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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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쓰기를 멈춘 지 16일째인 오늘, 새삼스레 '어떻게 쓰는 거더라?'하는 당황 섞인 반문을 던지고 말았다. 

아, 읽기든 쓰기든 꾸준히 계속하는  중요함을 다시 깨닫는다. 


 한 시간 넘게 방황을 하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쓰기 시작한다. 

흐려진 기억을 더듬으며, 잊어버린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작.


 나는  세상에서 나보다  중요한  만들고 싶지 않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고, 설혹 있다 해도 무의미하므로.


이런 나이기에 자먀찐이 만들어낸 세계는 지옥의 풍경처럼 들이닥쳤다.

개인보다 전체가, 자유보다 하나가  중요한 세계. 

저마다 개성을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던 과거를 미개하다 말하는 세계가 '우리들'의 세계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대는 지금, 21세기로부터 적어도 천 년 이후다. 200년 간 지속된 전쟁으로 세계 인구의 10분의 2만이 살아남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외부와 격리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그 결과 현재의 세계,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게 된다. 

 『우리들』의 세계는 자유도 소유도 사랑도 없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준 세계와 무척 닮아있다. 시기 상으로는 올더스 헉슬리보다 자먀찐이  앞서 있기에, 자먀찐의 세계관에 올더스 헉슬리가 영향을 받았다고 봐야겠다. 

 디스토피아 소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조지 오웰의 <1984>. 성적 쾌락이 제한된 <1984>와 달리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쾌락이 권장된다. <멋진 신세계>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과 방법, 장소가 제한되어 있고, 반드시 신청을 거쳐야만 한다. 질투나 소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나' 혹은 '개인'이 아닌 '우리'이기에 우리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없다. 

 자유를 추구하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일이기에 통제받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없다.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다만 D-503이라는 숫자가 있을 뿐.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역시 아무 의미도 없는 편이  소설에  어울린다. 의미를 부여한 순간 개성이 생겨버릴 테니.

 D-503은 우주선 '인쩨그랄호'를 설계하는 수학자다.  세계에 아무런 불만도, 위화감도 없이 하루하루 생활과 일에 만족하며 자부심까지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활에 위기가 닥쳐온다.  남자의 인생이 위기 혹은 변화를 맞는 이유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조금 식상한 이야기일  있지만 사랑에 빠졌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D-503도 그랬다. I-330이라는 여자가 그의 인생에 뛰어들면서 만족도, 평화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D-503이 느끼는 감정은 사랑인지, 사랑이라면  사랑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개성도, 자유도 없는 세계에서 변하는  가능하기는  건지.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궁금하다면 읽어보기를.


『우리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1984>나 <멋진 신세계>보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30년 가까이 일찍 발표된 작품이다. 1920년에 완성됐지만 러시아에서 발표되지 못하고, 영역본으로 출간되어야 했던 불운을 겪은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지 오웰의 <1984>에 영향을 줬다고 하는데, 『우리들』에 나오는 '은혜로운 분'과 '보안 요원'들은 <1984>  빅브라더와 사상 경찰을 떠올리게 한다. 


100여 년 전에 완성된 소설에 공감하게 되는  '개인의 소멸은 미래 이야기일까?'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장이 있다.

사소함에서 위대함으로 이어지는 당연한 길은 자신이 그램이라는 사실을 잊고 1톤의 백만 분의 1 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들』중

1그램은 백만 분의 1톤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1톤은 백만 개의 1그램이 더해진 결과다. 이건 1+1=2라는 결과와 다름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1그램은 1그램이 아니다. 자신이 그램이라는 사실은 잊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램이 아니라 백만분의 1톤이기에. 

 이중사고를 아는 사람이라면 납득할  있으리라.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우리가 '나'가 모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잊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나'가 모여 '우리'가  후에는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거다. 결국 남는  '우리'가 된다. '나'는 있으나 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전체주의 사상과 함께 눈에 띄는  '기계'의 등장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인간화한 기계와 기계화한 인간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우리들』중

인공지능과 기계 발전이 인간의 지위를 위협하게  지금에  크게 와 닿을 문장이다. 적어도 현재,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같은 '기계'와 '기계'같은 '인간'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도 온라인 상에서는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조금  시간이 흐른 미래에, 인간과 기계가 동일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불가능할  뭔가?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음'을 뜻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도 존재할  없는  된다. 전제가 되는 유토피아가 없이 전제에서 확장된 디스토피아가 존재할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거나 미리 절망하지는 말기를.

