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유리창 법칙 -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비즈니스의 허점
마이클 레빈 지음, 이영숙.김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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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충형 인간, 단순 경영과 완벽하게 배치되는 책을 만나버렸다.

 이럴수가, 난 이 책의 설득력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이 책이 주창하는 것은 완벽 경영, 강박형인간이다.

 이 책 속의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부디 잘 적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깨진 유리창 법칙은 본래 범죄학에 도입되었던 '깨진 유리창 이론'이 경제학에 적용된 것이다.

 깨진 유리창 법칙이란,  한명의 불친절한 직원, 매장벽의 벗겨진 페이트칠 등 기업의 사소한 실수가 결국 기업(초 거대 기업까지도)을 쓰러뜨린다는 이론이라고 한다.

 

2000년 5월 뉴욕시의 줄리아니 시장은 '시장회의'에서 경범죄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흔히 사람들은 경범죄보다 강력범죄를 강력히 단속해야만 사회적 안전이 위협에서 벗어나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범죄학의 '깨진 유리창 이론'은 단순하고 사소한 경범죄가 만연한 사회에 강력범죄 또한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줄리아니 시장의 경범죄 근절 정책의 시행결과 뉴욕시의 강력범죄 발생률은 급감했고 뉴욕 시민들은 회복된 질서가 가져오는 안정감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되었다. 

 

이 책에서 이러한 '경범죄'와 같은 사소한 행위들을 '깨진 유리창'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비즈니스에 적용한 '깨진 유리창 법칙'을 구체적 사례들과 함께 자세히 설명해준다.

 

새로 개업한 개인의 식당에서 코카 콜라나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스, 맥도날드와 같은 초 국가적 기업들까지 그들이 깨진 유리창을 방치함으로써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실패의 원인을 방치된 사소함에서 찾았냈던 것이다.

 

이러한 정말 '사소한' 깨진 유리창들이 위험한 이유는 깨진 유리창이 우리에게 유발시키는 '인식'의 형태 때문이다.

 깨진 유리창이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업체의 경우 직원도 경영자도), 그러니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다. 즉 「무법천지」라는 인식 갖게 한다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 한 명의 불친절한 직원, 한 번의 불쾌한 경험 때문에 고객은 그 기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그 결과 기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100 - 1 = 0 이라는 등식이다.(단 하나의 사소한 실수가 99가지의 완벽함을 무효화한다는 의미)

  이 등식은 깨진 유리창이 지니는 인식의 힘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극히 사소한 일이 전체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저자는 완벽 경영과 강박관념, 강박적 행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사소함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빈틈없는 경영을 시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사소한 실수를 반복하는 직원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하며, 끊임없이 살피고 개선하는 노력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그 외에도 브랜드가 가지는 의미에 변화를 주려할 때는 신중해야하며 대표적인 실패 사례인 코카콜라의 뉴-코크 사업을 들어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브랜드란 소비자들이 이성적 감성적으로 기업을 정의한 것이기에 그것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는 기업의 정의 자체를 뒤흔들어 소비자들의 불신과 외면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것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의 불만에 귀기울여야하며, 아무리 사소한 깨진 유리창이라도 신속하게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경영에 있어 완벽함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정말 적절히 표현해낸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증명된 법칙이 지니는 납득과 적절히 어우러진 사례와 예시는 설득력에 힘을 더한다.

 

기업의 경영과 비즈니스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 생활과 직장 생활에서 자신만의 경쟁력이 될 수 있는 특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난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완벽함이 강력히 요구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사소하다고 별 것 아니라고 방치해둔채 조치를 미루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즉시! 바로 잡아라.

 그것이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어떤 거대 기업도 고객의 작은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그것을 잊지 말기를. 

 

 

책이 부른 책, 그 인연을 소중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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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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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섬에 울려퍼지는 신비로운 한 곡의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한편의 희곡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이름에 실리는 기대감을 조금도 저버리지 않는 멋진 작품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정말 너무 단순해서 이제 돌아보면 무모했던 것 같이 느껴진다.

