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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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쪽

 그녀는 그와 거의 사랑에 빠졌다. 아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면 빠진 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모호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물론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그녀, 진 루이즈는 헨리와 '거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도 거의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의 진술에 따르면 그녀는 헨리를 사랑하지는 않는 거다. '거의 빠졌다'는 건 정확히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해도 상관 없다. <파수꾼>을 읽을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읽지 않을 사람은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말 이분법적인 판단 말고 다른 판단이 있을 여지가 없는 것일까? 사랑하는 게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는 걸까? 난데 없이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251~252쪽

 <이것은 진실이야>라고 말한 그 누군가를 믿었다가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 우리는 실망하고 그런 식으로 또 곤란을 겪지 않으려고 반드시 조심하게 되지. 

 그러나 그 누군가가 진실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가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우리가 믿어 왔다면, 그런 그가 우리를 실망시킨다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경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파산시키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믿음에 갑작스런 균열이 생긴다면 적당히 믿고, 적당히 의심했던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실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진 루이즈는 그것을 두고 '경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파산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회복이나 치유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혼란스런 상태에 빠졌다는 말이다. 진 루이즈가 전적으로 믿었던 존재는 그의 아버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삶은 누구보다 진실했고 거짓이라고는 없었던 거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느끼고,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진 루이즈에게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봤을 때 절대 선하거나 진실하다 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아버지는 누구보다 혐오스런 위선자로 전락해 버리는 거다. 아버지가 전락함과 동시에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던 진 루이즈 역시 떨어져 내리는 게 당연하다.

  324쪽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 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이루로 보일 수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마.


 우리는 표면 너머의 진실, 내면까지 살피는 사람을 두고 '현명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를 경원한다. 간단히 말해 '이상한 놈' 취급한다는 거다. 별종, 별난 사람, 이상한 사람, 틀린(다른) 사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적이지 않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거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현명해지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현명해지지 않는 편이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쉬운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속 마음이나 동기를 모를 때 더 판단하기가 쉽다고 믿고는 한다. 사실 그의 동기 따위에는 아무 관심 없다.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다니, 자신의 마음조차 살피기 번거로워 하는 세상에 너무 무리한 기대가 아니던다. 그럼에도 현명한 사람은 필요하다. 자신의 잣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아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352쪽

 왜 나한테 정의와 정의, 올바름과 올바름의 차이를 구별해 주지 않으셨어요? 왜요?


 정의와 정의는 물론 같은 단어의 반복이다. 올바름과 올바름 역시 마찬가지다. 두 가지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 차이가 있다. 세상에는 하나의 정의만 있는 것도 두 개의 정의만 있는 것도 세 개의 정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70억의 인구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70억 개의 정의가 존재하는 셈이다. 

 위의 말은 진 루이즈가 아버지에게 따져묻고 있는 중에 던진 말이다. 

자신의 실망과 좌절이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정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거라고 가르쳐놓고 왜 아버지는 지기 자신과 다른 정의를 갖고 있느냐고 따지는 거다. 왜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에 아버지의 정의를 빼박아 넣어두고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있는 거다. 간단히 말하면 왜 아버지의 정의가 자신이 믿던 정의와 다를 수 있다는 걸 깨우쳐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인 거다. 정의도 여럿, 올바름도 여럿이라는 걸 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한결 같이 살았으면서 이제서야 전혀 낯선 모습을 보여준 것이냐고 대들고 있는 거다. 

 왜였을까? 그 정의, 올바름. 애초에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올바름인지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백 년 동안 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이 조직적으로 부인되었는데도 어떻게 지금처럼 그리 선량한지 나한테는 미스터리예요. 그러니 한 주간의 친절함으로 어떤 기적을 불러올 수 있을지 궁금해요.


