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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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물기가 마르는 속도보다 더 빨리 흩어져 사라진다. 그 신속한 휘발성이 기억 본래의 속성인지 오직 나에게만 그런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고백하고 시작하려고 한다. 이 책을 읽은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용의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곱씹지 않고, 음미하지 않고, 되새기지 않고 후다닥 읽어내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읽혔다. 후다닥 하고. 

 마음에 가시처럼 박히거나 앙금처럼 고이지 않았다. 이제와서 혈육이라니. 혈연의 트라우마라니. 한국이 싫어서 이민갈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는 넘치는 이 시대에 말이다. 

 혈육이라는 끊기지 않는 연결, 그 족쇄와 같은 구속과 부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사회적인 이슈를 문제을 제기하며 담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문제는 공감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격하게 공감하게 되지는 않았다. 이 공감의 부재가 무지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허나, 그것은 또 그것대로 좋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많은 것을 알고자 하지만 그 앎이 절대적이지는 않으며, 거의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앎이므로. 


 '혈육'이라는 표현을 공유하는 범위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에 비해 대단히 좁다. 내 경우에 '혈육'이라고 하면 멀리 잡아도 6촌까지다. 6촌은 할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의 아들딸들의 아들딸까지다. 교류가 적은 집이라면 일가족만이 혈육의 개념 안에 포함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혈육이란 그렇게 좁을 수도 있는 개념인 거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혈육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호적을 파내면 혈연이 무의미해진다고 믿는 사람이 지금도 존재한다. '절연'은 전기만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 연결까지도 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용준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는 이 혈연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 상징적이며 고질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수십 년이나 떨어져 잊고 지내던 아버지가 어느날 회사로 찾아온 것으로 일상과 사고가 무너질 듯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순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점점 커져서 지금까지 부정했던 모든 시간을 불식시키려고 한다. 그러면서 던지는 말이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혈육이니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

 "혈육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무엇을 해도 혈육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혈연이란 분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뛰어넘어 가장 강력하고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은 사회적 의미로서의 혈연이 아닌가 싶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깊이 연결될 때 오히려 더 강한 유대가 생기는 것이 인간의 관계다. 단순히 혈육이기 때문에 묶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구식의, 과거의 생각이다. 그 생각에서 놓여날 수 없기에 혈육에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혈육이라는 사실로 정당화 해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초월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뿐'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모든 결과는 선택의 산물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선택이다. 선택지가 불합리하고 부자유스러우며, 부자연스러웠다고 해도 그것은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강압'이나 '위협'에 의한 것이 아닌한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예외를 하나 적어보면 위협에 의한 성폭력 같은 것이 있겠다. 성폭력이란 피해자 쪽이 약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범죄 행위다. 거기에는 어떤 정당화의 가능성도 없다. 실수나 잘못이라는 말을 성폭력 앞에 가져다 붙이는 것만큼 파렴치한 일이 있을까.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지르는 극악한 행위가 바로 성폭력 행위다.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은 학습된 무기력 혹은 편리한 관습을 따르는 관성에 불과하다. 


 변덕은 동요와는 다른 것 같다. 심장이 얼음으로 된 것 같은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일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의 방문 사실을 알고 동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혈육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하는 식의 고정된 관념에 의한 것이다. 혈육이기에 오히려 냉정해지고 모질어지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다. 혈육에게 오히려 모질게 구는 것이 마찬가지로 혈육에 얽매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혈육에게나 타인에게도 무심하게 구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다. 오히려 지나가다 우연히 먹이를 던져 준 들개나 길고양이에게 더 마음을 쓰는 사람도 있다. 


