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아름답다'고 일컬어진다. 그 아름다움의 근원에 있는 "가치란 '정답'이 있다는 것이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수학적으로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비율로 지어진 건물들은 많은 이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런 '완벽한' 건물들은 수명조차 길어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건축물이 이치에 따르고 조화를 이루며 균형을 이루는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까지 갖출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수학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모르는 이, 혹은 책을 좀처럼 가까이 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가볍게 권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읽히고, 지나치게 잔인하지 않으며, 수수께끼같은 트릭들이 겉으로 드러나서 의혹을 부추기는 일도 없지만 분명 반드시 풀어야 하는 근본적인 장치가 있기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완전히 풀 수 없게 한다. 

 이런 책들의 감상은 길어도 소용이 없으니 아주 간단히 적기로 한다. 

 본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이다.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을 한 모녀였다. 그때까지 그는 어떤 아름다움에도 눈을 빼앗기거나 감동한 적이 없었다. 예술의 의미도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수학의 문제가 풀려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시가미는 한 때 천재라 일컬어지던 인물이지만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노릇을 하며 자신만의 수학문제를 푸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유란, 수학 문제가 풀리는 순간에 느끼는 아름다움만한 것을 사람과 세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발견한다. 수학 문제가 풀리는 순간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 사람 속에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아름다움이 용의자 X를 만들어낸다.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 수학자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를 알아주는 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한다."가 한 때의 좌우명이었다. 그만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전부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그랬기에 이시가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시가미는 결코 '희생'을 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 차이는 하나의 방정식 속에서 미지수 X와 Y를 구분해서 풀어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희생은 버린다는 의미가 더 강해보인다. 하지만 헌신은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는 느낌,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을 준다. 결과적으로 희생과 헌신 모두 당사자의 모든 것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겠지만 분명히 다른 건 다른거다.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는 거의 마지막까지 행복했을 거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기필코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 수단, 시간 등 모든 것을 쏟아부어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지켜내고자 하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것조차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 전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부터 쉽지 않다. 어떤 타협이나 설득 없이 그는 아름다움을 느꼈고, 발견했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있기 마련이고, 그 결과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다. 

 우리들 모두의 삶에는 하나의 물음표 혹은 X라는 미지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깨닫고 풀기 위해 골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경쓰거나 마음 쓰는 일 없이 덮어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X라는 미지수가 풀리는 순간은 분명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한 번은 혹은 한 번 더, 도전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 살 아이부터 여든 노인까지 누구나 살면서 여러 번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들에 이름을 붙이면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될 거다. 그 순간은 어떤 때는 스스로도 확실히 인식할 것이고 많은 순간에는 모르고 지나갈 것이지만 한 사람의 삶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올 거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고 해서 그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닐 거다. 오히려 하나의 계기,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변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사람의 삶에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얽혀 있는 모든 것들에도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 이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음악사에서의 전복과 반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악에 거의 무지한 나에게도 이 책은 커다란 전복과 반전을 경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하는 또 하나의 여지를 발견했다는 의미다. 흑인과 백인, 주류와 비주류, 천재와 노력가, 의혹과 사실을 오가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저절로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이나 주석에 적힌 노래나 영상을 발견한 것은 둘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음악이 나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어떤 의미로, 음악이 비로소 내게 왔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다루고 있는 음악 이야기는 음악의 역사와 무수한 예술가들을 생각해보면 아주아주 작고 또 적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 주안점을 둔다. 거기다 '강헌이 주목한'이니 저자가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만 추려서 적어도 그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저자의 입담도 입담이지만, 그 뒤의 숨겨진(아마도 나와 같이 음악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미스터리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본문은 재즈에서 시작해서 로큰롤까지 살펴 본 후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트로트와 엔카에 얽힌 낡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짚어두고 넘어가야할 지점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넘어갔다가 다시금 지금의 우리 음악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근대와 현대 음악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즈의 탄생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의 삶의 고단함과 고난, 슬픔을 상징하는 '필드홀러'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음악에서(솔직히 우리 음악이 있기는 있는건지 더 알 수 없게 됐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가 지니는 의미를 살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 음악의 뿌리는 거의 와해되고 해체되어 망실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왜색과 외색이 너무 짙어 다시 '우리의 소리'가 재생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나부터도 잘 알지 못하고 있고 거의 관심도 없는 상태니 더 보탤 말은 없지만 자본과 시장에 휩쓸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동적인 모습이 좋게 생각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이 책은 직접 읽어보면서 저자가 말하는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와 맥락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그 가치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구구절절 내용을 적는 것도 소모적이기는 마찬가지인데다 책을 읽은 이마다 받아들임과 해석이 달라질 건데 어찌 저자의 의도를 바로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음악을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언제나 직접 들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 역시 음악을 듣듯 직접 읽어나가면 좋을 책이다. 전복과 반전은 그 순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어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으로 이어지며 삶을 더 풍부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한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꼭 제목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쁜 책도 있다. 도무지 어떻게 읽어야할 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를 판단할 수 없게 하는 책들은 일단 나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쁜 책이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책보다는 나쁜 독서가 많다는 게 제목의 취지다.