 흑인, 백인, 황인 등등 여러 인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있는 거지 '인종'이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유색인종과 백인 등을 구분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이고 인종차별적 생각일 뿐이다. 인종조차 그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지배를 정당화 하려는 존재들이 지어낸' 것이지 오래 전부터 있던 게 아니다. 인종이란 개념이 그러할진대 거기에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 진 루이즈는 흑인들, 노예로 팔려와 무시당하고 멸시받았던 이들에게 한 주간만 친절을 베풀어도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할 거라며 기대에 차 있다. 진 루이즈의 생각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감동받은 예전 노예의 후손들, 흑인들이 백인의 호의에 감동해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그들이 하려는 일에도 전적으로 협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역 인종차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진 루이즈의 표현대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선순환에 대한 기대를 품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거다. 진 루이즈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흑인들이 자기 백인들이나 다름 없다는 사실을 어느날에는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때도 "나는 너희를 전적으로 믿었는데, 너희는 어떻게 나를 속일 수 있었느냐?"고 되묻고 있을 텐가? 모든 백인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모든 흑인이 선량한 사람인 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반복한다면 언제까지고 자신은 상처받는 사람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상처주는 사람일 거다. 나는 선량한 무죄, 다른 모든 사람들은 유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누구나 유죄 아니면 무죄라는 건가.

  372쪽

 진 루이즈,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진 루이즈의 삼촌의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어진 대륙에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저마다가 자신의 섬을 영역으로 삼아 흐르고 흘러 부딪히기도 하고 스쳐지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게 더 옳다고 본다. 집단은 떠돌기에 지쳤거나 위험을 더 수월하게 극복하기 위해 계약과 약속을 통해 만들어낸 계약 공동체에 불과하다. 군집하는 특징을 가진 생물들은 공통적으로 집단지성을 갖는다고들 하는데, 집단은 지성을 갖기도 하지만 이기심을 갖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한다. 집단은 앞에서도 적었지만 계약과 약속을 통해 형성된 일시적인 계약 공동체에 불과하다. 그런 집단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에 보편적인 '양심'을 집단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구성원 개개인이 아무리 선량하다 해도 집단이 선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집단 안에서라면 모두가 선하기에 '우리'는 선한 집단이라는 자체적 결론을 신념처럼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이 집단이 다른 집단과 부딪히기 시작하는 순간 그 선함은 악함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제목이 <파수꾼>인 이유는 누구도 다른 누구의 양심을 자기 자신의 양심처럼 삼아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때문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파수꾼을 세워줬다고 해도 그 파수꾼이 감시인이 될 지, 방해자가 될 지 알 수 없다. 오직 스스로 세운 파수꾼만이 자신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가치관이나 행동 양식에 기대지 않은 독립된 양심을 갖출 때 비로소 세상의 부정과 부패, 악덕과 악의에 맞서 자신과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나의 파수꾼을 갖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이 독립적이고 독자적으로 갈고 닦고 다듬어 품고 살아가는 양심을 갖고 있는가 되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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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버리면 그대가 손해
이형순 지음 / 도모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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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떤 책은 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가 실망하기 시작해서 읽어갈수록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갈등하게 한다. 많은 기대를 한 것도 아니지만 표지 날개에 적힌 "한국 문학의 은유와 감성이 빛나는 '소설다운 소설'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는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이루지 못했으니 일단 이 책을 읽은 건 손해인 셈이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읽어 그 손해가 덜 해진 느낌을 받은 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이 소설은 선재라는 남자가 주된 화자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끝날 무렵 해인이라는 여자로 화자가 바뀐다. 앞의 기나긴 남자의 말들과 표현들에서 얻은 느낌보다 뒤의 짧은 여자의 이야기가 더 와닿았다. 남자의 말은 호화롭게 치장된 일회용 떡볶이 접시 같았다. 일회용이라서 두 번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떡볶이를 담았기에 색깔도 무늬도 드러나지 못하기에 아무리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어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일편단심 한 여자를 향한 순정한 사랑에 목숨을 걸듯하는 남자라는 설정임에도 담담하지 못하니, 일견 그 사랑이 치졸해지는 것 같아져 버린 거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작품을 해친 격이니 안타까울 뿐이다. 

 오히려 여자의 어투는 자제되어 있고, 감정이나 인상을 화려한 표현으로 그리려고 애쓰지 않아 더 잘 와 닿았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한국 문학의 은유와 감성이 빛나는', '소설다운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과유불급, 지나쳤기에 모자람만 못한 대표적인 작품이라 혹평하련다.