 <유토피아>를 언급했으니   이야기하자면, 유토피아를 읽으며 가장 의아했던 존재가 바로 '노예'였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생기지 않는 법이다. 누구도 가축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으며, 식사를 준비하지 않는데 어떻게 먹을  생길  있겠는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모를까.

 유토피아에도 범죄자와 포로는 존재한다. 그들은 벌로써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차별 없이, 모두가 천국에서의 생활을 하는  적어도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것보다는  비슷비슷할  상대적 박탈감이나 불만족이 적어진다. 


 결국 1920년에 완성된 『우리들』이 러시아에서 출간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의 세계를 전복하려는 혁명 세력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야기는 권력자들이 좋아할 이야기가 못됐던 거다. 특히 혁명으로 세계를  전복시킨 권력자들이라면 더욱더 경계했을  분명하다. 


개성과 인격을 스스로 말살시키고, 자유로 내팽개치고 전체, '우리'의 삶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시대. 

언젠가 그런 시대가 정말 찾아올까. 

은연중에 강요되고 추종되는  하나의 진리,   사람의 위대한 존재. 

그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세계가 정말 열릴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다. 

우리들 같은 건,  다음의 문제일 뿐.

오래간만에 감상문을 적었더니 정말 터무니없는 횡설수설만 늘어놓고 말았다.

이래서 꾸준히 적어나가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거란  새삼 깨닫는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우리들』.

감상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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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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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과 어머니의 근친상간.

형제 살해.

남편 살해.

그 모든 공모와 과정, 결말까지를 지켜보는 무력한 아들.

『넛셸』은 이야기 속 인물과 사건의 발단, 진행, 결말까지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과 닮아 있습니다.

 작가 이언 매큐언의 생각, 출판사의 의지가 어떻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생각이기에  이 소설이『햄릿』을 재해석한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읽은 이, 독자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땅콩 아니, 호두 얘기부터 해야겠습니다.


 호두는 영양가 높은 견과류의 하나죠. 뇌와 닮은 알맹이 모양이 불쾌할 법도 한데 두뇌 발달에 좋은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는 결과로 오히려 그렇게 생길만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합니다.

 사람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 호두는 나무에서 열립니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어서 수정이 된 결과 호두 열매가 맺히죠. 처음 열린 열매에서 적당한 숫자가 떨어지고 남은 열매만이 영글어 호두가 됩니다. 

이런 거야 뭐, 다 아는 얘기죠. 


 호두나무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보기에 호두나무는 의지도 없고, 사고도 불가능하기에 큰 차이가 생겨납니다. 『넛셸』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 정도만 적어보기로 합니다.


 첫째, 호두나무는 개개의 호두 열매를 걱정하거나 마음 쏟지 않습니다. 수정이 안 되면 썩고, 바람을 견디지 못하면 떨어지죠. 마지막까지 나무에 붙어 있었다 해도 다람쥐 같은 천적을 막지는 못합니다. 결국 정말 많은 열매 중에 일부만이 영근 호두가 되고, 그중 극히 일부만이 뿌리를 내려 호두나무가 됩니다. 

 호두나무에게는 모정이란 게 없습니다. 뿌리내리고 열매 맺기를 매해 거듭할 뿐이죠.

 어머니는 다릅니다(모든 어머니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지만). 자기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을 느끼고, 염려하며, 생각하고 마음을 씁니다. 약물이나 담배, 알코올을 자제하고, 나쁜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것도 피하죠. 

 어머니는 아이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 줍니다. 그 차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근거가 호두의 껍질입니다. 호두는 두툼한 겉껍질과 단단한 속껍질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아는 무르고 연약한 상태로 자라고, 태어나죠. 그 차이를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생물학의 특성이겠지만, 존재 본질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둘째, 호두나무에 열린 호두 열매는 발생부터 영글 때까지 전적으로 무기력합니다. 양분이 적게 올라온다고 투덜댈 수 없고, 위치가 불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움직일 수도 없으며, 호두나무에게 자기 존재를 인식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와 바람의 위협에 스스로 맞서고 지켜야 하며, 보호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죠. 

