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언젠가는 우리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남자를 사랑하는 걸 그만두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으로 본 장을 끝맺으려 한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여자를, 상호 간에 힘이 되는 관계를 우리와 함께하기로 선택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그 사랑으로 아주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이 자기 삶을 돌이켜 생각해보고, 생각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서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면 권력이 공평히 분배되는 가모장적 체계라는 비전이 성큼 현실로 다가오리라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은 이렇게 여성적이지 않은 존재가 되어볼까 고민하는 것조차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계속 두려움 속에 머물 필요는 없다. 심리 상담가라면 특정 문제에 느끼는 기분을 파헤치다 보면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조언할 것이다.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왜 두려움을 느끼는지를 알고 나면 별다른 노력 없이도 가야 할 길이 분명해진다. 만약 여자들이 여성성을 포기하는 게 왜 두려운지 그 공포의 근원을 짚어본다면, 우리의 여성성을 유지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조정을 가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성성을 포기해야 할지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더 나아가 공포로서 여자의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 여러 압력이 더는 우리에게 힘을 발휘할 수 없 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 삶의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절대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와 있어도 (혹은 남자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는 여자의 여성성, 남자 사랑, 이성애자 정체성이 생존 반응에 불과한지 아닌지 속단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여성적 정체성은 남자가 여자를 공포로 몰아넣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여자의 정체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자면 여자의 여성성, 남자 사랑, 그리고 이성애는 억압에 대한 개인적인 해결책이 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마어마한 수의 여자들이 이런 자구책을 채택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구책을 활용하는 대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쳐 억압을 종식할 수는 없을까? 집단적 해결책은 어떤 형태를 떨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국정 운영에 우리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엘리너 스밀 Eleanor Smeal 처럼 여자 정치인 당선에 힘써야 할까? 소니아 존슨 Sonia Johnson 의 충고에 따라 우리 마음속의 가부장제(혹은 내면회된 억압)에 퇴마 의식을 치르며 가부장제에 저항해 나가야 할까?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시카 벤자민 Jessica Benjamin, 낸시 초더 로 Nancy Chodorow, 도로시 디너스틴 Dorothy Dinnerstein 등 최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프로이트의 뒤를 따라 당연하게만 생각되는 여성 심리의 원인을 찾고자 했지만, 그 결론은 프로이트와는 달랐다. 여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사랑과 이성애에 접근하는 프로이트의 관점은 이렇다. 여자는 보통 여성 인물(어머니)에게 유대감을 느끼며 자라나며, 성장 과정에서 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성애와 남자 사랑이 생긴다는 건 여자가 어느 순간 남성 인물에게로 애정을 전환하게 된다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전환이 남근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여자의 여성성, 남자 사랑, 이성애가 어린 시절 본인에게는(그리고 다른 여자들에게는)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여자가 이를 깨닫고 나서 적극적인 성적 추구를 단념하고, 애정을 (어머니가 아닌) 남자에게로 돌리고, 간접적으로 남근을 획득하기 위해 아이(특히 아들)를 낳기를 소망하게 된다는 게 프로이트의 시각이었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재해석해 여자들이 갈구하는 것은 남근이 아니라 남근을 가진 자들의 권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예로는 허먼과 허시먼의 논문3을 보라.)
필자도 앞선 페미니스트 학자들처럼 여남 권력 차이가 여자의 특징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고 보지만, 이들과는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바로 남자가 가하는 생존 위협에 대한 여자의 반응으로서 여성성, 남자 사랑, 이성애를 바라보는 것이다. 즉 나는 여자의 여성성, 남자 사랑, 그리고 이성애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도 보지 않고, 피할 수 없는 것으로도 보지 않는다. 사회적 조건이 낳은 결과로 본다. 세 특징 모두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신체적, 정신적) 폭력이 성적인 존재로서의 여자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생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항상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으로만 살아온 걸까. 임계점은 한계가 아니라 꽃망울이 터지는 환희의 순간일 수도 있는데. 피려는 마음을 모른 척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나는 눈금자를 0에 맞추고 나에게 ‘저금‘되어 있던 말들을 하나둘 떠올려보았다. 희연아, 환히 지내라. 희연아, 너는 너를 좀 더 사랑해야 하겠다. 겨울 창문에 붙어 있는 마른 나뭇잎 같은 말. 성냥갑에 딱 하나 남은 성냥 같은 말.
공중으로 날아오른 풍선은 터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날아오른 풍선은, 날아가는 시간만큼 다른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대기권에서 바라본 지상의 모 습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는 오직 풍선만이 알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지나온 시간을 부정하지 않게 된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그러니 성냥 같은 말들을 쥐고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내 안에서 내가 피어나는 날 초에 불을 붙일 수 있게. 축하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무구한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23-04-1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인용하신 구절들 다 좋은데요!!!

