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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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고 배웠습니다. 동시에, 기이하게도 '성역할'이라는 게 정해져 있다고도 배웠습니다. 생활과 태도에서 암묵적 혹은 묵시적으로 '남자는' 혹은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렇게 하라'며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연한 지적과 반발을 유난스럽다거나 적응하지 못한다며 비난하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불이익을 주거나 모욕을 안기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걸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일상 속이니까요.

 

 기이한 건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음에도 모른다는 겁니다. 

모호하게 '모른다'라고 말할 게 아니라 좀 더 나눠서 보자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경험하고 있지만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거나, '다 그런 것이라고 넘겨 버리'거나,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거나 설득 당하'거나 하는 식으로 확장되고, 확산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습된 무기력


 자기 몸의 100배 높이까지 뛰어오를 수 있는 벼룩을 그 절반 높이의 칸막이 안에 가둬두면 나중에는 칸막이가 없어지더라도 절반 이상으로는 뛰지 못하게 된다고 하죠. 

 어떤 사람들은 여성들이 현재의 사회 구조와 작동 방식을 따른다는 건 현재의 방식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어서'와 '그렇게 하는 게 좋아서'는 전혀 다릅니다. 설사 결과가 같다고 해도 둘은 영원히 같아질 수 없다는 거죠. 


 세상에는 생김새나 신체적인 특징 혹은 버릇보다 더 강력한 '유전 요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성별'이라는 거대한 유전 요인 말입니다. 남성은 남성의 지위와 행동 방식은 물론 사고방식까지를 계승합니다. 여성은 여성의 지위와 행동 방식, 사고방식을 계승합니다. 

 소위 '대물림'이라고 하는 일이 차이가 명백하다고 믿어지는 성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남자들, 모든 남성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모든 남성들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편하거나 부당하거나 두렵거나 끔찍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거나 '안다'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무성의하고, 무례한 일이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정기적인 모임을 함께 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임 외에는 어떤 상황도 공유되지 않는 모임의 '회원 사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루는 모임이 늦게 끝나 버스와 지하철 운행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상황이 시작됩니다. 다음 상황 중 여자의 입장에서 가장 '무서운 상황'은 어느 것일까요.

1. 택시를 타고 간다.

2. 집에 연락해 누군가 데리러 올 때까지 혼자 기다린다.

3. 함께 모임을 한 남자 회원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1번이 가장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택시에서의 추행이나 범죄 사건이 워낙 자주 일어나다 보니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무서운 건 3번이 아닐까 싶어 졌습니다. 

 몇 번인가 모임에서 얼굴을 본 사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의도는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동행하겠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무서울까요.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82년 생 김지영> 속에 이런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중략)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82년 생 김지영> 中

폭력은 폭력이고, 괴롭힘은 괴롭힘일 뿐입니다. 관심이나 애정표현을 괴롭힘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죠. 어쩌면 남자는 여자가 걱정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합의되지도, 공개되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개인적인 의도일 뿐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상대방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되어 상처를 남길 수도 있는 겁니다.


 '무지가 죄'라면 무지한 남자들은 잠재적인 '죄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죄인의 혐의를 벗는 유일한 방법은, 배우고 익혀서 알아가는 것뿐입니다.

<82년 생 김지영>은 우리 무지한 남자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할머니, 엄마, 누나, 여동생, 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을,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 속의 '차별'과 '공포', '불이익'과 '비정상'을 들추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의 불편이 아니고, 남자들을 향한 부당함이 아니고, 남자들의 불이익이 아니라고 해서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나 비열한 행동입니다. 

 성차별,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기이하게도 불편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것도, 책임을 묻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러저러한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식의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방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82년 생 김지영>에서 발견한 이상한 점을 몇 가지 공유해보겠습니다.

1. 집안일과 살림, 육아는 여자의 일이다.

