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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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편지란 평소에 말로는 하기 힘들었던 일들, 일단 풀어놓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릴 오래 참아왔던 일들, 혹은 수줍음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속 깊은 정, 사랑.
 쓰다가 지우고 적어가다 고치기를 수 없이 반복하며 고심하고 고심해 건넬 내 마음이 담긴 몇 장의 종이.가 아닌가 싶다.

 

카프카가 그랬을까?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았던지, 얼마나 오래 쌓아두고 덮어두었던 기억들을 들춰냈던지 편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작품이라고는 '변신' 밖에 읽어본 적 없는 카프카라는 하나의 존재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편지였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전에 '변신'을 읽으며 느꼈던 가족간의 깊은 골, 이해할 수 없던 그 매정함과 단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느낀 아버지를 한마디로 표현해보면, 자기 중심적인 나라는 알맹이에 근엄함 엄격함으로 된 갑주를 두르고 언행 불일치의 칼을 휘두르며 애정을 '행사'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아끼면 다른 사람도 그 마음을 반드시 알아채 줄 것이라 믿는다.
 그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의 한 명이었던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애정엔 너무나 접점이 없었다.
그것이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여길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 돌이키려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된 슬픈 현실만을 마주할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카프카는 아버지를 '거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고, 항상 두려움으로 아버지에 대한 공포만을 키워갔던 것 같다.
 그것이 깊은 '트라우마'가 되어 성장하면서도 기를 펼 수 없게 되었고 늘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아버지의 한 마디(그것이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어서 불안했고 부정적이면 그런 반응이 당연했기에 불안해했다)에 너무나 연연해 했다.

아버지가 두렵고 무서웠지만 아버지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는 영원히 홀로 설 수 없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뿜어내는 위엄과 공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노예였다.
 거기에 그의 몸은 나약했고, 많은 병마에 시달렸다. 그것은 '최악'의 조건의 다름 아니었다.

 

편지 속에서 카프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 가슴 속엔 아예 처음부터 분노의 마음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바로 그 일을 빌미로 잡게 되어 가슴 속의 분노를 터뜨리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지요.'
또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를 보는 기분을 '교수형 준비를 하나하나 같이 지켜봐야하는 상황에 처해져 마지막으로 올가미가 그의 머리 앞에 내려지고 난 순간에야 자신의 사면 소식을 듣게되는 사형수'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니 그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던가.

 

카프카의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무엇인가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그렇듯 그 역시 자신감이 강하고 스스로의 결정과 방식에 대한 믿음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재벌 2세가 그렇듯 카프카는 상대적으로 주눅들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카프카에게 있어 아버지는 늘 무섭고 어렵고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섭고 어렵게 느꼈을 것은 위에 적어둔 것과 같은 것들이었고 알 수 없었던 것은 한결같지 않은 아버지의 행동이었으리라.
 자식들에게는 욕을 하지마라, 음식을 흘리며 먹지말라며 금지 시켜놓고서는 자신은 수시로 욕설을 내뱉고 식탁에서 그의 자리가 가장 더러웠으며,  가게와 가정에서 멀어질 수록 관대하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사려깊고 동정적인 되곤 했던 모습에 어린 카프카가 얼마나 큰 혼란과 원망을 느꼈을지.

 

언젠가 티브이에서 공익 광고로 "집 안과 집 밖에서 당신은 얼마나 다른 사람입니까?"하고 묻는 것을 보았다.
 나 또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했다.

카프카에게 있어 글쓰기란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 편지 역시 그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원하고 바랬던 것은 오직 정신적 무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리라. 아버지의 크나큰 거인의 그늘을 벗어나는 것, 그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정신적 무능력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세 번에 걸친 약혼에도, 그녀들을 정말 사랑했음에도 그는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남는다.
 
카프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관계의 원만함에는 전적으로 동경했으나 그 동경의 크기를 넘어서는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결혼을 통해 아버지와 대등한 존재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겪었던 갈등을 자신이 자신의 자식과 겪게 될까 두려웠다.
 결국 이것이 '트라우마'가 카프카에게 내린 최종 선고가 되고 말았는지 그는 혼자 지내다 마흔 한살이 되기 얼마 전 병으로 죽고 만다.