 구구절절, 어지럽게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혈육이라는 것이 필연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인간의 감각이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혈육에 이끌릴 정도로 예민한 것인 동시에 확실한 혈육에게도 얼마든지 무덤덤할 수 있다. 혈육이라 사랑하는 것도, 혈육이라 미워하는 것도 아닌,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읽으며 혈육이라는 대단히 가까운 집단 속에서 벌어질 법한 갈등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불안해 하지 말자. 전혀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잘 쓴 소설이라고 느꼈다. 가장 큰 이유는 매끄럽게, 거의 내리 읽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단편들을 모아 담은 것이고, 그 주인공의 사정이나 상황, 이야기가 전혀 다름에도 단절감이나 흐름의 끊김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넓은 바다 속을 흐르는 각각의 해류처럼 저마다 흐르는 동시에 함께 나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혈육'이라는 커다란 공통 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띠지에 적힌 문구의 '서사'가 각각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거대한 통로를 뜻한다면 이 작품들은 분명 서사가 살아있는 작품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서사의 흐름 안에 독자 역시 포함되어 함께 흐를테니 더 좋을 수가 없는 거다. 


 솔직히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 가운데 정말 공감되는 것은 없었다. <개들> 정도가 어려서 시골에서 본 개를 잡는 풍경들을 떠올리게 했기에 가장 와닿았을 뿐이다. 트라우마가 없어서가 아니다. 만약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갈등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크게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구절 메모해둔 곳이 있어 남기기로 한다.

  105쪽 

 농장에서는 거부하는 개가 없다. 늙고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다리를 절고 눈이 돌아간 병신이라도 농장은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저울이 평등한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평등은 어디에도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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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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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야기의 소제목인 '스노볼'을 보며 조지 오웰의 짤막한 풍자소설이자 고발 소설인 『동물농장』을 떠올린 사람이 나만은 아니길.



노골적인 이야기들을 즐겨 읽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2015년 국제 도서전에서 사 가지고 온 몇 권 안 되는 책 가운데 한 권이다.  그때 산 책 가운데 한 권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서 다른 공간의 낯선, 혹은 그 책에게는 더 잘 어울리는 곳에 꽂혀 있다. 이 책을 떠나 보낸다면 누구에게 보낼 수 있을까? 솔직히 냉큼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누구에게 줘도 될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 책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골적인 이야기들을 즐겨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한 말의 반복 같지만 조금 다르다. 자신이 즐겁게 읽었다고 느껴지는 것을 권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불편한 것을 어떻게 선뜻 건네며 권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게 선뜻 건네기에는 책 표지마냥 차갑고 또 무거운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노골적인 이야기를 즐겨 읽지 않는다면서 하루키는 어떻게 즐겨 읽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그런 의문을 떠올렸을 사람이 있다면 하루키는 전혀 노골적인 문체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루키의 세계는  꿈속처럼 혹은 안개 속 풍경처럼 언제나 모호하다. 현실인가 하면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이 배경인 경우가 많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이 세계, 현실에 대한 은유로 존재한다. 그 세계의 사건들, 일화들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어디까지나 은유에 능한 작가라고 해야지 노골적인 작가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내 짧고 좁은 생각이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책 『최선의 삶』을 골랐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목, 다른 하나는 "체급이 달랐다"고 한 심사평이었다. 제목에는 어떤 식으로 공감해야  할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지만 체급이 달랐다는 말은 납득이 갔다. 물론 다른 작품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수준이었는지는 알지도 못하며 그것을 판단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반칙이라고 할 수 있을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격을 느낄 수 없으면서  끊임없이 불편함을 자극하는 끈질김이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편했다. 그러나 중간에 읽기를 그쳤다가 다시 읽기 시작한 뒤로는 내리 읽어 내려갔을 만큼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에든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성격 탓에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불편했다. 그 어떤 외적인 요인도 일탈이나 방황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또다시 불편했다. 이 아이들, 이 아이의 삶이 제목처럼 최선의 삶이라면. 그런 삶 외에는 도무지 선택할 수 없었다면, 그런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떠올려보려 했을 때도 몹시 불편했다. 불편함을 피해 페이지를 넘기면 또 다른 불편함이 기다리는 그런 이야기. 어쩌면 최악의 삶을 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야기는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나의 시선을 놓아주었다. 솔직히 다 읽고 난 후에도 그저 불편함 외에는 무슨 이야기였는지, 뭘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잘 완성되었다는 생각은 확신처럼 떠올랐다. 불편한 데다, 재밌는 구석이라고는 없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의 무엇이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했을까? 아마 앞으로도 오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을 것만 같다.