2. 남자는 집안일과 살림, 육아를 '돕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의 집이고, 남자의 살림이며, 남자의 아이를 키우는 일은 '도울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3. 남자는 여자에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자는 고생을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거다. 남자가 미안해할 건 고생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그 마음의 태도다.

4. 관심 있는 여자, 좋아하는 여자, 사랑하는 여자에게 짓궂게 굴거나 괴롭히는 게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폭력'이다. 다른 이름은 없다.

5. 여자가 친절하게 대하고, 잘 해주면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안다. 극단적으로는 헤픈 여자로 여기고 막 대하기도 한다. 여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거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최선의 선택으로 웃음과 친절한 태도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착각은 자유지만, 거기까지만.

6. 합리적이고 열린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양성 평등이라거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앞과 뒤가 다른 이중 인격자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7. 여자가 너무 뛰어나고 잘나면 남자가 기가 죽는다. 그러므로 여자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왜 남자는 기가 죽으면 안 되는 건가, 그전에 여자가 '더 뛰어나면' 남자가 기가 죽는다는 말의 어디에 합리적인 논리가 존재하는지.

8.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는 편견이 있다. '그래서 남자는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나? 저마다 이유와 사정이 있는 법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편견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9.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서 여성들을 위한 제도와 혜택도 많아졌다.라는 건 안일한 생각이다. 빨간불에는 정지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신호를 위반하는 사람은 없다. 제도가 있어도 이용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 인식이 없다면 법이 아무리 잘 짜여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과 다를 게 없다.

10.  아이를 낳았을 때만 얻을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잃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부분은 본문을 인용하기로 한다.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82년 생 김지영> 中

여자는 거의 모든 걸 잃는다. 남자가 잃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직장 동료와의 맥주 한 잔 같은 것들.

11. 직장 생활을 하느라 아이를 남에게 맡겼을 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비난은 엄마를 향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죠. 아이를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건 엄마였습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타인에게 맡기는 게 아닙니다. 그들을 향한 비난이 부당한 이유입니다.

12. 모성애는 결코 위대하지 않다. 

적어도 사회가 '열녀비'처럼 떠받드는 모성애는 그렇다는 거죠. 우리는 강제 혹은 강요된 애정에 '위대하다'는 칭호를 붙이지 않습니다. 

13. 남편이 일할 시간에 한가롭게 커피 한 잔을 하는 여자는 자칫 '맘충'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아내는 결코 놀고먹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다만 씹어 뱉기 위해 날카롭고 치명적인 말을 던지는 사람들의 그 입에 저주가 내리길.

14. 남자의 '범죄 행위'가 있었을 때, '가정과 부모의 존재'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 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82년 생 김지영> 中

그러하다.

15. 이 모든 차별이 부당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문제이기에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시스템, 구조, 관습들이 잘못되어 있는 거다. '혼란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우려와 혼란의 진짜 정체는 지금까지 누려온 우월함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치졸한 변명이다. 

 잃어버릴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할 때다.


 많이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발견 한 건 고작 이 정도죠. 

오래전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왔지만 지금까지도 '이해는 하거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정도의 결론 외에는 얻은 게 없습니다. 

 남자로 태어나, 불편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해 왔습니다. 

누구도 '이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고요.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는 속담을 들먹이며, 책임을 전가하며 모른 척 해왔을 뿐입니다. 

이것이 비겁한 행동이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것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비겁했고, 비열했으며, 무지했고, 무관심했던 것은 물론, 동조자였고, 방조자였으며, 가해자이기도 했습니다. 

 

 <82년 생 김지영>은 남자들에게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해야 한다고 훈계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상을 그대로 지면으로 옮겨 적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82년 생 김지영>을 읽으며 충격을 받는 사람이 있을 거고, 읽기 전과 후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차별'과 '혐오'를 지칭하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열녀', '모성애', '엄마', '현모양처', '요조숙녀' 유사 의미 등등.

 당연하다고 믿어 온 것, 명예롭다고 떠받들어온 것, 남자들이 이용해온 칭호와 이름들.