 

이것이 카프카의 삶의 모든 기록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아버지에 대한 의도적 결별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와 대등한 위치에 서기 위해 선택했던 결혼 생활을 위해서 아버지가 가진 모든 '능력'을 자신 또한 갖추어야 함을 깨닫고 난 후 무너져버린 삶.
 그에겐 오직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벗어나기 위해 써내려가는 글이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새해 명절을 맞아 가족이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야 할 날을 앞두고 읽기에 좋았던 것인지 혹은 나빴던 것인지 애매한 기분이다.


 다만 마음 깊이 새겨둘 일이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어떤 행동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음을.

 

그의 삶과 그의 작품들에 짧은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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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7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안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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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으며 이 책이 떠올라 다시 읽어봤다.
 카프카의 창작물들은 무척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떠올리며 읽으니 훨씬 이해가 수월했다.

 

변신은 매일같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듯 죽어라 일하는 외판원 그레고르가 악몽에서 깨어나던 어느날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챈다.
 이런, 배 쪽에 무척이나 낯선 수 많은 다리와 조그만 점들이 있는 흉측한 벌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악몽같은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그는 제 시간에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을 먼저 걱정하고 당황할 만큼 자신보다 자신의 일과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짐승이나 다름 없는 흉측한 벌레가 되어버리면서 가족들과 겪는 갈등과 그 갈등에서 느끼는 그레고르의 절망과 슬픔을 지나치게 매정한 가족들의 태도를 통해 극대화 하고있는 작품이다.

 그렇게 자신을 의지하고 위해주던 가족들이 자신의 '변신'을 마주하는 모습은 너무 상반되어 있어 서글프기까지 하다.


처음엔 변해버린 그를 걱정하고 위해주던 가족들도(비록 막상 마주하면 놀라고 흥분해서 그에게 더 깊은 상심을 안겨주었지만) 점차 그에게 무관심해져 간다.
 그나마 그와 가족 간의 마지막 연결 고리 역할을 하던 여동생 그레테마저 그를 외면하고 거부하게 되었던 운명의 날, 그는 홀로 서글픈 최후를 맞는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 또한 그레고르에겐 무척이나 사납고 권위적이며 거인과도 같이 느껴지는 존재다.
 그레고르를 극도록 쇠약하게 만들었던 치명적 상처(등에 박힌 사과) 또한 아버지가 낸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존재이며 변해버린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보다 두려움과 절망을 더 크게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와 소통하려했던 여동생 또한 운명의 날에 더 이상 그가 오빠나 아들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그렇게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레고르는 죽고 완벽하게 처리된다.

 없던 것처럼.

 

그의 죽음 후 남은 가족은 빠르게 본래의 상태로 회복해가고 싱싱한 팔 다리를 가진 딸의 성장을 목격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뭔가 카프카의 삶을 빗대어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었다.
 
이 책에 덧붙여 몇 편의 단편들이 있었다.
 첫 번째로 유형지에서.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난해한 소설이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탐험가가 어떤 나라의 형 집행을 입회해달라는 어느 지역 사령관의 초대를 받고 유형지를 찾는다.
 그곳에는 특이한 모양의 형 집행기가 있다.
 그 형 집행기는 죄수의 몸에 자동으로 죄명을 새기는 장치로,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12시간 이상 걸려서 자동으로 서서히 사람을 죽인다.
 특징적인 것은 형 집행기가 작동한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형을 당하는 죄수는 온순해지고 그 눈빛에 지성을 품게 되고 그것이 전신으로 퍼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살아서는 괴롭고 추한 인간의 모습을 죽어서는 남기지 않는 신기한 사형기구인 셈이다.


그 장치는 전 사령관의 발명품으로 한 때는 인기가 있었지만 현재에 이르러는 '장교'만이 이 장치를 사용한 형의 집행에 찬성하고 있을 뿐인 구시대의 유물이다.

 

현재의 사령관이 탐험가를 형 집행의 입회를 부탁한 이유가 그 장치의 폐기를 위한 것임을 예상한 '장교'는 탐험가에게 이 장치를 통한 형 집행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탐험가는 그것을 거절하고 '장교'는 본래 형을 집행할 예정이던 죄수를 석방하고 스스로 형틀에 눕는다.
 그런데 최후의 옹호자가 자신의 위에 누웠기 때문일까?
작동을 시작한 형틀은 곧 스스로 해체되어가면서 최후의 옹호자인 '장교'도 순식간에 함께 해체해 버린다.