지난 7월, 미국의 작가 하퍼 리가 55년만에 신작, 사실은 <앵무새 죽이기>에 앞서서 썼던 작품 <파수꾼>이 출간됐다. 

줄거리는 앵무새 죽이기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밝혀지는 애티커스 핀치의 정체와 그 정체를 알아버린 진 루이즈의 내외면의 갈등을 담고 있다. 

 '파수꾼'의 의미가 자기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느꼈다. 타인, 외부의 시선이나 판단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라고 말이다. 


 기묘한 풍경을 보고 있다. 여기저기서 애티커스 핀치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거다. 마치 진 루이즈가 아버지가 마을 주민회의에 참석해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의 연설을 아무 말없이 듣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격을 받고, 아버지를 경멸하기 시작한 진 루이즈처럼 말이다. 

 애티커스 핀치는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애티커스 핀치에게 '주의'가 있다면 그건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주의'가 있을 뿐이다. 그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해를 자처하지도 않았다. '파수꾼을 세워라'는 메시지도 사실 자기 삶을 지탱하는 신념을 가지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애티커스 핀치는 예전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신념이 이끄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기만자도 아니고 위선자도 아니다. 

만약 누군가 타인을 기만하기 위해 혹은 위선적인 선행을 위해 어떤 행위, 삶의 모습을 보여왔다면 그정도까지 일관성을 갖추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연기는 아무리 능숙하더라도 어딘가에서 헛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수준의 이중인격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오래 위선을 지속하는 것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다.

변호사를 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즘 익숙한 풍경은 '좋은 변호사'가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변호사들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다던가.

하지만 변호사의 역할이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을 한 사람은 잘못의 대가를 치러야하는데 그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적정한 법적인 판단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하는 보조자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애티커스 핀치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모범적인 변호사다. 사람들이 사건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진실을 밝히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이 반드시 '사실'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파수꾼>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누구누구가 그랬다거나, 누구에게 묻는다거나 하지 말고 스스로 애티커스 핀치에 대해 생각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나는 애티커스 핀치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철저한 신념주의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51쪽 6번째 줄
그들은 서로 너무 닮아 월러비, 큰 월러비, 작은 월러비로 분류할 수 있었다. 
-> 앞 뒤로 언급되는 인물의 이름은 '윌러비'인데 이게 오탈자인지 잘 모르겠으니, 혹 아시는 분은 제보를.

 

 


181쪽 아래서 3번째 줄
그들이 모인 곳에 느지막히 도하니
-> 도착하니

246쪽 아래서 7번째 줄
NACCP는 니그로라는 인종을
-> 앞뒤로 언급되는 약자는 NAA(더블에이)CP.

 


국내 기사 검색에도 종종 NACCP가 보이는데 NAACP의 잘못인듯 하네요.



  NAACP앰블럼

(출처:http://www.dcejc.org/2015/02/06/partnering-with-the-prince-georges-county-naac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하나의 기승전결을 가진 이야기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시인이 자신이 표상하고자 하는 것을 그려내기 위해 단어들을 짜맞추어 시를 적듯이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동안 저자가 쓰고,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잇고 붙여 담아낸 것이다.

당연히 각각의 글에서 통일된 완결성이나 필연성, 흔히 개연성이라고 하는 '이 글이 여기에 담겨야 했는가?'하는 부분에 의문이 있을 수도 있겠고, 거리 상으로도 시간 상으로도 멀고 흐릿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이나 재일 조선인 혹은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 벌어진 학대나 강제에도 무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공통성이다. 
 이 사건들과 그 일을 경험한 이들의 다양한 대처 방식을 살펴보는 것으로 의미와 교훈을 현재로 가져와서 미래로 이어주는 거다.

 기승전결도 통일성도 없는 것 같은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받거나 얻은 인상 혹은 느낌을 마치 시인이 단어를 짜맞추듯 맞춰보는 것일 것 같다.
 앞서의 감상에서 나는 이 책을 하나의 단어 '시의 힘'에 맞추어 적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대실패다.

 그렇기에 새삼 다시 권한다.
각각의 글로 읽고, 그 느낌이 뻗어나가는대로 두었다가 마지막에 한 번만 더 돌아보기를.

 시를 읽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것을 느끼는 마음도 분분하다.
해석하는 방향도 제각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 마음, 방향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내 마음에 이 시가, 이 글이 어떻게 울리고 퍼지는지 조용히 살피면 되는 것 아닐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디언밥 2015-07-2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공통성

대장물방울 2015-07-27 19:58   좋아요 0 | URL
^^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