 좋은 것만 물려주기에도 안쓰럽습니다. 

불행의 대물림, 상처의 연쇄. 

그 외침에, 울음에, 귀 기울여야만 멈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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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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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고작 페미니즘이 여성주의 정도의 의미이며, 페미니스트는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는 식의 단편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을 뿐이죠.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이해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해이자 착각일 수 있는지 알기에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면 바로 잡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평소 나름대로 개방적이라고 믿어왔고 또 여성에 대한 시각도 뒤틀려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였던 거지만요. 정말 그랬습니다. 실제로는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아는 것도, 이해하고 있는 것도 거의 없었죠.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고, 깊었으며, 해결하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무엇이, 어떻게 문제가 되고 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거대한 규모로, 얼마나 오래 차별받아 왔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어떤 차별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현실을 명료하게 짚어주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추천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를 알겠더군요.

둘째, 얇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학문적 배경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웠습니다. 

왜, 우리가, 왜 지금,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지 일단 알고 시작하고 싶었던 거죠. 


 1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이기에 누구나,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을 테니 줄거리나 내용을 따로 적지는 않으렵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시면 됩니다. 수천 년이나 억눌리고 차별받아온 이들을 생각하면 너무 쉬운 일이지요.

 

 페미니스트는 '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싸우지 않는 방법도 있겠지만, 싸우지 않고는 내어주려고 하지 않기에 결국 싸우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평등.


우리는 모두가, 누구나가 평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성들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평등할 수 없도록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고,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봉쇄됐습니다. 


 서구, 개방적이고 평등하다고 하는 나라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제학의 아버지이자 <국부론>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야기하면서, 집에서 자기 식탁에 저녁을 차려주는 어머니의 손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부키).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은 전혀 평등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차별이,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내세우며 행해지고 있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옛날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느냐?"라고요. 나아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나아져야만 하죠.


 우리가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성들만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권리와 지위를 돌려주는 것뿐이며, 그 과정을 통해 남성들 역시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식의 말은 반대로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남성스러워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남자다운', '여자다운' 모습이 정해져 있기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평등'이 달성된다면 남성과 여성 모두 강요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페미니즘에 입문하는 중이라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페미니즘은 남성의 권리를 빼앗고자 하는 움직임도, 남성 위에 군림하겠다는 시도도 아닙니다.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유치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남자의 말입니다.

"그럼 여자들도 군대 가라고 그래!" 

이게 말인지, 망아지인지.

이 말을 또 이렇게 받게 만듭니다.

"그럼 남자들도 애 낳던가!"

오죽 답답했으면.


 남성과 여성은 똑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어느 쪽이 열등하거나 우월하거나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다른 건 다른 겁니다.

우리는 이 다름을 '차이'라고 합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차별의 빌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성역할'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남자는 근력이 더 강하고, 신체적으로도 사냥이나 채집에 유리했기에 밖에서의 활동을 맡아했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길러야 했기에 집안일을 맡아했습니다. 상황에 맞게 업무를 분담한 거죠. 그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로 굳어진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사회의 모습이 달라졌다면 과거 효율을 위해 맡았던 일에도 변화가 따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남자가 사장이 되고, 여자는 비서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일이나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관습이 잘못됐다면 바꾸는 게 당연합니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일인 거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잘못을 짚어가며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째 효과는 이런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배워왔기에 잘못됐다는 걸 모르는 이들에게 잘못이라는 걸 일깨우는 것입니다.

 둘째 효과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참아왔던 여성들의 자각을 이끌어 낸다는 것입니다.

 셋째 효과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의 반론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넷째 효과는 편견의 탄생 배경과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효과는 더 이상 억지로 꾸미거나 억누르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시에, 화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여섯째 효과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자유라는 겁니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강제되지도 고정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 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페미니스트도 힐을 신을 수 있습니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상적인 모습이 사회나 타인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기만 하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페미니스트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페미니스트가 추구하는 태도에 반하는 생각이라는 거죠.