그 결과 형틀을 통해 죽음에 이른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죽게 된다.
 그가 이 형틀을 통한 죽음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지성어린 눈빛도 구원의 그림자도 없는 깊은 확신만을 간직한 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탐험가가 형틀의 발명자인 노 사령관의 무덤을 찾는 장면과 마지막 형 집행을 면한 죄수와 함께 있던 사명이 떠나는 그를 향해 달려오는 장면까지를 적고 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두 번째로 관찰.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 단락적이고 접점을 찾기 힘들고 이야기간의 거리감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마치 어느날 어떤 상태, 혹은 기분을 되는대로 메모지에 휘갈겨 둔 것을 옮겨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카프카 자신의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그의 외로움과, 절망, 소심함과 안심 따위의 감정이 담긴 기억의 한 페이지일 것이다.

 

세 번째로 선고.
 게오르크 페테르부르크의 친구 약혼녀 아버지 등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친구에게 알려야 한다는 약혼녀의 말에 그는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적어서 아버지의 방을 찾는다.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에게서 익사형을 선고 받는다.
 익사형을 선고하고 아버지는 침대로 쓰러지고 그는 강의 다리 난간을 뛰어넘어 물 속으로 뛰어든다.

 짧은 이야기이고 이제 생각하기도 조금 지쳐서 왜 그랬는지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저 이해해주시길.

결국 이 이야기도 아버지와 카프카의 이야기에 다름 아닌 형태를 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갈등을 표현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에게 어느정도 통쾌한 복수를 했다고 느꼈을까?
 그렇지도 못했을 것 같다.

그들은 결국 누구도 치유받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가 상처 주고 받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 못했으리라.


 그것이 프란츠 카프카가 말하곤 하는 카프카적 기질이나 뢰비적 기질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 묘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오묘하고 난해한 카프카의 글을 이렇게 읽고 감상을 적어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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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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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사물, 현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책이라고 해야겠다.

 

철학, 혹은 철학자라고 하면 어딘가 무척이나 난해하고 복잡하며 아주 높은 경지에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막연한 아득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철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고뇌들에 대한 사색과 사유의 과정과 결과이며, 철학자들은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존재였다고 하면 이상한 표현이 될까?

 

언젠가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느꼈던 아득한 절망, 그 절망에 무척이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제목은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하고 남을 힘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의 철학자로 내가 가장 즐겨읽고, 좋아하며, 어떤 의미로 존경하게 된 이가 바로 알랭 드 보통이다.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내가 즐겨 읽을 수 있을만큼 쉽고 평이하게 철학과 문학을 논하는 글을 써내는 능력이 증명하듯 대단히 높다.
 
학문과 출판의 올바른 현 위치를 안다고하기엔 나의 수준이 아직 너무나 편협하고, 부족함을 감수하고서도 이야기하자면 인문이 하나의 화두로 떠오르며 요즘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분야가 철학이 아닌가한다.
 
여기저기서 과거 철학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화두들과,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계, 분쟁, 몰이해를 아우르는 갈등들, 그리고 미래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닥쳐올 난관을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한 분투가 시작된 것을 본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유연하고 무던히 반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터무니없게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급작스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한심스럽다. 그 문제가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농담 중에 이런 농담이 있지 않던가?

'집에 불이 났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서 119에 연락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들이 묻는다. 119가 몇번이지요?'
 지금 훗하고 콧방귀 뀐 당신, 당신이 정말 자다깨서 화재를 인식했을 때도 그렇게 코웃음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내가 지금의 깜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의 모습은 '재해대처요령'의 숙지와 닮아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발생가능한 사건들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든, 그러한 사실에 절망하든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린 선택의 문제다.

 

아무래도 중반부 몽테뉴와 쇼펜하우어에서 "이게 뭔 소리지?"하는 의문의 종이 지나치게 쟁쟁거리며 머릿속을 울렸던가 보다.
 내가 언제부터 철학을 했다고 철학을 논하고 있으니. 에헴.

 

지금까지의 말을 결론 짓자면 철학은 단순하고 막연한 사고와 사유의 재료도,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삶과 아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으며, 무척이나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책 이야기를 해보자.
 추측컨데 이 책의 원제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베르테르가 느꼈을 절망과 슬픔을 위로 해 줄 수 있는 내용들을 묶어내고 있기에 이러한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싶다.