 최선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존경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최선의 삶을 꿈꾸고 그릴 수 있을까? 그저 막연히 상상할 뿐이다.

 누구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하는 기분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런 원망이 생겨날 수 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수동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 노출되어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굳이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불편했고, 또 이런 밋밋한 감상으로 밖에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지금의 상태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인 거다.


 누군가 내게 "그 책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거나, 함께 죽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봐"라고 말이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거나 함께 죽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림이 없다면 읽어봐도 되고 안 읽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 한다. 아니다. 동류는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거다. 자기 안의 해소되지 않은, 사라질 것 같지 않은 환상과도 같은 괴로움과 자주 마주친다면 그 환상, 시원하게 지워버리는 게 최선이 아닐까?


 우스운 건 그토록 불편했던 소설이 마지막 장을 덮고 한 동안을 보낸 후 감상을 적는 지금에는 조금은 아련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정말, 최선이란 게 뭔지. 우습기만 하다. 이유모를 웃음만 난다. 

 뭐, 그런 작품이다. 무슨 말을 더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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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 지금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인생을 얻을 수 있다
러셀 로버츠 지음, 이현주 옮김, 애덤 스미스 원작 / 세계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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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 그에게 또 한 권의 대표적인 저서가 있었으니 그 저서의 제목은 『도덕 감정론』이다. 『국부론』은 몇 년 전인가 도전하려다 도서관에서 훑어보고 다시 꽂아두었던 책이고, 『도덕 감정론』은 그나마도 제목만 알고 있던 책이었다. 이 책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은 『도덕 감정론』을 현대에 맞게 풀어쓴 책이다. 기시미 이치로가 아들러 심리학을 다시 풀어써서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이 책 역시 널리 읽히기를 바라본다.


 국부론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시장의 자율을 외치던 애덤 스미스가 인간의 선함과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에 주목했다는 것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왜 애덤 스미스라는 한 인간의 저술 속에서 상충되는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발현되어 나올 수 있었는지를 밝힌다. 그다지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기에 여기서 얘기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국부론은 이른바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원리다. 반대로 도덕감정론은 '자주 만나고 접하는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작동하는 원리다. 그렇기에 이기심과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를 이롭게 하게 되는 가능성을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선순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덕감정론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서로를 이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책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이야기하는데 쓰는 비유란 다음과 같다.

내 손가락에 생긴 종양과 바다 건너 수십 만 명이 자연재해로 죽어가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내 손가락에 생긴 이상이 낯모르는 세계의 수십 혹은 수백 만 명의 희생보다 더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체와 통신 기술의 발달로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순식간에 전해지지만 거의 모든 순간에 그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 혹은 와닿지 않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이라기보다 실감할 수 없는 사고의 구조에 있다. 아무리 슬퍼하려고 해도, 안타까워 하려고 해도 나 자신에게 닥친 것처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고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말을 빌어 이야기한다. 


 사람이 어느 순간에 행복해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스스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만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스러운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나 착각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진정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애쓰게 된다는 말이다. 마치 시장이 개인의 이기심의 조화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작동하는 것과 닮은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책 속에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크고 작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의 모습을 여러 일화를 통해 들려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위선을 행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부정하는 '인정의 욕구'와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이야기다. 인정의 욕구의 경우 타인의 잣대에 의해 그 만족도가 달라지지만 애덤 스미스의 사랑스러운 존재는 자기 안의 공정한 관찰자라는 심판의 판단을 통해 만족과 불만이 갈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가지는 꼭 구분되어야만 할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 책 속에 현재 우리 나라와 세계의 여러 분쟁의 핵심을 짚어주는 통찰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몇 군데 둘러보자.