 책을 평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써 온 것도 앞으로 써나갈 것도 그저 감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며 갈등한 무수한 순간들이 평하지 않고 넘어가지 못하게 했다. 


 장면을 완성하는 것이 작가의 '표현'이어야 할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작가가 밑그림부터 색칠까지 모두 해서 독자가 무엇을 상상할 필요도 떠올릴 필요도 없게 되어버린다면, 그 이야기는 결국 영원히 작가의 이야기로만 남을 거다. 소설은 드라마가 아니다. 고정된 인상이나 풍경을 담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싶은 거다. 


 이렇게 혹독한 감상을 적고는 있지만 마지막 에필로그의 반전은 어느 정도 신선함을 주었다. 물론, 앞서 서술된 소설의 내용과 비교해볼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뒤늦게서야, "아하, 그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야?"하게 된 거다. 그러나, 이것 역시 흔한 드라마의 '너희는 몰랐겠지만, 사실은 이런 거였어.' 식의 그림을 완성해놓고 거기에 더하는 것도 빼는 것도 못하게 단단한 액자를 씌운 꼴이다. 

 아, 이런. 신선했다고 말하고는 또 혹독한 감상을 더해버리고 말았다. 이러려던 건 아닌데, 내 속이 좁아서 그런가보다.


 솔직히 남자나 여자나 그 남자나 여자를 둘러싸고 시작되고 끝나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그저 남 얘기 같이 읽혔다. 그래서 감상이 나오기가 어려워졌다. 감상이 아니라 '평가'만 주구장장 늘어놓는 이 상황에 대한 변명이랄까.

 그래도 배운 게 있다. 워낙 서툰 솜씨라 이걸 써도 저걸 적어도 늘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앞으로 뭘 적게 되든 "이렇게는 쓰지 말아야지."하는 반면 교사의 면모를 세워둘 수 있었던 거다.

 

 어중간한 호평보다는 진실된 혹명이 낫다고 본다. 

내 생각이나, 글에 대한 호된 비평을 기다리고 환영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직언이 듣기 싫어서야 평생 가도 솜씨가 나아질 리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적건 많건 작가는 글솜씨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나아진다면 나이든 작가라도 늙었다고 할 수 없고, 나아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어린 작가라도 젊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혹 다음에 이형순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읽게 된다면, 스냅사진 같은 정지된 인상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수채화 같은 느낌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 이걸 감상이라고 하기가 무척이나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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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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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서툰 편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자신과의 관계도 두루 서툴기에 애써서 고치거나 바꾸려는 노력을 그만둔지도 오래 되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무척 서툴지만 그보다 더 서툰 건 나 자신과의 관계다. 만약 나를 객관화, 형상화 시킨다면 하루 종일 그의 잔소리에 시달려야 할 거다. 서로 나아지지도 변하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그저 끊임 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될 거라는 거다. 

 

 종종 나를 소개할 때 "낯을 많이 가립니다"하고 말을 하고는 하는데, 지금까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든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관계에 서툴거나 낯을 가리거나 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관계도 꾸준히 지속하기에 어려움을 겪곤 하는 걸 보면 역시 관계에도 서툴고, 낯도 많이 가리는 게 맞다. 


 드러나는 건 사실 아무 것도 아닐 때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드러나는 게 전부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드러낼 만한 것은 자꾸 드러내라고 하고,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은 자꾸 감추라고 충고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래서는 가뜩이나 진실과 진심이 메마른 세상에 또 하나의 진심을 거꾸러뜨려 시궁창에 처넣는 일이 될 게 분명하다. 

내가 시궁창에 처박히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내 진심이 시궁창에 처박혀야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을 수 없을만큼 부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드러나는대로 나를 드러내며 살 생각이다.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한데, 그가 그의 진심을 드러나는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 생각은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생각을 거쳐 자연스럽게 드러난 진심이란 걸 느끼게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나의 진심을 발견하곤 한다.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알랭 드 보통이라 좋아하는 거다. 


<동물원에 가기>는 알랭 드 보통의 저서들 속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추려서 담아 놓은 축약본 같은 거다. <여행의 기술>도 있는 것 같고 <일의 기쁨과 슬픔>도 있는 것 같고, 분명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읽은 기억이 있는 글들이라 새삼 반가움을 느끼며 읽었다. 