앞으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의 언어를 조금씩 배워나갈 겁니다.

생각도 넓혀갈 겁니다. 그때는 오늘 쓴 이 감상을 다시 읽으며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하게 느끼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 말을 골라서 적는다고 했지만 우왕좌왕하고, 횡설수설하다가 시간만 보내고 말았구나 싶습니다. 

나아지겠지요. 나아질 겁니다.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차이가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은 노력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인간으로서, 저를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한 근본과 근원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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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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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죽는다.

대드 루이스는 인간이다.

대드 루이스는 죽는다.


가장 잘 알려져 있을 삼단 논법을 흉내 낸 이 세 문장은 켄트 하루프 소설 <축복>의 줄거리이기도 합니다. 

70이 넘은 노인, 대드 루이스는 폐암 진단과 함께 한 달도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죠. 대드는 담담하게 선고를 받아들입니다. "100세 시대에 80도 안 돼서 죽다니 말도 안 돼!"하는 식으로 현실을 부정하거나 하는 일 없이요. 부인 메리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둘 다 진실로, 조금도 힘들거나 슬프거나 괴롭지 않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대드는 부루퉁해졌고, 메리는 대드를 간호하다 과로로 쓰러지기도 합니다. 

 

 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대드가 '대드'인 이유를 적어야겠네요. 

아빠가 됐기 때문입니다. 

대드가 메리와 결혼해서 딸 에일린을 낳았을 때부터 '대드 루이스'가 됐던 거죠.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게 너무 단순하고도 간단히 일어납니다. 대드에게 내려진 시한부 선고처럼 말이죠.


 죽음, 너무나 확실한 죽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이 되지 않습니다. 대드에게는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여러 가지 있었고, 마무리 짓고 싶은 일도 여럿 있었으며, 꼭 만나고 싶은 사람도 하나 있었습니다. 아직 기운이 있는 동안 대드는 해결해야 하는 일들과 마무리 짓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합니다. 유언도 남기고, 운영하는 철물점 경영에 대한 문제도 해결하죠. 

 적어도 대드에겐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던 거죠. 하지만 한 가지 풀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벌써 오래전에 집을 나간 아들, 프랭크와 화해하는 일이요. 


 죽음을 앞에 둔 적이 없어 확실히는 모르지만 흔히 말하기를 죽을 때 제일 후회하는 건 '하지 않았던 일'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대드가 후회하는 건 두 가지였으니까요. 

 하나는 '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이죠.

말장난 같지만 후회를 하기 시작하면 했던 일이나 하지 않았던 일이나 모두 후회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결국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할 것인지 마음먹는 게 후회하지 않는 혹은 덜 후회하는 길이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대드는 현명했습니다. 자책하지만 스스로를 괴롭힐 만큼 얽매이지 않았고 덕분에 주변 사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대드의 마음을 헤아린 주변 사람들이 큰 도움과 위안이 되어줍니다. 마지막까지 곁에 머물며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는 거죠.


 모든 인간은 죽기 전까지는 살아갑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정말 소중한 사람이 죽어간다고 해도 삶은 이어지죠. <축복> 속에서도 삶은 이어집니다. 삶에는 갈등과 슬픔과 아픔과 미움이 따릅니다. 거기에 사랑과 기쁨과 웃음과 공감과 위로와 배려와 친절이 섞여들죠.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사람으로 나고, 자라, 살다 죽는 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하나입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무지한 필멸자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일 없이죠. 인식할 수도 없을 만큼 평범하게 지나가 버리는 하루하루의 일상. 특별한 무엇이 아닌 그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거나, '모두 지나갈 거다'라거나,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거나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도 없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일이 매 순간 벌어지고, 지금이 지나가 버리면 모든 게 끝일 것만 같고, 모두가 그런 거라고 해도 위로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축복>이라는 제목은 원제의 의미를 비추어 보면, '떠나는 자의 평화와 남겨진 자들의 안녕 모두를 기원한다'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떠나는 사람이 소중한 만큼, 남겨질 사람이 사랑스러운 만큼 이별은 고통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그들이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는 일, 마지막까지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아닐지.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슬프지만 작위적으로 꾸며낸 눈물이 스며들 틈 같은 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담담히 받아들이고 견디어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였음에도 읽기 힘들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게 됐습니다.