 단 한 구절.

 미랜더의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라는 한 구절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의 제목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보고 나니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똑같은지 아닌지. 푸핫 결국 외국 작품이 지니는 해석의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뭐, 결과는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찬란한 신세계'로 확인 되었지만 둘다 멋지다.

 

이야기는 밀라노의 대공인 푸로스퍼로는 마술의 연구에 열중하느라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되자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던 동생 앤토니오에게 자신의 직책을 맡긴다.

 하지만 동생 앤토니오는 나폴리의 왕 알론조와 결탁해 푸로스퍼로와 그의 딸 미랜더를 추방한다.

 공국민의 푸로스퍼로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기에 차마 그를 죽이지 못했던 앤토니오는 낡은 배에 두 사람을 태워 바다로 보낸다.

 

하지만 푸로스퍼로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예전 마녀의 지배가 지배하던 섬에 상륙해 마녀의 아들 캘리밴을 노예로 삼고 섬을 지배한다.

 그리고 푸로스퍼로의 마술이 완성된 후 어느날 나폴리의 왕 알론조와 앤토니오 일행은 알론조의 딸과 튀니스 왕과의 결혼식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폭풍을 만난다.

 

그 폭풍은 푸로스퍼로의 마술로 일으킨 것으로 그의 충실한 정령 에어리얼의 작품이었다.

 푸로스퍼로는 에어리얼에게 명해 그들을 폭풍에 휘말리도록 하되 목숨은 구하도록 지시해두었던 것이다.

 

알론조 일행은 무사히 섬에 도착하지만 왕자 퍼디넌드는 그들과 떨어지게된다.(푸로스퍼로의 계획대로)

 그 결과 알론조 일행은 왕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왕자를 찾아나서고, 왕자는 왕이 죽었다고 여기고 왕의 죽음을 슬퍼한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왕과 동생에 대한 통쾌한 복수전이 시작된다. 오.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복수가 끝난 후에 그들을,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푸로스퍼로의 인물됨 때문이었다.

 거기에 이야기를 빛내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표현들, 언어유희는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실감나는 장면들을 상상하게 한다.

 

마술사 밀라노 대공의 요절복통 복수기라고하면 너무 가벼울까?

 하하하.

 

사 놓고 읽지 않았던 책을 읽게된 동기치고 비록 조금 '불순'했지만 아마 그는 이런 나도 용서해주리라.

 

셰익스피어의 희 비극을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가 펼치는 언어의 마술에 다시 한번 빠져들고 싶다.

 

 

"나의 신뢰는 끝이 없었다. 나의 세입뿐만 아니라 기타 나의 권력이 짜낼 수 있는 재산으로 군주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그는 마치 같은 거짓말을 여러 번 되풀이해 말함으로써 자신의 기억력을 진리에 대한 죄인으로 만드는 즉 자기 거짓말이 거짓말임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이 진짜 대공이 된 듯이 믿었고, 나의 대리로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군주의 기능을 행사하였다."

 이 부분은 1984년의 '이중사고'를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푸로스퍼로의 노예인 캘리밴의 대사 "당신은 나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소, 그 덕으로 내가 얻은 이득은 저주하는 법을 아는 것이 전부요!"라는 대사는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배은망덕의 이유가 될 뿐이라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모든 범죄 모든 배은망덕을 용서하는 멋쟁이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마침으로써 내게서 감동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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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
박경철 외 지음 / 리더스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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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고른다." 영화 <허리케인 카터>의 명대사라고 한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흥미를 끌면서도 '그럴리가'라는 불신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책을 별로 안 읽던 시절에는 나도 "오, 이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꿀지도 몰라!"라는 믿음을 갖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읽는 책이 늘어갈수록 단 한 권의 책이 내 인생 전부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이 책은 우리 나라 각계의 명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서른명이 자신의 삶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책, 혹은 어떤 계기가 된 스물 아홉권의 책을 그 속에 얽힌 사연과 함께 들려준다.