 호두 열매에게는 애착이란 게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나, 영글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죠.

 태아는 다릅니다. 일정 단계 이상으로 발달하면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태동이라는 방법으로요. 어머니의 언행, 즐겨 듣는 음악, 좋아하는 음식에 반응함으로써 어머니의 행동, 습관, 취향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입덧이라는 방법이죠.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에서 인간과 호두나무 사이에 차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호두나무가 호두 열매에 마음을 쏟지 않듯 어머니가 태아에게 마음을 쏟지 않고, 호두 열매가 호두나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듯 태아의 모든 의지가 묵살되고 거부된다면요?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에게 단순한 장해물, 방해꾼, 귀찮은 짐덩어리가 된다면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순간 이야기가 시작되게 됩니다.

바로 『넛셸』이야기가요.


 시작하며 적었듯 이야기는 제법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만삭에 가까운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생, 태아의 삼촌과 불륜을 맺고 있습니다. 태아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사랑이 클수록 어머니는 아버지를 역겨워하고 보기 싫어하죠. 어머니가 사랑 대신 선택한  삼촌과의 욕망과 쾌락입니다. 만삭이 가까워진 시기에 섹스를 피하거나 조심해야 함에도 격렬한 관계를 계속 갖죠. 

 이쯤에서 이름을 밝히자면, 어머니의 이름은 트루디, 아버지는  케언크로스, 삼촌은 클로드입니다. 

이야기는 아버지,  케언크로스 살해 모의로 시작합니다. 어머니 트루디가 가담하고, 어쩔  없이 태아인 '나'까지 휩쓸린 살인 계획으로. 투루디는 얼마간 망설이는 듯 보이지만 마음을 굳힌 뒤로는 뱃속의 태아를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호두나무가 호두 열매를 생각하지 않듯이.

 태아가 호두 열매 취급을 받게 되면   있는  거의 없어집니다. 고작 이런  가능할 뿐이죠.


생각해보라. 태아가 하는 일이라곤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뿐이고, 성장도 의식적인 행위라고 하긴 어렵다. 순수한 존재의 기쁨, 별다르지 않은 나날의 지루함. 연장된 희열은 곧 실존적 권태다. 여기 갇힌 시간이 감옥살이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여기서 고독의 특권과 사치를 누려야 한다.
『넛셸』중

태아는 양막에 싸여 가죽  장에 불과하지만 벗어날  없는  속에 갇혀서 단지 영양을 공급받으며 타의에 의해 성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거기엔 기쁨도, 희망도, 미래도 없죠.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실존의 권태에 시달려야 하는 절망.  절망 속에서 홀로 떨어야만 하는 겁니다. 

 호두 열매는 영글어 땅에 떨어진 다음, 싹을 틔울  비로소 단단한 껍질을 벗습니다.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다고 해서 호두나무로 성장할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갇힌 세계에서 생명으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있게 되는 거죠.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서야, 세상에 태어나서야 완전한 생명으로, 존재로 인정받게 됩니다. <데미안>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알이 깨어져야 새가 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호두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호두 열매가 싹을 틔우고, 태아가 태어난 다음의 이야기를 저로서는 상상할  없으니까요.


 『햄릿』이야기를 조금 할까 했는데, 그전에 '사고하고 고뇌하는 태아의 존재'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넛셸』을 함께 읽을 독서 모임 회원  분은  이야기의 배경, 화자가 뱃속의 태아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언 매큐언은 낙태에 반대하는 모양이다."라고요.

 정말 그럴까 싶기는 하지만 들어보면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 뱃속의 태아가 사고하고 고뇌하며 고통과 권태를 느낄  있다면, 그의 존재와 권리는 인정받고 보호되어 마땅합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분명히 무시할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미뤄뒀던 『햄릿』얘기를 조금 하고 감상을 마치기로 하죠.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는 아버지인 살해된 왕이 유령으로 나타나 햄릿에게 진실을 일깨웁니다. 햄릿은 고뇌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결심하죠.  실행의 결과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의 비극입니다. 

 햄릿이 복수를 포기했거나, 절망과 치욕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겁니다. 작가의  앞에서 햄릿은 호두 열매처럼 무력했겠지만요.


