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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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쪽

 그녀는 그와 거의 사랑에 빠졌다. 아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면 빠진 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모호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물론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그녀, 진 루이즈는 헨리와 '거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도 거의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의 진술에 따르면 그녀는 헨리를 사랑하지는 않는 거다. '거의 빠졌다'는 건 정확히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해가 안 간다고 해도 상관 없다. <파수꾼>을 읽을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읽지 않을 사람은 이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말 이분법적인 판단 말고 다른 판단이 있을 여지가 없는 것일까? 사랑하는 게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는 걸까? 난데 없이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251~252쪽

 <이것은 진실이야>라고 말한 그 누군가를 믿었다가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면, 우리는 실망하고 그런 식으로 또 곤란을 겪지 않으려고 반드시 조심하게 되지. 

 그러나 그 누군가가 진실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가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우리가 믿어 왔다면, 그런 그가 우리를 실망시킨다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경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파산시키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믿음에 갑작스런 균열이 생긴다면 적당히 믿고, 적당히 의심했던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실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진 루이즈는 그것을 두고 '경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파산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회복이나 치유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혼란스런 상태에 빠졌다는 말이다. 진 루이즈가 전적으로 믿었던 존재는 그의 아버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삶은 누구보다 진실했고 거짓이라고는 없었던 거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느끼고,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진 루이즈에게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봤을 때 절대 선하거나 진실하다 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 아버지는 누구보다 혐오스런 위선자로 전락해 버리는 거다. 아버지가 전락함과 동시에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던 진 루이즈 역시 떨어져 내리는 게 당연하다.

  324쪽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 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이루로 보일 수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마.


 우리는 표면 너머의 진실, 내면까지 살피는 사람을 두고 '현명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를 경원한다. 간단히 말해 '이상한 놈' 취급한다는 거다. 별종, 별난 사람, 이상한 사람, 틀린(다른) 사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인간적이지 않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거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현명해지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현명해지지 않는 편이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쉬운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속 마음이나 동기를 모를 때 더 판단하기가 쉽다고 믿고는 한다. 사실 그의 동기 따위에는 아무 관심 없다.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다니, 자신의 마음조차 살피기 번거로워 하는 세상에 너무 무리한 기대가 아니던다. 그럼에도 현명한 사람은 필요하다. 자신의 잣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아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352쪽

 왜 나한테 정의와 정의, 올바름과 올바름의 차이를 구별해 주지 않으셨어요? 왜요?


 정의와 정의는 물론 같은 단어의 반복이다. 올바름과 올바름 역시 마찬가지다. 두 가지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 차이가 있다. 세상에는 하나의 정의만 있는 것도 두 개의 정의만 있는 것도 세 개의 정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70억의 인구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70억 개의 정의가 존재하는 셈이다. 

 위의 말은 진 루이즈가 아버지에게 따져묻고 있는 중에 던진 말이다. 

자신의 실망과 좌절이 아버지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정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거라고 가르쳐놓고 왜 아버지는 지기 자신과 다른 정의를 갖고 있느냐고 따지는 거다. 왜 자신의 몸과 마음과 생각에 아버지의 정의를 빼박아 넣어두고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있는 거다. 간단히 말하면 왜 아버지의 정의가 자신이 믿던 정의와 다를 수 있다는 걸 깨우쳐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인 거다. 정의도 여럿, 올바름도 여럿이라는 걸 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한결 같이 살았으면서 이제서야 전혀 낯선 모습을 보여준 것이냐고 대들고 있는 거다. 

 왜였을까? 그 정의, 올바름. 애초에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올바름인지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백 년 동안 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이 조직적으로 부인되었는데도 어떻게 지금처럼 그리 선량한지 나한테는 미스터리예요. 그러니 한 주간의 친절함으로 어떤 기적을 불러올 수 있을지 궁금해요.


 흑인, 백인, 황인 등등 여러 인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있는 거지 '인종'이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유색인종과 백인 등을 구분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이고 인종차별적 생각일 뿐이다. 인종조차 그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지배를 정당화 하려는 존재들이 지어낸' 것이지 오래 전부터 있던 게 아니다. 인종이란 개념이 그러할진대 거기에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 진 루이즈는 흑인들, 노예로 팔려와 무시당하고 멸시받았던 이들에게 한 주간만 친절을 베풀어도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할 거라며 기대에 차 있다. 진 루이즈의 생각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감동받은 예전 노예의 후손들, 흑인들이 백인의 호의에 감동해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그들이 하려는 일에도 전적으로 협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역 인종차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진 루이즈의 표현대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선순환에 대한 기대를 품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거다. 진 루이즈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흑인들이 자기 백인들이나 다름 없다는 사실을 어느날에는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때도 "나는 너희를 전적으로 믿었는데, 너희는 어떻게 나를 속일 수 있었느냐?"고 되묻고 있을 텐가? 모든 백인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모든 흑인이 선량한 사람인 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반복한다면 언제까지고 자신은 상처받는 사람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상처주는 사람일 거다. 나는 선량한 무죄, 다른 모든 사람들은 유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누구나 유죄 아니면 무죄라는 건가.

  372쪽

 진 루이즈,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진 루이즈의 삼촌의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이어진 대륙에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저마다가 자신의 섬을 영역으로 삼아 흐르고 흘러 부딪히기도 하고 스쳐지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게 더 옳다고 본다. 집단은 떠돌기에 지쳤거나 위험을 더 수월하게 극복하기 위해 계약과 약속을 통해 만들어낸 계약 공동체에 불과하다. 군집하는 특징을 가진 생물들은 공통적으로 집단지성을 갖는다고들 하는데, 집단은 지성을 갖기도 하지만 이기심을 갖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한다. 집단은 앞에서도 적었지만 계약과 약속을 통해 형성된 일시적인 계약 공동체에 불과하다. 그런 집단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에 보편적인 '양심'을 집단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구성원 개개인이 아무리 선량하다 해도 집단이 선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집단 안에서라면 모두가 선하기에 '우리'는 선한 집단이라는 자체적 결론을 신념처럼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이 집단이 다른 집단과 부딪히기 시작하는 순간 그 선함은 악함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제목이 <파수꾼>인 이유는 누구도 다른 누구의 양심을 자기 자신의 양심처럼 삼아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때문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헌신적인 파수꾼을 세워줬다고 해도 그 파수꾼이 감시인이 될 지, 방해자가 될 지 알 수 없다. 오직 스스로 세운 파수꾼만이 자신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가치관이나 행동 양식에 기대지 않은 독립된 양심을 갖출 때 비로소 세상의 부정과 부패, 악덕과 악의에 맞서 자신과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나의 파수꾼을 갖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이 독립적이고 독자적으로 갈고 닦고 다듬어 품고 살아가는 양심을 갖고 있는가 되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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