번역된 문장에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많은 그와 그녀와 그와 그녀가 등장했던 거죠. 생략해도 되겠고, 고유명사로 바꿔 적어도 좋았을 텐데, 대드도 그고, 대드 아들도 그고, 목사도 그고, 목사 아들도 그고, 목사를 때린 남자도 그고, 목사 아들을 때린 남자도 그고. 게다가 메리도 그녀고, 메리 딸 로레인도 그녀고, 옆집에 사는 메이도 그녀고, 목사 아내도 그녀고, 또 다른 이웃 윌라도 그녀고, 윌라 딸도 그녀라는 식. 

 솔직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외엔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불평하기도 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보통의 시간.

잊혀서 기억하지도 못할 거의 모든 시간이야말로 삶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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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이야기 - 시대를 움직인 뒤틀린 정의 예문아카이브 역사 사리즈
월러 뉴웰 지음, 우진하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조선 시대 폭군을 떠올려 보면 '연산군'이 생각납니다.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이름이 떠오르죠. 

우연일까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폭군으로 기록하는 동시에 '실패자' 혹은 '패배자'로 적습니다. 만약 이들이 승리했다면, 그래서 그들의 뜻이 실현됐다면, 그때도 이들은 폭군으로 기억됐을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한 번은요.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탄핵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국민 다수는 끊임없이 탄핵을 요구해왔고 마침내 그 결과가 나온 거죠.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제왕적 통치'로 함축되는 불통의 정치였습니다. 

'불통'.

불통은 폭군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태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록할까요.

진실이 밝혀지면 알게 될 일입니다.


 <폭군 이야기>는 신화 속 인물인 아킬레우스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이후까지 3,000년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폭군들을 이야기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영웅이 아닌가?"하고 의아할 수 있겠는데, 그는 영웅인 동시에 '전형적 폭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게 저자의 판단입니다. 판단의 근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무수한 적을 죽입니다. 그 적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미래가 있었겠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죠. 다만 죽이고, 부수고, 파괴하고, 점령할 뿐입니다. 

 그랬던 그가, 분노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의 손에 죽은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죠. 아킬레우스는 기어이 헥토르를 해치웠고, 시신을 끌고 다니며 모욕하기에 이릅니다. 늙은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시신을 돌려주기를 빌기 전까지요.

 뛰어난 재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었지만 오만하고 방자하며 자기만을 생각하는 모습.

이것이 폭군의 대표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라는 겁니다.


 <폭군 이야기>에서 저자는 폭군의 유형을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첫째는 '전형적인' 폭군입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죠. 자기 자신과 측근들을 위해 국민을 착취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이들이 바로 전형적인 폭군입니다. 

둘째는 '개혁형' 폭군입니다. 권력을 활용하되 국가의 발전이나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펴는 지도자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국가 발전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진 자들의 재산을 반강제 혹은 강제로 거두어 간다거나, 국가사업에 국민을 반강제 혹은 강제로 동원한다는 식의 수단을 통해 실제로 발전을 이루어내는 지도자들 말이죠. 

첫째와 둘째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셋째는 앞의 둘과 조금 다릅니다. 저자는 이들을 '영원불멸형' 폭군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건 공포정치를 실행했던 로베스 피에르를 시작으로 유태인 600만 명 이상을 학살한 히틀러와 경제 부흥을 이유로 수천만 러시아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수천만 중국인을 희생시킨 마오쩌둥과 같은 이들이 포함됩니다. 

