쓰기의 방식이다.

물론 그 사유는 문학적 글쓰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 자본, 미디어, 복제기술, 역사 등으로 폭넓게 펼쳐지는 사유는 고정된 것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뇌에 전복적 사로를 불러 일으킨다. 예술과 노동, 자본, 미디어, 복제기술, 역사등은 서로에게 낯설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로 연결되면서 또 흩어진다. 벤야민은 기본적으로 중앙을 지향하지 않으므로 연결은 언제나 무너져야 하며, 무너짐은 또 연결되어야 한다.


아케이드, 온갖 물건이 진열되고 기후로부터 소외된 현대적인 시장, 그 아케이드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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