 (서른명인데 스물아홉권인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책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교수, 학자, 사업가, 정치인, 언론인, 기자, 작가, 목사 등 다양한 명사들이 소개하는 다양한 책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소개하는 책들은 모두 한번씩은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만큼 하나같이 독특한 풍미를 풍기고 있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책이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하는데 어찌 회가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각각의 명사들의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모두들 열정적인 다독가라는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책을 읽다보니 그 안에서 보물을 발견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간략히 소개된 책들의 이야기, 더군다나 아직 나 스스로도 읽지 않은 이야기들을 다시 소개하는 것은 참 무리한 이야기다.

 

책은 직접 읽기 전까지는 절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중요한 부분이나 줄거리를 전해듣는 일, 혹은 단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찬찬히 혹은 깊이 빠져들며 자신의 호흡에 맞춰 한 장 한 장 넘겨진 페이지가 마음에 남으면 그 때 그 책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책이란 참 좋은 것이다.

 늘 그곳에 있어 내가 필요할 땐 기꺼이 그가 품고 있는 지혜를 빌려주니 좋다.

 로또는 당첨되는 순간에서 잠시간 행복하게 만들어줄 뿐이지만, 책은 계기가 되고 교훈이 되고 여운이 되어 행복이 자랄 수 있는 옥토가 되어주며, 로또는 단 몇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한정된 행운일 뿐이지만 책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보물상자다.

 

사람이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고른다는 말을 앞에도 적었었다.

 거기에 더해 난 이렇게 생각한다.

 책이 사람을, 그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뀌려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책과 만나는 것이라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갈 만큼 책은 오지랖이 넓지도 친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일까?

 

치열하게 답을 구하는 사람에게 답은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나 스스로도 답을 얻지는 못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생각한다.

 돌아보면 난 참 나태했다.

 오래 방황했고, 오래 헤메다보니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늪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행복은 늘 너무 멀리 있었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모르고 지냈다.

 

정말 다행히도 요즘은 그 길이 조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래 헤메던 미로에서 겨우 빠져나온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이 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명사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책읽기의 당위성을 이야기한다.

 여기 소개한 한 권의 책이 자신에게 계기가 되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책 한 권으로 자신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계기를 통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답을 내어주는 존재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그 질문에 자극받고 답을 구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맡겨진 책임이다.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을 무척 싫어한다고 박경철님은 이야기한다.

 '통섭의 식탁'의 최재천 교수님이나 '48분 기적의 독서법'의 김병완님은 다독과 함께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 한 권이 나를 이만큼 바꾸었다면, 나를 바꾼 단 한 권의 책이 열 권이 되고 백 권, 천 권이 되면 나는 얼마나 바뀌게 될까 상상해본다.

 

내가 책을 고르든, 책이 나를 골랐든 결국 책과 함께라면 우리는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내 말은 너무 서툴러서 내가 읽고 감상을 적어내는 책들에게 늘 미안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난 더 많이 읽을 것이고, 더 많이 적어낼 것이다.

 그렇게해서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어서 좋은 책, 좋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바램뿐이다.

 

책이 있어서 좋다. 책이 품고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좋다. 책이 건네는 위로의 말들이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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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984년 청목 스테디북스 1
조지 오웰 지음 / 청목(청목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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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 책 목록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할 책 중의 한 권이 바로 이 책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중학교 때 적과흑을 읽고선 오, 이런 신세계가!하는 마음으로 사둔 10여권의 고전 중 하나다.

 

 처음 읽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아 1984년의 이미지가 지워지질 않았었다.