 140쪽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부자의 어깨에 들어간 힘 만큼이나 명백하게 감춤 없이 두드러져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갖고 있지 않기에 비참하다는 생각에 몰두하기 십상이다. 가진 사람이 이 말을 하면 자신은 가졌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이 말을 하면 부러우면서 아닌 척한다고 비웃으니 그 마음 어디에 만족이 깃들 수 있을까?

 254쪽

 고급스러운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단기적인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약속을 지키고 책무와 계약을 이행한다. 또한 타인을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욕구도 잘 이겨낸다. 그런 문화가 잘 자리 잡힌 사회는 기막히게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신뢰를 형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사랑스러움의 문화를 만드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사회에서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을 속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만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거짓말, 축소 전달, 태만을 정당화 하는 거다. 그렇게해서 결국 이득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손해 나는 것은 자기 혹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논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또 넓게 생각해보면 모든 손해는 어떤 형태로든 모두에게 돌아오게 된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 그렇기에 신뢰를 형성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만 하게 되는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과 정직한 사람들이 우스운 꼴을 당하고,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회는 너무나 불행한 사회다. 더 고급스러운 사회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속이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과 진심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265~6쪽

 『도덕감정론』에서도 밝혔지만 스미스가 가장 경멸한 사람은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갇힌 사람이란, 특정 설계나 비전에 따라 사회를 다시 세우려 하는 지도자를 뜻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기 위한 비전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그것이 이상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자신이 만든 비전에 파묻힌 그들은, 그로인해 자칫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이나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역시 보지 못한다.


 이 부분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비전에 함몰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실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자신들만이 옳고, 자기들만이 모두를 위한다는 생각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위험한 기만행위다. 책 속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거라 믿는다. 동시에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어버린다. 다양성이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몹시 위험한 사고의 태도다. 몰락한 권력과 세계는 모두 그렇게 자기만의 이상과 환상에 함몰되어 세상을 살피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가장 재밌는 점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애덤 스미스의 두 저서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완역본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다. 책에서는 현대에 맞지 않는 딱딱한 표현들이 많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 낭만적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닌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진정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다른 것은 어떻든 존경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 


 아, 재밌는 오류가 있다.

나심 탈레브의 '이야기짓기 오류'가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짓기 오류란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그 일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들을 내놓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하락의 원인이었던 사실이 내일은 상승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이야기짓기 오류의 간단한 예다. 경제를 예측하는 사람들, 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오류라는 생각에 혼자 웃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그런 예측은 정치나 경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라도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인 이익과 손해를 떠나 나는 나 자신이 판단하기에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다. 누가 "너는 참 사랑스럽구나"라고 말해서도 아니고, "너는 참 밉상이구나"하고 말해서도 아닌 나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정당하고 공정하게 '사랑스러운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인 거다. 


 결국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공정한 관찰자는 모두 무게 중심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거나 치우치지 않은 균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이 책이 공정한 나, 사랑스러운 나로 나아가는데 작은 발판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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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5-12-1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대장물방울님, 이달의 리뷰 수상 축하드립니다 :>

대장물방울 2015-12-10 21:59   좋아요 0 | URL
오오!! 고맙습니닷!!
 
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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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대학을 졸업한 게이타로가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같은 하숙의 이웃의 삶과 친구인 이치조의 삶과 그 친구의 사촌 동생의 삶과 이모부의 삶과 또 다른 삶과 삶들을 모아 담은 것이다. 게이타로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마치 한편의 극을 지켜보는 일을 끝내는 것처럼 말하고는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나아간다. 그이 앞으로의 삶이 길할지 흉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갈 거였다.


 <춘분 지나고까지>는 소세키 특유의 절제된 애절함이 게이타로의 친구인 이치조와 사촌 여동생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함으로써 마치 책을 읽는 사람이 책 속에서 그 사연을 풀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거다. 