『햄릿』을 모른다고 해도 『넛셸』을 읽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흔히 뉴스를 통해 접하는 비정한 살인 사건과 의 전말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딱 하나, 뱃속의 태아가 그 사건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요. 하지만 『햄릿』을 안다면 작가가 이야기 곳곳에 숨겨둔 장치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있을 겁니다. 

  

왜 이 이야기의 제목이 『넛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알게 될 수도 있고, 영영 모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 앞에서 호두 열매처럼 무력하니까요. 

언젠가 두툼한 겉껍질과 단단한 속껍질을 벗고 세상과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면, 그때는 조금  고민해봐도 좋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문제가 나의 것이 아님에 조금은 안도하고 감사하며, 감상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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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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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나단 노엘.

직업, 은행 경비원.

나이, 50대.

소원, 7.5평방미터짜리 아파트를 소유하여 남은 평생을 평화롭게 지내기.

가족 관계, 이민  누이동생.

친구, 특정한 인물 없음.

인생 최대 위기, 출근을 준비하던 아침, 아파트 복도에 들어와 있는 비둘기와 마주친 일.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세상이 끝나버린  절망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약하다거나, 유난히 비관적인  아닙니다. 

단지, 조금  예민하고, 섬세하며, 일상이라는 평화를 몹시 아끼고 사랑하고 있을 뿐이죠.

일상이 너무 소중해서, 영원히 흐트러지지 않기를, 변하거나 끝나지 않기를 몹시도 바랄 뿐입니다.


 조나단 노엘 역시 그런 사람의 하나입니다.

오래전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누이동생과도 헤어진 뒤에 마지막으로 믿었던   아내였던 여자의 배신을 경험한 이후, 조나단은 더는 세상에 많은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박하고  소박하게, 다만 지금 살고 있는 7.5평방미터짜리 아파트를 자기 소유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30년 넘게 해온,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경비 일에서 퇴직하는 날을 기다리며,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죠.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건, 어느 평화로운 금요일 아침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장실에 가려던 조나단은 복도  복판에 앉아 있는 비둘기  마리에 얼어붙고 맙니다. 

 고작 비둘기  마리.

어디에나 있는 회색 날짐승 하나가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데 걸린 시간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조나단은 30년 넘게 살아온 집을 영원히 떠날 생각, 불안, 초조, 긴장, 좌절, 절망, 죽음까지를 생각하죠. 


  오래전에는, 사실은 얼마 전까지도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조나단을 나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작, 비둘기  마리인데.'하고요.

조나단이 삶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둘기  마리 때문에 포기할 정도의 삶이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조나단은, 자기의 삶, 쓸쓸할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닐까."


 다른 사람, 세상,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서 비참하게 느껴지는 삶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은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독하고 고독해서, 위태로워 보일 정도의 삶이라고 해도 말이죠.


나는 <비둘기>에서 너무나 작고, 사소해서 무시하기 쉬운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평소라면 너무나 당연했을, 그래서 고마움은커녕 번거롭고 귀찮게 여겼을 일들조차 소중하게 느끼게 됩니다. 

당연할 거라 믿었던 내일, 계속될 거라 믿었던 일상이 얼마나 간단히 부서질  있는지 깨닫습니다.

 순식간에 불안에 집어삼켜졌다가,   아닌 일을 계기로 회복할  있음도 알게 됩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행복이라고 이름 짓는 일들의 허허로움과 착각에 생각이 닿습니다.

행복은 불변하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책 속의 이야기, 누군가의 일화를 더하면 감상을 얼마든지 늘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 두기로 합니다.

<비둘기>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시간, 길어도 하루면 충분히 읽을  있으며 어렵거나 복잡한 이해를 요구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집채만 한 바위가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도 우리는 간단히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넘어져 다치기도 하죠. 

하지만 너무나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보통은 조금 다치는 정도에서 털고 일어날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작은 돌부리 덕에  바위를 피할 수도 있겠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기만 한 삶도 좋을 겁니다. 

그러나 가끔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 작은 위기들을 넘어서는 경험은 우리가 잊고 지낸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떠올리게 도와줄 거예요.


다른   포기해도 좋습니다마는, 자신만은 간단히 포기하지 마세요. 

비둘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언제든 날아들 수 있습니다. 

비둘기는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갈 뿐, 누구를 훼방하거나 위협하거나 놀라게 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나의 삶과, 나의 일상과, 나의 지금과,  모두를 더한 나를 사랑하시길 바라요.