 '모두가 느끼는 것임에도 아무도 표현해내지 못하던 걸 표현하는 것'을 써내는 알랭 드 보통, 정말 보통이 아니다.


 보통이 아닌 것 같은 알랭 드 보통도 사실은 보통 사람이라서 그의 이야기 속에서 갈등하기도 하고, 오해 하거나 오해 받거나, 다투기도 한다. 연인을 만나고 또 헤어지기도 한다. 사소한 일에서 서로의 관계를 정하기도 하고, 예감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보통의 삶을 사는 거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그래, 이래야 사람이지."하거나 "역시, 이런 게 사람이지."하게 되는데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우리 사이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할 거다. 

 우러러 보게 되기도 하는 그가 사실은 나 같은 보통 사람인 셈이니 말이다.


동물원에 가는 걸 즐기지는 않는다. 야생에 두면 멸종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해서 동물원이나 보호 구역에 가둬두는 게 최선일까 하는 생각도 있다. 넓든 좁든, 그 닫힌 우리 안에서 그 동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자기의 삶을 산다고, 만족스럽다고 생각할까?

 그러고보니 이 책 제목이 <동물원에 가기>인 이유가 동물원에 가면 대륙과 기후를 넘어 여러 동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 속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어보고 싶지만, 이레는 이미 소위 '망한' 출판사라서 문의할 수도 없겠다. 

다음에 다시 알랭 드 보통을 만나게 되는 건 언제일까. 그때 나는 또 어떤 나를 발견하게 될까.

만남을 기대하게 하는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만남이 기대되고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마가 가고, 더위가 가실 때쯤, 동물원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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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에 숨어 있는 열두 동물 옛 그림에 숨어 있는 시리즈
이상권 지음 / 현암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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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세계는 오묘해서 모르고 보면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게 무척 많다. 서양화든 동양화든 어느 쪽이나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동양화 쪽이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한다. 이 느낌은 단순히 팔이 안으로 굽는 원리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달리 또 단순히 생각해보면 유일신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서양에 비해 신성을 부여할 여지나, 믿음을 담을 대상이 다양했던 동양 쪽이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게 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책 얘기를 좀 하자면, 이 책은 우리 옛 그림 속에 담긴 열두 동물, 즉 십이지신을 뜻하는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우리에게 친근한 동물들도 있고, 처음부터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동물이 있으며, 지금은 드물거나 사라진 동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마다 태어나는 해를 '띠'로 부여받기에 이 열두 동물들과도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니 자기 띠의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눈여겨 살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열두 동물 가운데 가장 애틋한 동물은 '소'다. 몇 년 간 소를 치며 든 정도 있고, 어린 시절 코뚜레를 한 암소를 끌고 이 논둑, 저 밭둑을 다니며 풀을 먹이거나 꼴을 벤다고 낫질하던 기억이 여전한 까닭이다. 미련하다고 욕도 많이 하지만 소만큼 순전한 짐승이 또 있을까. 짐승이라는 말이 소에게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어미 소를 끌고 가면 송아지는 멀지 않은데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면서도 졸졸 따라온다. 어미 소만 매어두면 멀리 도망가는 일도 없다. 어미와 자식 사이가 그렇게 돈독한 짐승이 또 어딨겠나 했다. 실컷 먹고난 후에는 느긋이 앉아 되새김질 할 때면 입가에 맺히는 흰 거품같은 침도 우습게만 보였지 더럽게 보이지는 않았었다. 가끔 나팔이라도 울리듯 긴 울음을 울기도 하는데 그게 또 듣기 싫지 않았다. 새끼가 팔려 떨어지고 나면 며칠을 목이 쉬도록 울고는 했다. 먹는 것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앉을 틈도 없이 송아지가 떠나간 방향 따라 서성거렸다. 모진 일을 저질렀다는 마음, 생이별 시킨 죄를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목이 쉬도록 울어서 소리가 나지 않을 때쯤 되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길게는 일주일, 짧아도 사나흘은 그렇게 먹지 않고, 울고, 서성거리는 것. 그게 소의 모정이었다. 그런 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순 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럼에도 소고기는 또 먹는다는 거다. 지금까지도 먹어왔고 앞으로도 먹을 것인데, 앞으로도 거기에 어떤 죄의식이나 미안함은 없을 거다. 소는 소고, 소고기는 소고기다라고 말하면 이상할까.