 

그런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다보니 이 책을 다시 읽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내용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윈스턴과 줄리아가 위장한 사상경찰인 채링턴의 이층 방에서 체포되는 순간에는 절로 낙심이 되면서 곧 그들이 겪게 될 지옥을 떠올리며 안타까워 할 수 밖에 없었다.

 

멋진 신세계와 1984년은 무척이나 닮아있다.

 두 소설의 작가의 활동 연대와 집필 시기도 큰 차이가 없고 배경조차 둘다 영국이다.

 

생각해보니 무척 닮은 듯한 두 소설은 다른 점도 참 많다.

 

한 쪽은 문명을 무척 발전시킨 상태에서 이상향을 건설했고, 다른 한쪽은 극도로 쇠퇴시키는 쪽을 선택했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쾌락에 제한이 없지만 1984년에는 쾌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것도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

 

 거기에 신세계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누리지만 1984년에서는 역시 '행복'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발생 단계에서부터 완벽한 맞춤식 처리와 훈련을 통해 철저하게 규격화시켜두기에 성장 한 후에는 굳이 감시하거나 제어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학습된 조건 반사가 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구별해준다.

 거기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소마'는 그들이 복잡한 감정에 빠져드는 것을 막아준다.

 감정이란 순간적인 경향이 강하기에 약한 감정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소마' 1그램이면 그들은 그저 행복할 수 있다.

1984년에서는 사상교육과 이중사고를 통한 사고의 회피(?) 그리고 신어를 통한 표현 가능한 개념의 삭제함으로써 사고를 제한한다.

 무엇보다 24시간 꺼지지 않으며 거의 모든 장소에 설치되어있는 텔레스크린은 감히 그들에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사상교육들은 그들이 다른 무엇도 아닌 '대형'만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멋진 신세계에는 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완벽한 건강과 부족함 없는 생활이라는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

 1984년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형이 존재하며 권력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기막힌 차이점은 멋진 신세계에서는 추방되는 이유가 그들이 체제에 반항했기 때문이지만, 1984년에서는 반항하는 한 그들(영사)은 그들(반항자)를 죽이지 않는다.(영사는 영국 사회주의)

그들(영사)은 순교자를 원하지 않는다.

 완벽한 학습, 이해, 수용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체제에 순응하며 대형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들은 끝이다.

 

 

과학적 화학적 세뇌와 문화적 사회적 세뇌를 구분할 것도 없이 두 이야기는 인간성이 완벽히 말살된 세계를 무척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각각의 세계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시스템을 완벽히 파악하고 또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시스템에서 어떤 결함이나 결점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

 모두가 완벽하게 만족하는 세상. 그야말로 신천지, 신세계가 아닐까?

 

두 이야기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집단'을 벗어나 '개인'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에게 있어 사색이나 사유의 시간이 될 수 있는 혼자있는 상태는 위험하다.

 늘 서로가 서로를 감시해야 하며, 같은 행위를 해야 할 것을 소리없이 강요한다.

 

우리는 이런 행복을 원하지 않는다.

 개인성이 말살된 세계,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세계, 어딘가 심하게 일그러진 세계를 경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의 부품으로 올바르게 기능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그것이 아직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라면 난 참 바람직하고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것은 좋은 일, 행복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반대의 이야기를 적을 필요는 없겠다.

 

충분한 살풍경이 이미 그려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난 행복하게 살고 싶다.

 물론, 지금도 무척 행복한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다른 행복을 또한 원한다.

 부품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다만 죽는 날까지 나로 살고 싶다.

 

읽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정말 신기하고 놀랍다.

 (어쩜 이렇게 불친절하고 이기적인 감상일까!하는 놀라움까지를 느끼며)

 

간략히 줄거리라도 적어야겠다 ^^;;

 윈스턴 스미드는 오세아니아에 사는 서른 아홉의 정맥류궤양에 시달리는 평범한 남자다.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의 세개의 강국으로 나뉘어있으며 늘 전쟁중이다.

