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직업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
박정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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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도 없이 쓰네, 누군들 이 세계의 음악, 고요한 뒤척임의 순서를 알 수 있으랴' 라고 박정대는 노래하듯이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순서도 없이 중얼거림으로, 때로는 노래하듯이 쓰여 있다. 시집이 배달되어 오고 몇 장을 뒤적이다가 또 한참을 책상 위에 얹혀 있었다.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 놓기에는 아쉽고 뭔가 미진한데, 그렇다고 읽자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맥락이 잡혀 오지 않아서 그냥 쌓아 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거짓말처럼 술술 읽혔다. 아마도 내 의식이 박정대라는 시인의 의식에 가닿은 탓이리라.

 

'형식은 내용을 무시하고 내용은 형식에 의해 집결할 것이다'. 그렇다! 형식은 내용을 무시하지만 그 내용은 형식에 의해 모여들 것이다. 그의 시가 그렇다. 주절주절, 어떤 때는 맥락도 없이 글들은 집결해 있지만 그것은 시라는 형식으로 모여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것들은 모두 시다. 이것을 왜 '시'라는 형식으로 읽어야 할까 몇번이나 회의가 들었다. 형식도 없이 맥락도 없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형식은 있었고 내용도 있었다. 나는 단지 그의 노래를 따라가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문득, 시가 읽혔다. 문장이 다가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박정대의 마음을 알 것 같았고, 그가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왜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지 그 절절함이 읽혔다. '형식의 불안'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카치아 게헤이루의 파두를 들으며 형식의 불안에 대해 생각하네, 고통의 파두, 파두를 듣는 고통, 고장난 세계의 허리로부터 오는 요통, 낮과 밤의 뒤바뀜'이라고 노래하듯이 그도 자기 시의 형식의 불안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장난 세계처럼 뒤죽박죽으로 오는 형식, 그러나 그는 그 뒤죽박죽인 형식에 뒤죽박죽인 글들을 담아 놓는다. 그것이 문득, 어느날 갑자기, 아! 이 시들, 참 좋구나!하고 다가왔던 것이다.

 

왜 우리는 고정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만 시라고 말해야 하는가. 왜 시는 함축적이고 간결하며 세련되어야 한다고 말할까. 세련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시는 전혀 함축적이지도, 간결하지도 않지만 세련되어 있다. 아주 노련한 시인의 냄새가 난다. '진부라는 곳'이라는 제목의 시가 참 좋았다. 그러나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컴퓨터의 한글 파일로 작업하다 보면 나오는 오컴 문자라는 것으로 시를 써놓고 마치 주석을 달듯이 우리 말로 설명을 달아 놓았다. 오컴 문자야 나는 해독불가이고 아마 시인 그도 해독 불가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해독불가의 문자로 중얼거리고 싶을 때도 있다. 마치 내가 욕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자동차 문을 닫고 그 속에서 개새끼 소새끼 하듯이 그도 세상의 문을 잠그고 혼자서 개새끼 소새끼는 하지 않고 '겨울 내내 진부에서 뒹굴었네......먼저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후에 본질적인 고요가 왔네'라고 오컴 문자로 먼저 중얼거리다가 다시 세상의 너를 향해 한글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형식의 평화라는 것, 오컴 문자로 그림을 그리든말든 마음대로 뒤죽박죽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한글을 쓰는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형식을 만들어 놓고 '먼저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형식의 평화를 만들어 놓고 나니 비로소 본질적인 고요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래한다. '겨울 내내 진부를 뒹굴었네......나 이제 백야를 꿈꾸네 한 계절을 진부에서 뒹굴었으니 내가 꿈꾸는 백야엔 눈발 같은 사랑이 내리고 사랑 같은 눈발이 내리고 있으리'라고.

 

그는 본질적으로 마오이스트, 공산주의자이다. '마오이스트 거리의 쓸쓸한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시가 아니더라도 시 곳곳에 스며 있는 마오이스트에 대한 쓸쓸한 그리움이 넘쳐 난다. 가장 낮은 몸으로 자유를 찾아 가는 몸, '낙타가 사막의 배라고요, 낙타는 사막의 시예요, 온몸으로 온 발바닥으로 이번 생을 횡단하는 가장 뜨거운 시'가 나에게는 마오이스트로 읽힌다. 마오는 아마도 온 몸으로 사막을 횡단하고 싶어서 혁명을 일으켰을 것이고, '캄캄한 피부 속으로 뜨거운 피가 흘러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노을로 가닿은 이 느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도 그렇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처럼.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후에 본질적인 고요'를 찾은 것처럼 이 시집에서는 형식을 찾을 필요도 본질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저 시인의 중얼거림을 따라 가면 된다. 그 중얼거림이 벅차면 시집을 덮어 버리면 그만이다.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산다고 죽어라고 모두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박정대의 중얼거림이 생각나면 다시 펴 보면 될 일,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잊은들 세상의 고요가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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