 



사진 속 소년처럼 소를 타고 물을 건넌 적은 없지만 소를 타본 일은 몇 번 있다. 황소의 등판은 넓어서 어른이 타기에도 충분하다. 다만,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밟히기라도 하면 운이 좋아도 뼈가 성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개와 고양이 그림은 어찌나 귀엽게 그려졌던지 꼭 살아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저자도 말하듯 그린 이들은 고양이나 강아지를 무척이나 사랑했을 거다. 그러지 않고는 저렇게 생동감 있게 그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이지신 그림 속 동물들에 대한 책인데 왜 고양이가 있느냐하면 우리나라의 십이지신에는 고양이가 없지만 어떤 나라의 십이지신에는 고양이가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쓰는 십이지신은 중국에서 만든 것이란다. 다른 나라에는 저마다의 십이지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는데, 어떤 나라에는 돼지 대신 코끼리가 들어간다고 한다. 십이지신을 살펴보면 그 나라의 생태까지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는 거다. 


 이 책은 단순히 그림 속 동물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 그려진 사물이나 식물들이 담고 있는 의미도 알려준다. 예를들어 신사임당이 그렸다는 초충도 속에는 수박이 나오는데, 이 수박의 씨와 넝쿨이 다산을 상징한다는 식이다. 

 어쩌면 웃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수박과 다산을 연결 지어둔 구절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 수박이 넝쿨이 너무 뻗어나가거나 열렸다고 그냥 다 크게 두면 채 익기 전에 넝쿨이 시들거나 열린 수박들을 다 키우지 못해 설 익거나 덜 자란 걸 먹게 되는데."하는 생각 말이다. 실제로 수박 농장에서는 한 넝쿨에 하나나 둘 정도 밖에 남기지 않고 나머지는 잘라버린다고 한다. 넝쿨도 너무 무성하지 않도록 억제하고 말이다. 


 22쪽

 호랑이 그림 옆에는 소나무가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호랑이가 나쁜 액운을 막아 주어 소나무처럼 오래오래 산다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야.

 


 호랑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나무도 의미가 있던 거란다. 그것도 호랑이가 액운을 쫓아 오래 산다는 의미라니,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참 심오하다. 


 39~40쪽

 "사람은 말이다, 너무 머리가 좋고, 욕심이 많아서 안 돼. 용은 염라대왕도 마음대로 못하는 엄청난 힘을 가졌는데, 욕심 많은 사람이 용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니?"

 


 다른 동물이나 생물은 용이 될 수 있지만 사람은 용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다. 사람이 욕심이 많고, 머리가 좋기에 용을 시켜주지 않는다는 거다. 하기는 정말 욕심 많은 사람이 용이 되어서 신통을 부려 세상을 어지럽히기가 쉽지 세상을 지키기는 어려울 거다.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는데, 동해 대왕암에 장사지냈다는 신라의 문무왕은 용이 되지 못한 것 아닐까? 음, 역시. 아무리 선하고 어진 임금이라 해도 한 나라의 임금이었다보니 자기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될텐데, 역시 그냥 전설이었겠다. 하기는 애초에 용 자체가 전설 상의 동물인데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하다.


 재미와 즐거움만큼이나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47쪽

 그 이야기는 고구려까지 널리 퍼진 모양이야. 고구려 고분에서도 『복희와 여와』가 발견되었거든. 그 그림에서는 남자인 복희가 해의 신으로 나오고, 여자인 여와가 달의 신으로 나와. 역시 반은 인간이고 반은 뱀이야. 

 


 왜 그런지 모르지만 고대의 유물 혹은 유적 속에서 중국과 공통된 것이 발견되거나 유사한 전설이 있을 때 보통은 그 전설이나 유물의 시작이 중국일 것이라고 여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시작해서 중국으로 갔다가 다시 역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야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다른 나라는 자기 것이 아닌 것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온갖 증거를 만들고 조작하는데, 우리는 있는 것조차 부정하고 외국의 말을 따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림 말고도 그림에 적힌 글을 풀어 설명해주는 부분도 있다.