불안도, 두려움도, 사랑도, 모두 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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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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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월도 끝.

여름은 시작도  했건만 자꾸 땀이 나고 낮에는 벌써 더위에 지친다. 

이런 날에는 시원한 얼음이나 추운 겨울을 떠올렸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떠올리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혼자 지내기 좋은 계절이란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쩌면 한 걸음만 내딛는다면, 혹은 손만 내민다면 벗어날 수 있을 시간을 유예하고 있다. 마치 시간이 타버려서 재만 남기를 기다리듯, 마치 조금 뒤에는 시간의 재마저 흩어져 사라지기를 바라는 듯이. 
<미상> 시작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제대로  소설일 리가 없다. 그냥 꿈, 개꿈, 초여름밤의 신기루로 끝날 일이다. 하지만  꿈이 이유도 없이 괜히 꾸게   아니다. 이유는 있다.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느 소설?

하루키의 소설이다.

『상실의 시대』라고도 하고, 『노르웨이의 숲』이라고도 하는 소설이다.

지금도  이야기가 다른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해두지만, 같은 이야기다. 같은 작가가 쓴, 제목만 달리  같은 작품이다.


 처음과 두 번째는 『상실의 시대』로 읽었다.  2 무렵이 처음이었고, 찾아보니 2013년이  번째였다.

세 번째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었다. 같은 작품인데도 분위기가  다르다.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알아두면 좋을  같아 보태둔다.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 생각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뭐, 보나 마나 섹스 장면마다 침을 삼키며 종이가 뚫어져라 읽었으리라. 하지만 섹스 장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있었다. 

 화자인 '나', 와타나베의 성격과 태도다. 이런 인간이 현실에 존재할  없다고 생각될 만큼, 독특했다. 일종의 동경 효과겠지만, 그런 독특한 와타나베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점을 발견했을  무척 반갑고 위안이 됐다.


 고등학생 때 와타나베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둘 있었다. 한 명은 기즈키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평범한 존재인 '나'와 기꺼이 어울리는 친구다. 둘도 없는 친구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다른 한 명은 나오코다. 기즈키의 여자 친구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으며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틀림없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거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비극이 찾아든다. 고 2, 열일곱. 기즈키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죽어버린다. 자살이었다. 

 그 후로 2년, 와타나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나오코와도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는다. 기즈키의 죽음이 와타나베의 일부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고, 와타나베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쿨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우연이었을까, 어느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재회한다. 기즈키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우연한 만남 이후  사람은 오래, 많이 함께 걷는다. 도시 곳곳을, 여기저기를,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이 다만 걷고  걷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뭐,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으며 떠올린 생각 하나는 확실히 기억한다. 그때의 나를 사로잡았던 최대의 화두이자 바람이었던 소망이었으므로. 

 와타나베와 재회한 나오코는  가지 부탁을 한다. 그중  번째 부탁은 이런 거였다.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줄래?"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열여덟 소년이었던 나는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나를 기억해줄 누군가를 찾고자 했다. 기억되는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바람을 잊고 살게 됐지만(정말, 기억되거나 잊히거나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잊고 지냈다), 그때는 그게  간절했다.


  다시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고, 예전으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고등학교 시절들. 뭔가 뒤죽박죽 엉망이라서  순간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기억의 홍수' 같은 거였다. 지나갈, 그런 혼란이었다.

  

 와타나베 주변에는 기이한 인물이 유난히 많은데 나가사와라는 인물도 무척 독특하다. 도쿄대 생으로 똑똑하고, 부유하지만 도덕성이 대단히 결여된,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이기적인 동시에 완고하고, 누구를 신뢰한다거나 누구에게 의지할 줄도 모르는 그런 남자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음에도 서로에게 끌리는데, 나가사와는  이유를 둘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점이다.

 "나와 와타나베가 닮은 점은 말이야, 자신에 대해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점이 다른 인간들하고 달라. 다른 놈들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애를 태워. 그렇지만 나와 와타나베는 그렇지 않아.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 남은 남이라고."
『노르웨이의 숲』 중

 확실히 둘은 닮았다. 나가사와가 말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특히.  역시 나가사와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강한 인간은 못 되는 존재였으니까. 재밌는  나가사와의 말에 와타나베가 보탠 말이  생각에 무척 가깝다는 거다.