 

본문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에 어울리는 철학자들이 남긴 사유물과 철학자들의 삶을 뼈대로해서 알랭 드 보통의 해석이라는 살을 붙여놓은 형식이다.
 각 장의 주제는 1장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소크라테스, 2장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에피쿠로스, 3장 좌절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세네카,
 4장 부적절한 존재를 위하여 철학자 몽테뉴, 5장 상심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쇼펜하우어, 6장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철학자 니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왜 베르테르가 기쁨의 위로를 받았을지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크라테스와 세네카는 사형 당했다. 에피쿠로스는 오해 받았고,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외면당했으며 몽테뉴는 별종이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예측가능한 절망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은 죽음 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사상이 꺽이지 않으며 의연하게 죽음과 마주하는 모습으로 되려 주위 사람의 슬픔을 무색하게하는 당당함은 어디서 왔을까.
 모두가 감추고 싶어하는 인간 존재의 부적절함을 되려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 자신의 모든 것을 인정하려 했던 별종은 어떤 시선을 감당해야 했을까
 온갖 난잡함으로 오해 받았던 쾌락에 솔직했을 뿐인 사람과 어쩌면 단지 외로웠던 것일 뿐인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정상에 올랐던 것일까?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지적 갈증이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고심하고 고뇌했으며 극복하고자했던 갈등들은 내게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무지라는 벽에 막혀 잠재워졌을 뿐이다.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의 부재.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뼈아픈 현실의 이름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자고 소박한 목적을 두고 읽기 시작했지만 그 이상을 이해하고자하는 욕망은 전혀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 후 내가 소크라테스나 세네카, 에피쿠로스,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를 읽게 된다면 그것은 지적 욕망의 발현, 욕심을 이루고자하는 목적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모르는 것은 낯설다.
 하지만 아는 것이 늘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 느낌이 결코 싫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이름 지으련다.

 

이 책은 메모할 것이 많았던 책이다.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단서를 적거나, 구절을 적어두거나.
 하지만 그 어떤 메모도 이 책을 설명하는 말로 쓰기엔 부족해 보인다.

 

고대의 철학자가 흔히 과학자를 겸할 수 있었던 것이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한 나름의 원리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거나 골치 아플 것 없는 삶을 사는 짐승을 위대한 철학자 몽테뉴가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거나, 부유했지만 지독하게 염세적이었던 쇼펜하우어의 생애나,  어떤 철학자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가 어느 순간 경멸하게 되는 과정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나,  행복과 불행이 둘이 함께 성장하거나 둘이 함께 성장을 멈추고 시시한 존재로 남게되는 자매, 혹은 쌍둥이와 같다거나 하는 메모들이 무슨 소용일까.

 

이해가 가면서도 난해하고, 난해해하면서도 팽개쳐버리지는 못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철학적인 책이 아닐까?

 

고매한 철학자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사상과 철학의 흐름과 목적이 결국은 우리와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철학에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희석해보고자 했던 의도는 아니었을까라며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우리의 삶은 매우 바쁘고 힘겹고 고된 일상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을 들어 정상을 바라보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좋아질 수도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대비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문제가 무척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상황에 발생하더라도 대체로 차분하고 의연히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무방비라고 이름 짓곤하는 상태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것이 사실이다.
 
철학은 연습이지 싶다. 다른 이름으로는 훈련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을 원망하며 괴로워하기보다 그 불행을 넘어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잠재력을 기르는데 '철학'을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른지.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130쪽

 

비가 내리면 당혹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소나기와 친숙해지면 비가 내려도 분노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132쪽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자유로이 만들어갈 수 있는 상황과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지혜. 170쪽

 

이성이 인간에게 자리 잡은 것은 우리를 고문하가 위해서라고 감히 결론 내려도 괜찮을까? 만약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된 결과, 그것을 얻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르는 평정과 안일을 잃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지식이란 것이 우리의 처지를 피론의 돼지보다 더 열악하게 만든다면 지식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92쪽

 

자신의 마을을 떠나오자마자 그들은 마치 물을 떠난 고기같이 군다. 어디를 가나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고 낯선 것들을 저주한다. 그러다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그 만남을 축하한다. 까다롭고 과도한 신중함으로, 그들은 자신을 망토 속에 푹 파묻고는 미지의 나라와 접촉하지 못하게끔 단속하며 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212쪽

