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본적으로 '작가'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위를 넓히면 '작가'로 인정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하나만 적어두기로 합니다.


'쓴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는 게 아닌 이상, 개인적이고 독립적입니다. 

제 아무리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작가라고 해도 쓰는 건 '자기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독백'. 

쓴다는 건 그런 겁니다.


그중에 누군가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글, 사실을 날조하고 기만하는 글, 핵심을 흐리고 선동하는 글을 쓰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쓰는 이만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의심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는 엄연히 읽는 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위 '좋은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력.

진실된 글, 좋은 글은 감동도 주지만 안목도 높여줍니다. 

거짓과 기만이라는 진흙 속에서 사실과 진심이라는 진주를 알아볼  있게 하죠.


 조지 오웰의 글은 좋습니다.

매우, 몹시, 대단히 좋습니다. 

놀라운 건, 글보다  좋은  조지 오웰의 삶이라는 겁니다.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이 남긴 많은 에세이에서 스물아홉 편을 뽑아 먼저  순서로 모아둔 책입니다.

제목이 '나는  쓰는가'라서 글 쓰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인가 싶어 샀다는 분들도 계시던데, 그분들조차  착오, 착각이 기쁨이 됐을 만큼 오웰의 글은 아름다웠습니다.


스물아홉 편의 에세이에는 조지 오웰의 삶, 생각과 함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글이 좋은 이유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조지 오웰은 단순히 '기록된 역사'를 가져다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보고, 듣고,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사실만 담았다면 지금만큼 조지 오웰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웰의 글에는 사랑과 애정이, 소외되고 잊힌 자들을 향한 진심이 담겨 있기에  좋아졌던 거죠.


 연대순으로 실린 오웰의 에세이를 읽어나가다 보면 이때쯤 어떤 작품을 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확인해보면 어김이 없습니다. 


 조지 오웰은 인도에서 태어나 식민지 경찰로 버마에서 근무했으며, 사회주의자로서 카탈로니아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조국 영국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무조건 감싸는  아니라 애정 어린 질책과 정당한 비판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취임  미국에서 다시금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는 <1984년>과 대표작인 <동물 농장>이 단순히 디스토피아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영국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균형 잡힌 시선과 넓고 깊은 사유, 과감히 현장으로 뛰어가는 결단력과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낼  있는 능력까지. 조지 오웰 같은 작가는 좀처럼 다시 만나기 어렵겠죠.


 <나는 왜 쓰는가>는 작가를 꿈꾸는 이가 읽어도 좋겠지만, 정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한 정치, 누구를 위한 나라, 어떤 목적의 전쟁, 무슨 의도의 사상.

약자들,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는 조지 오웰의 따뜻한 마음을 그들은 알아야만 합니다.


 솔직히  감상문은 너무 쓰기가 어렵습니다.

아직 무엇을 쓰는  능숙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책을 읽으며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린 탓입니다. 

벌써  번이나 쓰기를 그치고 다른 짓을 하다가 돌아왔는지 모릅니다. 

이런 미숙함이 부끄럽지만 조금만  적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쓰는가>에서  문장만을 꼽으라면  문장으로  생각입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나는  쓰는가> 중


오웰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잊었지만 분명한  언어와 생각, 어느 것도 타락해서는  된다는 겁니다. 

 요즘 세상은 '어쩔  없다'며 자꾸만 생각의 타락을 정당화합니다. 타락한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묘하게 뒤틀린 언어를 가져다 쓰고는 합니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키고, 타락한 언어가 다시 생각을 타락시키는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직시해 봅시다. 

조지 오웰이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던 조국 영국을 직시한 것처럼요.

수년간 불가능할 것만 같던 비정상의 정상화. 

우리는 너무나 간단히, 허탈할 만큼 쉽게, 그러나 그만큼 기쁘게 변해가는  보고 있습니다.


생각이 달라진 것. 

모든 시작은 생각하는 주체가 달라졌다는  하나였습니다. 

그들이 쓰는 언어를 봅시다. 

우리는 이제 이해할  있습니다. 

모국어처럼(이전의 그들도 물론 모국어를 쓰기는 했습니다만) 우리는 간단히   있습니다.


유체이탈, 얼버무림, 횡설수설, 묵묵부답, 침묵일관. 

우리는 이러한 행동에 '비정상'이라는 언어를   있게 됐습니다. 


조지 오웰은 거의 모든 에세이에서 약자들, 노동자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1984년>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노동자들만이 희망'이라고 믿었듯 현실의 조지 오웰 역시 그들만이 희망이라고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이, 사랑이, 애정이 <나는  쓰는가>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묻고는 합니다.


"나는 왜 읽는가?"

이런 만남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앎이 기쁘기 때문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반갑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고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나마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쓰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 쓰는 이는 세계와 시대와 역사의 산물입니다. 

어떤 글, 무슨 이야기를 쓰는 많이 쓰는지를 보면  세계와 시대를 이해할  있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아픕니다. 

가볍고, 말랑하며, 위로와 위안, 힐링을 위한 언어가 넘쳐흐릅니다.

언어는 생각을 타락시킬  있다고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휘말려 다니지 않기 위해, 우리는 중심을 잡아야만 합니다.


 무엇이 좋은 글이고, 무엇이 좋지 않은 글인지.

어떤 글이 진실이고, 어떤 글이 거짓인지.

어떻게 진심과 기만을 가려낼지.

 판단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자 책임입니다. 


 혼란한 시기일수록 안목과 통찰력이 간절해지기 마련입니다.

지금이 그런 시기라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어린 시절을 회상한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에세이에서 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누가 저지르는 무엇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 그냥 일어날 수도 있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쓰는가> 중

불가항력처럼 착각이 강요되는 날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말 것이며, 세상의 밝음뿐 아니라 어두움, 표면과 이면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안목을 지니시기를.

 그 안목을 키우는데 오웰의 통찰이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