"설마요.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해 안 해줘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상대도 있는걸요. 다만 그 외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로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체념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가사와 선배가 말하듯이 아무한테도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노르웨이의 숲』 중

 이 정도다.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정말 이해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는 너무나 힘들고 쓸쓸해지고 마는 거였다.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많은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고, 조금  참게   달라졌을 뿐이다.


 하루키 작품은 '가벼움'을 넘어 '경박하다'거나 '천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물이, 이야기가 그런 혹평으로 가치를 잃는 일은 없다. 

『노르웨이의 숲』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불완전함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종종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중요한 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불완전한 타인 혹은 나를 동정하지 않는 거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사랑하는 거다. 


 사실 방법은 그것 하나다. 

사랑하는 것.

예전에는 사랑이라는 결론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다만 허덕이며, 기억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시간은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지나간  돌아오지 않는다. 억지로 되돌리려 해도 점점  멀어질 뿐이고,  빨리 지칠 뿐이고, 공허해질 뿐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오래 걸리더라도, 다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없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은  몰이해가 영원히 지속된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대로 '순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당연히  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나가사와는 '이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넌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받기를 바라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나가사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해는 '받고 싶다'라고 해서 받을  있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왔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인간인 이상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불완전한 존재라도 이해받고 싶다고 느끼는  자연스러운  아닌가? 

그렇게 바라는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바람은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몹쓸 짓이었다. 

 이해는 바라거나, 구하는  아니라는 사실로 돌아가면 간단히 결론이 나오는 문제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전혀, 영원히 이해할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한순간 '그런 거였나?'하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경험. 그런 거다. 대부분의 이해는 그렇게 조금 늦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찾아든다. 슬퍼할 일도, 안타까워할 일도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바로 이해다.


  2013년에 감상을 남긴 나는 '10년 후에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를 궁금해했다. 

4년 후의 '나'가 느낀  지금까지 적어 두었다. 이제 2013년의 나에 이어 2017년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 6년 후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전혀 모르겠다. 감도 오지 않는다. 상상도   없다.

그런 거다. 

우리가 알거나 안다고 믿을  있는  모두 과거에 있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해도 달리 방법은 없다.

  

 기억해야    가지를 적어본다.

첫째,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둘째, 불완전한 나지만 동정해서는  된다.

셋째,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지 말아라.

넷째, 이해는 받고 싶다고 받아지는  아니다. 

다섯째,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를.


 보통의 감상도 그렇지만  감상은 유난히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나를 위해 읽었고, 나를 위해 써낸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나의 편지와 다르지 않은 그런 이야기라는 얘기다.

  

 그나저나 『상실의 시대』는 애초에 의미가 전혀 달랐고, 『노르웨이의 숲』도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노르웨이 목재 가구' 정도의 의미라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솔직히 제목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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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09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장물방울님,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독서모임 하루키가 책을 벌어다 주었네요 :>

대장물방울 2017-06-09 15:15   좋아요 0 | URL
오잉? 오, 몰랐는데 고맙습니당. ㅎㅎ
달궁독서모임 덕분이네요. :)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기본적으로 '작가'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위를 넓히면 '작가'로 인정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하나만 적어두기로 합니다.


'쓴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는 게 아닌 이상, 개인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작가라고 해도 쓰는 건 '자기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독백'. 

쓴다는 건 그런 겁니다.


그중에 누군가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글, 사실을 날조하고 기만하는 글, 핵심을 흐리고 선동하는 글을 쓰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쓰는 이만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는 엄연히 읽는 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위 '좋은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력.

진실된 글, 좋은 글은 감동도 주지만 안목도 높여줍니다. 

거짓과 기만이라는 진흙 속에서 사실과 진심이라는 진주를 알아볼  있게 하죠.


 조지 오웰의 글은 좋습니다.

매우, 몹시, 대단히 좋습니다. 

놀라운 건, 글보다  좋은  조지 오웰의 삶이라는 겁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남긴 많은 에세이에서 스물아홉 편을 뽑아 먼저  순서로 모아둔 책입니다.

제목이 '나는  쓰는가'라서 글 쓰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인가 싶어 샀다는 분들도 계시던데, 그분들조차  착오, 착각이 기쁨이 됐을 만큼 오웰의 글은 아름다웠습니다.