 오세아니아를 이끄는 지도자는 '대형'으로 그는 불멸하며 모든 미래를 예언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의 세계에는 어느 곳에나 텔레스크린이라는 양방향 방송장치가 존재하며 그것은 아주 작은 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으며 어디서나 모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한다.

 오세아니아에는 '이중사고'라고 하는 특별한 사고 형태가 존재하는데 '이중사고'를 이용하면 어떤 사실을 부정하고 그 부정했다는 사실조차 망각함으로써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한마디로 늘 정신을 백지상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 백지에 당의 사상과 논리를 적기만하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영사 즉 영국 사회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슬로건을 내세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 세가지 슬로건이야 말로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대략 알아야 할 것은 대형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뿐이며, 체제에 예속되어 있는 한 그들은 자유롭고 전쟁을 계속 하는 것으로 지배는 평화롭게 계속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소설 속에서 윈스턴을 교육하는 오브리엔이 친절히 일러주는 것을 참고로 하면 좋겠다.

 

동화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윈스턴은 어느날부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줄리아가 쪽지를 건네는 것으로 시작해 당에대한 반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당에서 금지하는 온갖 비행을 저지른다.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겠지만 그것은 영사에게 있어 분명 반항이요 비행이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죽음의 순간을 걱정하면서도 그들은 호기롭게 그 시간들을 즐긴다.

 그리고 그날.

 그들은 죽은 목숨이 된다.

 

애정성.

 고문을 담당하는 부서가 위치한 건물의 이름이다.

 사랑이 담긴 온갖 고문을 통해 그들이 윈스턴에게 원하는 것은 '대형을 사랑하게 되는 것' 완전히 대형을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그들은 윈스턴을 놓아주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다.

 

결국 그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고문이 코앞까지 닥쳐오고 결국 그는 무너진다.

 

이 소설은 풍자 소설인 것 같다. 아마 그 시대의 어떤 사회적 구조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이러한 상상을 끌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웃고 넘기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적나라해서 잔혹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진정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광인은 단순히 전체 중의 소수자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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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 하서명작선 40 하서명작선 40
헉슬리 지음, 황종호 옮김 / (주)하서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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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놀라운 소설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1984년의 미래를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중앙 런던 인공 부화 조건 반사 육성소에서 시작된다. 

 인공 부화라든가 조건 반사 육성에서 상상할 수 있는 조류라든가 동물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이곳 육성소에서는 '일정한 규격'에 맞는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대의 의학, 과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복제, 배아, 줄기세포, 맞춤아기 따위의 일들이 이곳에서는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특정한 계급의 '인간'을 그 계급의 인간이 수행할 '업무'에 꼭 필요한 조건들에 맞춰 육성하고 불필요한 조건들은 제거하는 것이 이 육성소의 업무이며 누구도 그것에 의문이나 이견을 제시하는 일은 없다.

 

그들의 세계는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표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표어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반영하며 완벽하게 함축하고 있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따위로 분류되는 각각의 계급들은 서로 완벽한 위계를 지니며, 발생 단계에서부터 완벽한 화학적, 심리적 처리를 거쳐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좋아하는" 불행을 모르는 하나의 세계의 세포로써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세계에나 그렇듯 이 완벽하고 완전한 세게에도 부적응자가 존재했다.

 그의 이름은 '버나드', 그는 알파 플러스라는 우수한 지배 규격의 인간이지만 발생 단계의 어떤 처리가 잘못되어(소문에) 하급 규격의 인간의 특성이 발현되고 만 존재다.

 그는 줄곧 육체적 결함에 대한 의식의 과잉에 시달렸고 다른 인간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며 늘 외로워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완전히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헬름홀츠' 같은 알파 계급이며 '100% 알파'라고 불릴 정도로 우수한 육체적 조건을 타고 났으며 능력 또한 우수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완벽함에 열광하는 사람들 속에서 되려 괴로워하며 결국 극심한 고독에 시달린다. 

