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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2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평점 :

1권에서 늘어놓았던 추측 가운데 맞은 것이 있는가하면 완전히 빗나간 것이 있었다.
맞은 것은 조지와 아서가 결국은 이방인 격의 인물들이라는 추측이었다.
27쪽 "조지, 당신과 저는, 우리는…… 불완전한 잉글랜드인입니다." |
조지는 혼혈이라는 인종의 이방인이고, 아서는 종교적 성향에서 이방인의 자리에 선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리 겉으로든 안으로든 완전한 잉글랜드인처럼 보이고 생각하더라도 결국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게 되는 거다.
두 사람은 첫만남에서부터 의기투합한다. 특히 아서는 조지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조지의 무죄를 확신한다.
31쪽 아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조지를 내려다본다. "조지, 전 당신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
아서는 조지가 무죄라는 것을 믿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 '안다'고 말한다. 안다는 것은 어떤 이해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아서에게 이토록 강한 확신을 갖게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황 증거나 기사의 말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의혹은 전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아서는 조지의 영혼이 무죄라는 것을 어떤 원리에서인가 알 수 있었다."고 말이다.
빗나갔던 것은 조지가 괴롭힘을 당하고 감옥에 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인종이 다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조지는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워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고 하는 말도 덧붙인다. 아서가 조지가 무죄인 것을 아는 것과는 반대로 유죄로 만들기 위해서, 미워하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앎의 이중적인 효용을 보여준다.
이해하기 위해서도 알아야 하고, 미워하기 위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거다.
16쪽 영국인들은 돈을 존중합니다. 당신에게 내려진 선고가 철회된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알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보상금까지 받게 된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완전히 결백하다는 걸 알게 되겠죠. 이건 큰 차이입니다. 돈을 받게 되면 당신을 감옥으로 보낸 내무성이 부패하고 타성에 젖어 있다는 것도 알려지게 될 겁니다. |
이것이 아서가 생각하는 돈, 보상금의 의미다. '완전히 결백하다는 증거' 그 자체다.
2권에서의 아서의 활약은 직접 읽어볼 수 있도록 언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미 예상하는 것처럼 아서가 나서는 것으로 청문회가 열리고 마침내 조지는 '무죄'라는 발표가 나오기에 이른다. 그러나, 무죄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청문회의 판결문의 결론은 이랬다.
"무죄인 동시에 유죄"
조지는 혐의가 해소되고 사법변호사라는 지위도 회복하지만 정부의 보상금을 받아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무죄인 동시에 유죄라는 판결의 의미였다.
이 작품의 한국판 제목은 <용감한 친구들>이다. 원제가 <Arthur&George>라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왜 굳이 용감한 친구들이라고 했는지 미루어 생각해보자면 짚이는 게 없지는 않지만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1권에서 느꼈던 장르소설적 기분은 2권에서 완전히 사라져 국가와 법과 인격과 종교와 영혼과 같은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들로 돌아온다.
<용감한 친구들>이라는 제목은 국가 권력과 다수의 결정에 반대해 증명과 투쟁에 나선 아서와 조지의 모습이 용감해 보인다는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잃어버린 사람은 전부를 잃은 것이나 다름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일로 잃어버릴 것이 없었다. 누구도 용감해질 필요가 없던 것이다. 용감해진다는 것은 무모해진다는 말과도 유사하게 쓰이는데 이들은 한 순간도 무모한 것을 시도하지 않는다. '가능한 것'만을 가능한 선에서 가능한만큼 보여주고 증명하고 있을 뿐인 거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그런 의미에서 <용감한 친구들>이라는 제목은 조금은 본래 작가의 의도와 빗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서 좀 더 존경스러운 것은 아서보다는 조지 쪽이다. 물론 아서는 유명인이었고 왕성한 활동력과 추진력, 정의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조지는 누구나가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물론 얼마든지 망가지고 부서질 수 있던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냈다. 세상 모두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부모와 가족조차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좌절로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보일만큼 자신의 신념을 지켜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대할 때조차 흥분해서 타인을 탓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는 현명하게 처신했던 거다.
이 작품에서 가장 절실하게 와닿았던 것은 진정으로 완벽하게 정직한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무수한 음해와 오해에 시달리게 된다는 거였다.
조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욕에 휘둘리지도 않으며, 타인의 물건을 탐낸다거나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사람과 자신의 믿음에 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지를 세상은 위선자라 하고 꾸미는 자라고 하고 거짓말쟁이며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완벽하게 정직한' 사람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늘 유혹 앞에 무너지기에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더 뻔뻔하고, 교활하며, 음흉한 인물이라고 여김으로써 자신들의 의혹에 확신을 더하고자 했던 거다.
조지와 같은 정도, 그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나 역시 종종 그런 의혹을 사곤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억울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리게 한다.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말,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앞에서 무엇으로도 스스로의 결백과 진실됨을 증명할 수 없던 순간의 좌절을 기억한다.
조지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세상 전부가 한 사람을 부정하려고 나설 때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지는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용기를 증명한다. 하지만 조지의 용기는 자신을 지켜내는데만 힘을 드러내는 용기다. 조지는 결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역시 용감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아서 역시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사도를 존중하며 자신이 믿는 것을 증명하고 관철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 각오도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모든 것을 '자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했다고 생각하면 물러서기도 한다. 분명 물러설 줄 아는 것은 용기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의 용기 역시 용감하다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용감함이 근거를 잃어버리면 무모함이 된다. 타인을 전적으로 신뢰하겠다는 아서의 자세는 본받을만 하지만 조지가 회상록에서 읽는 것처럼 아서 역시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다. 자기가 믿는 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하지 않던가.
이 작품은 아서 코난 도일이라는 실제 인물의 연대기에 의존하는 바가 적지 않고, 조지 에들지 역시 실존인물이었던 이유로 내용의 전개에서 극적인 요소가 떨어지는 편이다. 긴장감도 덜하고, 흥미도 조금 덜하다. 하지만 사실 특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이 갖고 있는 것이 어떤 힘이던가? 바로 설득력이다. 그들은 그렇게 투쟁했고, 결국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국가와 권력이라는 것에 맞서 그들은 의미 있는 성공을 이뤄냈던 거다.
세상에 완전히 정직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으며, 단 두 사람이라도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고 의지를 다할 수 있다면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가 더 큰 변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거다.
용감한 친구들은 모두 영국의 어딘가에 묻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뒤를 잇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