 이들이 '적'을 죽이는 이유는 필연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끝없는 증오와 잔혹함이 있을 뿐이죠.

'인종청소' 혹은 '인종말살', '대대적이고 광범위한 숙청'을 일삼는 이들이 바로 영원불멸형 폭군들입니다. 


 저자는 영원불멸형 폭군을 특별히 깊이 다룹니다. 이들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으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고 참혹한 살육과 학살, 파괴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어느 폭군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원불멸형 폭군이야말로 다시는 역사 속에 등장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거죠.


 <폭군 이야기>는 단순히 폭군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좋은' 폭정이 존재할 수 있느냐?"라고요.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대략 이런 답이 되겠죠.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렇게 용납되고 시행되는 폭정은 어디에나 있다."라고요.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희생시키는 정책을 찬성합니다. 

한 나라가 전쟁터로 변해도, 그 전쟁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과 아이들이 죽어가도 '어쩔 수 없다'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순간에도요.


사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저자의 시선과 판단은 전혀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특정 국가와 특정 인물에 대해서는 더 적대적이고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했죠. 예를 들면 레닌의 경우 혹독한 비판을 내놓습니다. 

 반대로 미국인이기에 자국 지도자가 세계사에서 행한 악행들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만 해도 그렇습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의 경우 수십만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음에도 말이죠.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저자의 시선이나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걸 잊어버리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악인, 상대적으로 더 나쁜 범죄가 있다고 해서 죄를 저지른 사람이 무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 역시 폭군의 성정을 품게 됩니다. 

 누구든 폭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사실을 꼭 잊지 말아주기를 새삼 부탁드립니다.


<폭군 이야기>에는 많은 폭군이 등장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현대에도 얼마든지 그런 폭정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게 폭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신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폭군이라는 걸 모르는 걸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인식되지 않는 것, 드러나지 않는 일은 결코 해결되지도 해소될 수도 없습니다. 

이 책이 도움이 되는 부분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폭정이고, 누가 폭군인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우리에게 이득이 되기에 폭군이 아니고, 해가 되기에 폭군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정이 언제 내게 돌아올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내일을 약속하며 제한된 자유와 기쁨을 언제 돌려받을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확신이 없는, 알지 못하는 상태의 기다림은 고통이 됩니다. 폭정은 누군가의 고통과 괴로움을 연료로 지속됩니다. 그렇기에 어떤 폭정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폭정은 국민이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도록 만들 수 없다.
<폭군 이야기> 中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폭력, 강압, 고통, 희생.

역사는 이 모든 어둠이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며,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나의 정당한 분노가 타인에게도 정당한 건 아닐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정의가 타인에게는 불의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절대, 틀림없이, 이것이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이 확신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강제하는 순간 폭군은 탄생합니다.

국가, 사회처럼 거대한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와 너, 나와 우리.

어디에서든 폭군은 생겨납니다. 

만드는 것도, 없애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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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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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일.

그 대상이 복잡하고 난해한 존재일 경우에는 특히나 더.

'이해'는 기쁨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가 존재합니다. 

 어떤 인간은 이해할수록, 실상에 가까워질수록 화가 나고, 괴롭고, 슬퍼집니다.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처참하고도 참혹한 외침, 비명이나 다름없는 그 말이 저절로 나오는 그런.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겪은 수용소 생활의 참상을 담담하고, 사실적인 어조로 적어 내려 간 기록입니다. 격앙되거나, 흥분하거나, 울부짖거나, 소리 지르지 않았음에도 가슴 깊은 곳까지 고통과 괴로움이 전해지는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물음은 비단 외국의 사례, 남의 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1980년 광주만 가도, 1987년 서울에서도, 2014년 진도 앞바다에서도, 2015년 광화문에서도, 2017년 오늘도 우리는 이 물음과 마주해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인간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그럴 수 있다고, 그렇게 들고일어날 것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유대인 학살을 증언하는 인물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보다 더 사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믿을 수 있는 것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없이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 

그런 스스로를 경멸하고 비참하게 여기면서도, 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속이고 훔치는 일을 계속하는 자기모순.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상태, 말 그대로 '파괴'하는 일에 성공한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전쟁이고, 독일의 나치였습니다. 