스물아홉 편의 에세이에는 조지 오웰의 삶, 생각과 함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글이 좋은 이유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조지 오웰은 단순히 '기록된 역사'를 가져다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보고, 듣고,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사실만 담았다면 지금만큼 조지 오웰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웰의 글에는 사랑과 애정이, 소외되고 잊힌 자들을 향한 진심이 담겨 있기에  좋아졌던 거죠.


 연대순으로 실린 오웰의 에세이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때쯤 어떤 작품을 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확인해보면 어김이 없습니다. 


 조지 오웰은 인도에서 태어나 식민지 경찰로 버마에서 근무했으며, 사회주의자로서 카탈로니아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조국 영국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무조건 감싸는  아니라 애정 어린 질책과 정당한 비판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취임  미국에서 다시금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1984년>과 대표작인 <동물 농장>이 단순히 디스토피아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영국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균형 잡힌 시선과 넓고 깊은 사유, 과감히 현장으로 뛰어가는 결단력과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낼  있는 능력까지. 조지 오웰 같은 작가는 좀처럼 다시 만나기 어렵겠죠.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를 꿈꾸는 이가 읽어도 좋겠지만, 정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한 정치, 누구를 위한 나라, 어떤 목적의 전쟁, 무슨 의도의 사상.

약자들,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는 조지 오웰의 따뜻한 마음을 그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솔직히  감상문은 너무 쓰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무엇을 쓰는  능숙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책을 읽으며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린 탓입니다. 

벌써  번이나 쓰기를 그치고 다른 짓을 하다가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이런 미숙함이 부끄럽지만 조금만  적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쓰는가>에서  문장만을 꼽으라면  문장으로  생각입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나는  쓰는가> 중


오웰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잊었지만 분명한  언어와 생각, 어느 것도 타락해서는  된다는 겁니다. 

 요즘 세상은 '어쩔  없다'며 자꾸만 생각의 타락을 정당화합니다. 타락한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묘하게 뒤틀린 언어를 가져다 쓰고는 합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키고, 타락한 언어가 다시 생각을 타락시키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직시해 봅시다. 

조지 오웰이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던 조국 영국을 직시한 것처럼요.

수년간 불가능할 것만 같던 비정상의 정상화. 

우리는 너무나 간단히, 허탈할 만큼 쉽게, 그러나 그만큼 기쁘게 변해가는  보고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진 것. 

모든 시작은 생각하는 주체가 달라졌다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를 봅시다. 

우리는 이제 이해할  있습니다. 

모국어처럼(이전의 그들도 물론 모국어를 쓰기는 했습니다만) 우리는 간단히   있습니다.


유체이탈, 얼버무림, 횡설수설, 묵묵부답, 침묵일관. 

우리는 이러한 행동에 '비정상'이라는 언어를   있게 됐습니다. 


조지 오웰은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약자들, 노동자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1984년>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노동자들만이 희망'이라고 믿었듯 현실의 조지 오웰 역시 그들만이 희망이라고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사랑이, 애정이 <나는  쓰는가>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묻고는 합니다.


"나는 왜 읽는가?"

이런 만남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앎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반갑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나마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쓰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 쓰는 이는 세계와 시대와 역사의 산물입니다. 

어떤 글, 무슨 이야기를 쓰는 많이 쓰는지를 보면  세계와 시대를 이해할  있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아픕니다. 

가볍고, 말랑하며, 위로와 위안, 힐링을 위한 언어가 넘쳐흐릅니다.

언어는 생각을 타락시킬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휘말려 다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중심을 잡아야만 합니다.


 무엇이 좋은 글이고, 무엇이 좋지 않은 글인지.

어떤 글이 진실이고, 어떤 글이 거짓인지.

어떻게 진심과 기만을 가려낼지.

 판단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자 책임입니다. 


 혼란한 시기일수록 안목과 통찰력이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지금이 그런 시기라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어린 시절을 회상한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에세이에서 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누가 저지르는 무엇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 그냥 일어날 수도 있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쓰는가> 중

불가항력처럼 착각이 강요되는 날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말 것이며, 세상의 밝음뿐 아니라 어두움, 표면과 이면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안목을 지니시기를.

 그 안목을 키우는데 오웰의 통찰이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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