  57쪽

 이 그림의 오른쪽에는 '물체를 잘 그리려면 남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살아 있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어.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관찰을 많이 해서 사실 그대로를 그려야 한다는 뜻이야.

 


 여기서 설명하는 그림은 말에 편자를 박기 위해 말의 사지를 포박해둔 그림이다. 그러니까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말을 잘 그리려면 말을 많이 관찰해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단순하게만 읽히는 글일까? 

 추측이지만 이 시기에는 막연하고 모호해서 그것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모르게 된 그림보다 대상의 특징이나 형상을 섬세하고 뚜렷이 묘사한 그림이 유행했을지도 모른다. 다르게 말하면 진짜와 비슷하게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문인화 풍의 사군자나 수묵화가 쇠하고 채색을 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진짜와 닮도록' 하기 위해 말이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의 그림을 흉내내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라는 거다. 이때도 유명한 화가가 있었을 거고 저마다 그 혹은 그의 화풍을 따라하려고 애쓰는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풍조에 일침을 가하는 한 마디가 아닐까 하는 거다. 

 흉내만 내서는 진짜를 그릴 수 없다. 네가 보고, 네가 느낀 것을 네 화풍으로 그려야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그릴 수 있다는 말, 아니었을까?


 이 책의 특징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딸아들이나, 손자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로 적었다는 거다. 활자도 크게 인쇄되었고 재밌는 그림이 많아 아이와 함께 읽기에 좋을 책이다. 어른이 읽지 못할 것도 없지만 아이와 함께 읽을 때 더 재밌게 읽힐 거라는 이야기다. 채색화는 서양이 압도적으로 발달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 옛그림도 그 은은함이나 깊은 색감이 결코 서양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다르지만 그것이 수준이 떨어진다거나 나쁜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일깨워준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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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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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 그의 작품은 극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워보인다."_서동민 曰


 브라질 처녀 마리아는 스위스의 한 클럽의 매니저의 삼바댄서 모집에 응해 스위스로 날아온다. 한 주에 500달러를 위해, 마리아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 깨어질 상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현실에서 깨닫게 된다. 남자친구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된 마리아는 매니저에게 5000달러의 배상금을 받아 스위스의 도심으로 들어간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도 충분히 브라질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마리아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하고 사진을 찍어 모델 에이전시에 보내기도 한다. 돈도 떨어져가고 포기하려던 순간에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온다. 나간 자리에서 마리아는 한 아랍인을 만난다. 그러나 그 아랍인이 요구한 건 하룻밤 잠자리, 그리고 그 잠자리에 대한 보상은 1000스위스프랑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마리아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거리로 나간다. 거리로 나간 마리아는 무작정 걷다가 '코파카바나'라는 브라질 이름의 클럽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날부터 마리아는 몸을 팔기 시작한다. 이른바 '창녀'가 된 거다. 자발적이고 직업적인 창녀. 

 코파카바나는 고급 업소다. 그리고 주인 밀랑의 말에 의하면 가족적인 업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정찰제로 고객은 350스위스프랑을 내고 여자를 산다. 고급 업소인만큼 조건도 까다롭다. 그리고 제한 시간은 45분으로 그 시간 안에 돌아와 소개비 50스위스프랑을 밀랑에게 건내야 한다. 

 어느 순간 마리아는 한 가지 깨달음에 도달한다. 손님에게 주어진 시간은 45분, 그러나 그들이 이동하는 시간, 옷을 벗고, 일을 치르기 전까지의 시간을 뺐을 때, 손님들에게 섹스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고작 '11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리아는 그 사실을 깨닫고 실소를 금하지 못한다. '고작 11분의 섹스를 위해 그들은 돈을 치르고 시간을 쓴다'는 사실은 마리아에게 '창녀'라는 직업적인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모험, 멀지 않아 과거가 될 지나가는 일에 불과하며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거다.