 헤밍웨이의 멋진 말.

"인간은 파괴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는 말도 아우슈비츠에서는 통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패배했을 뿐 아니라 철저하게 파괴당한 산 증인들이 바로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니까요.


 340페이지 분량의 어렵지 않은 단어로 적어 잘 읽히는 이 책이 실제로는 까다롭고 읽기 어려웠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꾸 멈춰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인간'일 텐데, 그렇게 여러 차례 인간을 이야기해주고 있는데도 도무지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가해자들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나, 다른 존재였다면 오히려 이해가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왜 외딴곳에서 마주쳤을 때 가장 두려운 존재가 인간인지 확실하게 알려줬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두려워했던 겁니다. 겁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일 테니까요.


 <이것이 인간인가>가 단순히 학살의 폭력성과 나치의 잔인함만을 이야기했다면 이렇게까지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겁니다. '이것이 인간인가'하는 물음은 조금 더 근본적인 데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치의 바닥, 한계까지를 보여주는 거죠. 


 빅터 프랭클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기를 잃지 말라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했다면, 프리모 레비는 무엇도 믿을 수 없다, 다만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을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변화란 나쁜 것이다."

수용소에서 무엇인가가 변한다는 건 적응을 다시 해야 한다는 의미 이전에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진다는 걸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변화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 되기 쉽고, 결국 나쁜 것이 되어 버리는 거죠.


 프리모 레비의 입장에서 빅터 프랭클은 운이 좋았던 셈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자기 관리를 잘해도, 누군가에게 잘못 찍히면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을 선사받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것이 인간인가>는 '인간이라면 이러할 것이다'라는 모든 가정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예측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거죠. 


차라리 몰랐다면,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도저히, 도무지 인간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저것이 인간인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만인의 행복과 평화를 파괴하더라도 나 하나의 즐거움을 누리려 하는 자들.

그들 역시 인간이라는 게 두렵고 또 화가 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피해국들에 사과를 하고, 배상금을 치르느니 마느니 하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사과도 배상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라진 생명들을 되돌리지는 못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 들어간 사람들은 우스개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들어갈 때는 문으로 들어가지만 나갈 때는 굴뚝으로만 나갈 수 있다."라고요.


'굴뚝으로 나간다'는 말은 소각되어 연기가 되어야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죽는다는 거죠. 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가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게 된 거고요. 


 아주 낙관할 수는 없지만 1945년의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면 헬조선 운운하는 대한민국은 아직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아질지 어떨지를 결정짓는 건 지금부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이죠. 


 이런 식으로 안도하게 되어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우리를 살리는 것도, 구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입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막무가내로 구는 이들이 있지만 광기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비록 인간을 죽이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을 파괴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인간을 구하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우리는 우리의 미래, 내일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파괴되었다고 말한 프리모 레비는 오랜 시간 살아남아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결국 자살하기 전까지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 더 나은 세상을 꿈꿨습니다. 


 개인, 한 인간이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작고 또 사소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이렇다, 인간은 저러해야 한다는 정해진 관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더 나아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인간, 역사의 주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이것이 인간인가> 中

하지만 이어서 이렇게 적습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中

로렌초는 수용소 수용자는 아닙니다. 이탈리아 노동자로 빵을 주거나 편지를 전해주는 일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해준 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한 사람이 자신을 살게 했다고,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줬다고 프리모 레비는 말합니다. 


 누군가는 모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합니다. 누군가는 인간임을 포기하고 얻는 이익을 위해 인간임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떤 순간에도, 마지막까지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가 아닌, 서로 다른,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이 밝아지면 그림자도 짙어지지만, 그림자가 아무리 짙어져도 빛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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