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제목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쁜 책도 있다. 도무지 어떻게 읽어야할 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를 판단할 수 없게 하는 책들은 일단 나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쁜 책이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책보다는 나쁜 독서가 많다는 게 제목의 취지다.


지난 7월, 미국의 작가 하퍼 리가 55년만에 신작, 사실은 <앵무새 죽이기>에 앞서서 썼던 작품 <파수꾼>이 출간됐다. 

줄거리는 앵무새 죽이기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밝혀지는 애티커스 핀치의 정체와 그 정체를 알아버린 진 루이즈의 내외면의 갈등을 담고 있다. 

 '파수꾼'의 의미가 자기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느꼈다. 타인, 외부의 시선이나 판단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라고 말이다. 


 기묘한 풍경을 보고 있다. 여기저기서 애티커스 핀치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거다. 마치 진 루이즈가 아버지가 마을 주민회의에 참석해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의 연설을 아무 말없이 듣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격을 받고, 아버지를 경멸하기 시작한 진 루이즈처럼 말이다. 

 애티커스 핀치는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애티커스 핀치에게 '주의'가 있다면 그건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주의'가 있을 뿐이다. 그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해를 자처하지도 않았다. '파수꾼을 세워라'는 메시지도 사실 자기 삶을 지탱하는 신념을 가지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애티커스 핀치는 예전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신념이 이끄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기만자도 아니고 위선자도 아니다. 

만약 누군가 타인을 기만하기 위해 혹은 위선적인 선행을 위해 어떤 행위, 삶의 모습을 보여왔다면 그정도까지 일관성을 갖추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연기는 아무리 능숙하더라도 어딘가에서 헛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수준의 이중인격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오래 위선을 지속하는 것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다.

변호사를 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즘 익숙한 풍경은 '좋은 변호사'가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변호사들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다던가.

하지만 변호사의 역할이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을 한 사람은 잘못의 대가를 치러야하는데 그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적정한 법적인 판단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하는 보조자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애티커스 핀치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모범적인 변호사다. 사람들이 사건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진실을 밝히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이 반드시 '사실'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파수꾼>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누구누구가 그랬다거나, 누구에게 묻는다거나 하지 말고 스스로 애티커스 핀치에 대해 생각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나는 애티커스 핀치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철저한 신념주의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