 산책을 나섰다 우연히 발견한 '산티아고 길'과 마찬가지로 우연이 들어간 그 근처의 카페에서 마리아는 랄프 하르트라는 유명한 화가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의 만남은 멈춰있던 마리아의 시간, 마음, 그 모든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아는 사람들은 알듯이 개인적으로 파울로 코엘료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그 이유는 무척 모호하고 억지스러운 거였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조금 더 파울로 코엘료가 싫어진 이유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파울로 코엘료가 싫어진 이유가 분명해지면서 한편으로 그를 이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묘한 작가다.


 이 작품을 구상하던 때의 파울로 코엘료를 상상해봤다. 그는 이 작품 속에서 마리아의 내면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듯 이야기한다. 마리아는 여자고, 코엘로는 남자다. 솔직히 아무리 여자를 잘 아는 남자라도 여자의 성감이나 욕구, 오르가즘에 대해 자신있게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파울로 코엘료는 '코파카바나'를 찾는 남자들처럼 업소에 들러 상품을 팔듯 자신들의 성을 파는 여자들과 여러 밤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설 속 마리아가 발견한 '11분'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작품을 위해 그들의 깊은 이야기를 듣는 몇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마리아의 친구였던 사서의 고백 속 반백의 작가가 파울로 코엘료를 반영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여자들의 견해는 어떨지 모르지만 남자인 내가 보기에 파울로 코엘료는 여자를 무척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불만이다.


 이 작품은 극적이다. 무척 잘 짜여져 있고, 한 여성이 자신의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상황을 잘 이겨내고 많은 유혹을 견뎌내며 지금으로 봤을 때는 더 없이 완벽하고 완전한 사랑에 도달한다. 성관계에 대한 묘사나 적나라한 표현도 많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작품을 외설로 여기게 만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과정'으로 작동하며, 그 과정을 거쳐야만 다음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 역시 불만이다. '그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다음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가 몹시도 거슬린다.


 결론부터 말하면 파울로 코엘료는 완전히 남성중심적인 성향을 띄기에 거북하다. <11분>은 마리아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마리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남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여성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만이다. 그토록 투쟁적이고 독립적이던 마리아는 마지막 순간에 한 남자에게 이끌리고 감화되어 그의 곁에 머물기를 원하게 된다. 페미니즘을 외치던 연사가 집에서는 현모양처로 머무는 아내를 바라는 거나 다름 없는 전개다. 

 마리아가 브라질을 떠나 스위스로 갔을 때 스물두 살이었다. 그런데 단 1년만에 한 사람이 평생이 걸려도 할 수 없을만큼의 경험을 하고, 돈을 벌고 사랑을 한다. 마리아의 깨달음은 신을 엿볼 수 있을만한 경지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조차 마리아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이미 넘어서 있었다. 


 코엘료가 거북한 이유가 남성중심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앞서도 적었던 것처럼 '극적'이다. 마리아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지지만 사실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것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겪는 일들은 '필요한' 과정이고, '운명'이기도 하다. 종종 그 메시지가 너무 강렬해서 나조차 "정말 그렇게 믿으면 이루어질지도 몰라"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버린다. 

 확실히 파울로 코엘료는 능력이 출중하며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마약처럼 혹은 현혹하기 위한 종교처럼 맹목적인 순종으로 이끌릴 수도 있을만큼 말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야기 속에서 마리아의 입을 빌려 "이 작품을 쓰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자아도취가 그의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이토록 몰입해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게 부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가 서술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뭔가 사춘기 소년의 상상 혹은 망상 속에서 더 자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자기 중심적 시선'으로 가득하다. 이 자기 중심성에 신의 의지라는 절대적인 힘이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환상적으로 변한다. '기가 막히다'는 환상이 아니라 '믿기 어렵다'는 쪽의 환상으로 말이다.


 아무도 적지 않았던 것, 쉬쉬하고 감추고 숨기기 바빴던 이야기를 적어간 파울로 코엘료의 노력과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그리고 잔잔하고 격렬한 감동은 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음 이야기도 읽게 할 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았으면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본래 외로운 법이다. 그렇기에 더 멀리, 더 완전한 경지에 닿기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그 경지가 정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작가로서 독자의 공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격렬함이나 긴박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시선을 붙드는 힘도 있다. 그러니 아직은, 한동안은 이 속세에서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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