 

몽테뉴는 흥미로운 지혜란 어느 인생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제아무리 소박하다 하더라도 옛날의 그 많은 책에서보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도출할 수 있다. 264쪽

 

모든 삶은 다 힘겹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을 완성된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려있다. 모든 고통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희미한 신호다. 353쪽

 

우리 대부분은 곤경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 어린 싹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흔히들 고민이나 시기하는 마음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합당한 것들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감정에 봉착하면 그것들을 감정의 잡초로 여기고 제거해 버린다. 359쪽

 

그는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 목표에는 닿지 못했다 해도 그는 자신이 한때 갈구했던 그 대상을 결코 저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에 고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비치는 것들을 끝까지 소중하게 여겼다. 말하자면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 어떤 존재가 되고자 애썼던 것이다.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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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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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으음, 이거 어떻게 첫마디를 꺼낼까 꽤 고심하게 되는 아주 '생소한' 장르의 책.

 오늘 '볼 일'보러 갔던 인천에서 시간이 좀 남기에 도서관에 들렀었다.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니다가 문득, "아, '그거' 찾아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지요.

 

그래서 막연히~ 둘레둘레 둘러보다 생각난 이름이 '히가시가와 도쿠야'.

 뭐 부담없다길래. 쉽게 읽힐 것 같은 예감에 골라봤습니다.

 

 가방을 올려놓고 책을 세우고 의자를 당겨 앉았습니다. 그리곤, 앉은 자리서 한 시간여 만에 후딱 읽어치웠지요. 

 좀 더 정확히는 약 70분 정도?

 아마 '일미'라고 하는 장르의 매력의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잘 읽힌다.'

 잘 읽히지 않는 책도 열심히 읽으려 노력하는 착한 독자인 저는(크흐흐) 물론 잘 읽히는 책만 찾아다니지 않겠지만, 잘 읽히지 않는  책에 지쳤을 때 한번씩 꺼내보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이 장르의 모든 책들이 오늘 읽은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와 같은 형태, 느낌으로 제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소설의 장점은 일단 짧고 단순하고 명료한 사건의 흐름(미묘~하고 복잡~했으면 난감했겠죠.)일 것 같아요.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혹시 아직 안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니까 하지 말기로 하고.

 제가 범인을 눈치 챈건 등장부터 시큰둥~하니 사건 해결에 무관심해 보이던 스나가와 경부가 추리를 시작하고 조금 있다가 였습니다.

 물론, 트릭의 이름이나 형태는 참 코난을 보는 기분 이었다고나 할까요. 신선했습니다.

 

아.무.튼.

 뭔가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겠네요.

 그런데 줄거리를 얘기할 수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구요.

 으음. 하지만 이대로는 아쉬우니까 하나만 더 얘기해야지~하고 버텨봅니다.

 

사람이 죽게되는 사연도 참 많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되는 이유도 참 많구나~ 하는 사실에 대해 한 번 눈길을 줬었다지요.

 

아무튼 읽히는 속도에 놀랐습니다.

 아, 내가 읽은 속도에 놀라야하나? 보통일까? 음.

 결국 정말 놀랍도록 잘 읽혔다. 가 결론인가 봅니다.

 

아무튼 아무튼만 적게되는 묘~한 독서 감상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왠지 등장인물들이 다들 안쓰럽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였을까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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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기술 - 당신의 가치를 높여주고 성공을 보장하는 주옥 같은 잠언 251가지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차재호 옮김 / 서교출판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에 끌려 사들인 책이면서도 "지혜에도 기술이 필요한거야?"하는 의문을 계속 던지게 했던 책이었다.

 지혜도 머리에 가슴에 그저 품고 있는 것으로는 불완전 한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이야기에 앞서 알랑알랑 거리듯 우리를 달래며 친절하게 지혜를 가르쳐줄 책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만두기를 부탁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잠언들이 역모라도 꾸미는 모양을 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제법 이런 부류의 책들에 익숙해져간다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한편으로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도 들어있었으니 말이다. 떠올리니 푸후훗 웃음만 난다.

 

적극적이고 적나라하며 공격적이고 하지만 현대에 무척 유용할 그야말로 능숙한 처세에있어 칼자루를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잠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작자인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라는 분은 17세기 사람이다. 지금으로 400년도 더 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지혜가 현대에 완벽히 부합될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며 이것이 우리가 지혜라고 칭하는 것들의 불가변성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새삼 놀람을 금치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결코 뒤틀리지않는 가치, 그 훼손되지 않는 도도함이랄지 당당함이 기억에 남는다.