 

그런 그들에게 '야만인' 존의 존재는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임신과 출산,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개념이 극도의 혐오를 줄 뿐인 것으로 '조건 반사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 세계에서 존은 특별한 케이스였다.

 

우연히 '야만인 육성 지구(원주민을 놓아 기르는 지역, 그들은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에 관광을 갔던 알파 계급의 남자와 베타 계급의 여자가 불의의 사고로 남자는 돌아가지만 여자는 그곳에 남겨지고 완벽히 이루어졌을 피임이 실패해 태어난 존재가 그다.

 

그런 그를 야만인 지구에 관광갔던 '버나드'가 신세계로 데리고 오면서 이야기는 급진전 된다.

 

이 세계에서는 '정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인은 만인의 것이다."가 그들의 이념이며 완벽히 조건 반사 교육이 이루어진 '신 인류'에겐 쾌락이든 무엇이든 통제없이 마음껏 허락된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을 '야만인' 존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 인류'에겐 '소마'라고 불리는 약물이 상시 지급된다.

 '소마'의 효력은 모든 것을 잊게해주는 것.

 괴로움도 슬픔도 시간마저도 완벽히 잊게 해주는 것이 '소마'였다.

 

발생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각종 처리와 조건 반사 교육 그리고 '소마'의 조합은 너무나 완벽해 모두가 행복한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존은 베타 계급의 레니나라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레니나 역시 존을 사랑했지만 존과 레니나의 사랑은 같을 수 없었다.

 

존은 '야만인의 세계'에서 자라며 그들의 사상을 익히고 있었고 늘 비난당하는 어머니를 봐왔기에 '만인은 만인의 것이다'라는 개념을 인정 할 수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불의의 사건들로 존과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이 세계에서 추방되게 된다.

 

중앙 런던을 떠나온 후 존은 어떤 등대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인간들이 찾아와 그를 귀찮게 한다.

 존은 자신의 그릇된 욕망들을 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데 그 행위가 특히 신세계 인간들의 관심을 끈다.

 

급기야 그를 찾아온 인간의 무리는 그에게 채찍질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존은 그를 찾아온 레니나를 향해 무참한 채찍질을 행한다.

 자신에게까지 심한 채찍질을 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등대에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된다.

 

 

부끄럽지만 내 비겁한 무기가 할 말이 정리되지 않으면 줄거리를 늘어놓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줄거리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잘 읽히는 소설조차 나를 괴롭히게 되는 이유는 감상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능력의 결여는 때로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 책 속의 신세계에는 그러한 괴로움이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완벽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적합하게 발생하고 성장하고 키워진다.

 때로 찾아오는 혼란, 우울, 괴로움은 '소마' 1그램이면 씻은듯 사라진다.

 그들은 불행을 알 수 없으며, 차별이나 부족 불안에의한 괴로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똑같은 규격의 상품을 찍어낸 산업화 된 공장처럼 심지어 그들은 인간조차 '보카노프스키 법'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복제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 '부품'에 가깝다.

 

이 이야기의 배경 연대로 등장하는 '포드00년'이라든가 '신'을 칭하는 감탄사가 '포드님'인 것이나 "값싼 자동차이신 포드님"이라는 욕이 존재하는 것에서 급격히 발전하는 규격화 된 산업에 대한 작가의 우려와 불안이 엿보인다.

 이 이야기를 예사로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 소설과 많은 점에서 닮아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사회제도 심지어 가치관까지 지배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 아무런 불만도 요구도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들.

 표현할 수 없이 섬뜩하기만 하다.

 

버나드나 헬름홀츠의 고독과 존의 죽음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수 많은 것을 박탈당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정말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정리는 되지 않으면서 자꾸 의문만 느는 충격과 경악의 참 먹먹한 이야기였다.

 

아, 이 소설에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인용된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렇게 무리하게 마무리 짓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나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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