DYDADDY 2023-04-19 15:09   좋아요 1 | URL
남초직장이라 <여자는 인질이다>를 읽을 수 없을 때 읽고 있는 책이에요. 가끔 옆에서 힐끗 쳐다보시는 분들이 있다보니 과격한 문구가 나오는 책은 못 읽을 때가 있어요. ^^;;; (그래서 밑줄 긋기도 못하고 있지만요. ㅋㅋㅋㅋㅋㅋ) 프사가.. 목표라고 하셨던 사진 같아요. 건강한 등이 목표이시니만큼 건강하게 관리하시기를 바라요. ^^ (단백질이 지방보다 비중이 높아서 체중은 그대로라도 입던 옷이 헐렁해질 수 있어요. ^^)
 
[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예술은 재해석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마틴 에덴>도 읽은 사람의 수만큼의 해석과 감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활활 타고 남은 재같은 작가를, 어떤 사람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경멸을,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에 침식된 사람들에 대한 조소를, 어떤 사람은 그당시 유행했던 사상에 대한 일면을…

마틴 에덴이 각성하기 시작한 것은 그저 우연과의 조우였을 뿐이다. 그가 아서를 돕지 않았다면 아니 그 상황이 아닌 길에서 스쳐지나갔다면, 루스를 만나지 않았거나 아니 루스의 품성이 다른 부르주아와 같았다면 이 소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의 우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특정 조건에서 특정 사건과 특정한 사람을 만날 때. 하지만 아무리 우연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상승하더라도 시대의 조건은 뛰어넘기 힘들고 설령 뛰어넘는다고 하더라도 그 대가는 만만치 않다.

루스의 사랑과 마틴의 사랑은 같은 것이었을까. 루스는 사랑을 알게 해 준 마틴을 곁에 붙잡아두기 위해 작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를 원했고, 마틴은 자신의 성공을 루스와 나누고 싶어했기에 어쩌면 그 둘은 결국 헤어져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루스가 가난을 관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틴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좀더 강했더라면 결말은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마틴도 결국 자신이 사랑한 것은 루스가 아닌 루스로 체현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조금 일찍 깨달았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루스를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랑은 재해석이 불가능한 지점이기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결과는 늘 같다. 계급이나 페르소나, 아비투스 뒤에 숨겨진 일그러졌을 수도 있는 얼굴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틴이 마지막으로 본 뇌 속의 등대같은 하얀 빛은 아름다움에 대해 쓰고자 하는 열망이 아닐까 싶다. 많은 대가를 치루고 결국 닿았지만 그 빛에 타버리고 ‘알기를 멈추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3-04-17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이 책이 인기인 것 같아요. 이웃 서재에서도 자주 보이더라구요.
잘읽었습니다.DYDADDY님,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DYDADDY 2023-04-18 01:05   좋아요 1 | URL
잭 런던이라는 작가가 1909년에 쓴 자전적 소설이라고 합니다. 불타는 작가의 열정과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열정의 소진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북친분들의 피드에 자주 등장하여 도서관 검색을 했는데 마침 책이 있어 대출했어요. 요즘 래디컬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위축이 되어 잠깐 쉬어가자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어요.
안온한 밤 되시고 쾌유하시기를 바라요.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