 

지혜는 진화를 거듭하는 것 같다.

 그것이 변하는 시대를 대하는 유연함.

 지혜는 인류에 종속된 피조물이 아니라 이미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위치를 획득하고 되려 우리를 지배하는 능력을 얻은듯 하다.

 

그만 책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지혜를 비유하자면 가장 적절한 것이 '칼'이 될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라도 잘못 사용하면 '칼'의 '칼날'을 잡은 것과 같이 스스로를 상처 입히게 된다.

 하지만 적절히 쓰인 지혜는 '칼'의 '칼자루'를 쥔 것과 같아서 마음껏 원하는 것을 요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혜의 기술』이다.

 

한마디로 적절히 능청떨며 능수능란하게 인관관계를 컨트롤 하는 방법, 눈치채지 못하게 혹은 싫어하지 않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지배하는 색다른 시각의 잠언의 실용성에 고개가 절로 '절래절래' 흔들어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술수를 쓸 때는 상대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필요하다면 다소간의 편법을 쓰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난받을 일은 아랫사람에게 시키고 당신은 칭찬받을 일만 해라.

 

몇가지만 들어봤지만 이런 식이다. 오! 얼마나 적나라한가. 얼마나 솔직한가.

 그리고 얼마나 유용한가.

 

하지만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악의적이고 몰양심적으로 이 책에 쓰여진 '지혜의 기술'을 남용해도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관점에서 암묵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효율을 누리라는 것이다.

 

선함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지혜라고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사실 총 5장으로 구성된 형식인 이 책은 현실적 처세와 용인술, 용인되고 용납될 수 있는 편법과 술수가 담긴 지혜와 스스로 마음으로 경계하고 다스려야 할 것을 짚어주는 교훈적 지혜를 두루 담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충격받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것은 아마, 색달랐기 때문이리라.

 규격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지혜 이야기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던가 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우유부단해서 남을 위한다고 자신을 상처입히고 힘겹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지헤로운 배려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가치를 부여해본다. 점잔빼지 않고 현실적이며 실용적인 지혜들에.

 

 진정한 지혜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해준 책이었다.

 

놀라던 와중에 어제 읽었던 책과의 연관성을 발견했다면 난 스토커 기질이 있는 것일까?

 오늘의 책이 내게 일러준 사실은 결국 책과 지식은 시대와 국적을 초월해 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 사람들도 통해 있으리라.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새로운 지혜의 발명이 아닌 잊혀지고 가려진 지혜의 발견이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내 감상이 너무 어수선해 본문의 발췌로 대신한다.

 내가 이 책의 핵심을 잘 뽑아냈기를 바라며.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자신의 적조차 이용할 줄 안다면 정말 지혜롭다고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적은 날을 잘 세워둔 칼과 같다. 칼날을 만지면 상처를 입지만 칼자루를 쥐면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다. 87쪽

 

지혜로운 사람을 곁에 둬라. 지혜로운 사람이 지닌 은은한 향기는 주변으로 퍼져나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지혜로운 사람을 부하로 부리면 자신이 훌륭해진다. 그들이 내놓는 업적은 당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며, 그들의 조언은 당신을 항상 깨어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현명한 아랫사람을 인정할 수 있는 윗사람이 되어라. 아랫사람이 뛰어나다고 해서 윗사람의 명성이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105쪽

 

자신의 분노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어라.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알면 남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된다. 홧김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한 마디는 지옥의 불덩어리처럼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 147쪽

 

남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내면의 목소리에도 유의하라. 자신을 가장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점을 이해하고 나면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큰 것부터 고쳐나가라. 그러면 작은 결점들은 저절로 없어진다. 152쪽

 

진실은 몸에는 좋지만 먹기는 꺼려지는 쓰디쓴 약과 같다. 달콤한 말로 치장하지 않으면 진실은 상대의 심장으로 곧장 날아가 굳게 박혀버린다. 진실을 말할 때는 아주 조심스러워야 하며 어떤 경우에라도 전부를 사실대로 털어놓아서는 안된다. 그것이 자신과 상대방을 동시에 배려하는 지혜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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