 오래 전부터 꿈꾸는 것이 하나 있다. 그 꿈은 나쓰메 소세키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앞에 적은 소세키의 서술방식, 즉 문체에 그 중심이 놓인다. 


 개인적으로 쓰는 말이기에 통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나는 소세키의 문체가 '수채화 같은 문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채화는 유화와는 달리 밑그림 위에 다른 색을 덧칠해도 아래에 있는 색이나 윤곽이 비쳐나오게 된다. 또 하나 어느 곳에 놓는가에 따라 그 색감과 밝기가 무수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 밑그림의 윤곽과 무수한 변화야 말로 '수채화 같은 문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춘분 지나고까지>의 경우 화자가 하나라고 할 수 없다. 게이타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이타로 스스로가 말하기도 하고, 게이타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여럿의 화자 가운데 누구도 이야기의 핵심을 흐리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로 전체의 이야기를 압도하거나 덮어버리지 못한다. 누가 이야기를 하든 그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마지막 순간에 드러날 결심이 깔려 있는 거다. 


 이 이야기는 특별히 비극적이지도 않고 희극적이지도 않다. 소세키가 정말 사랑스러워했던 딸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마쓰모토의 딸의 죽음 에피스드조차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어 감정을 읽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렇기에 비가 오는 날에는 손님의 방문을 받는 일이 없다는 마쓰모토의 결심과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이 더 결연하게 느껴진다. 격렬하지 않은 부분까지 수채화를 닮았다. 


 은은하지만 깊은 사유와 무수한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소세키의 솜씨에 새삼 감동하게 만든 작품이다. 


 제목인 <춘분 지나고까지>는 큰 의미 없이 새해가 시작되고 춘분즈음까지 써서 이야기의 연재를 끝내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런 농담 같은 시시함이 좋다. 시시하지만 진실말고는 다른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 그 마음 씀씀이가 더 좋다. 

 나는 원래 소세키는 편애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므로, 이 감상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을 거라는 걸 지금이라도 밝혀둔다. 


 <춘분 지나고까지>에서는 딱 두 군데에 표시를 했다. 

한 군데는 앞서 두 번이나 적었던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표현이다. 

또 한 군데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346쪽

 돌아보면 게이타로가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실제 세상과 접촉해보고 싶다는 뜻을 두고 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은 일은 단지 남의 이야기를 대충대충 듣고 다닌 것뿐이다. 지식이든 감정이든 귀로 전해지지 않았던 경우는 오가와마치 정거장에서 지팡이를 소중한 듯이 짚고 전차에서 내리는 희끗희끗한 외투를 입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서양 요릿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행한 정도의 일이다. 

(중략)

 요컨대 인간 세상에 대해 게이타로가 가진 최근의 지식과 감정은 모조리 고막의 작용에서 온 것이다. 모리모토에서 시작하여 마쓰모토로 끝나는 몇 자리의 긴 이야기는 처음에는 넓고 얕게 게이타로를 움직이면서 점차 깊고 좁게 그를 움직이기에 이르더니 갑작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게이타로는 결국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이타로에게는 그것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고 동시에 다행스러운 점이다.


 지금의 우리와 다를 것 없이 소세키가 그려낸 인물 게이타로의 시대 일본 역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바로 좋은 직장을 얻어 출세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게이타로는 여기저기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거다. 그러나 그런 일자리를 알아보는 행동에는 어딘가 절실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세계가 게이타로가 들어갈 수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게이타로는 그저 듣고, 보고, 다시 전해 들었을 뿐 그 안에서 어떤 일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암시하듯이 게이타로는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보통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세상을 머릿 속에 집어 넣는다. 그러나 소세키는 "사물을 머리로 옮기기 위해 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머리로 바라본다는 생각으로 눈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두 가지의 차이를 말로 설명할 수 있을만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로 느낄 뿐이다. 두 가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할 뿐이다. 


 흔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귀에 들리는 말, 소리가 모두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이 깨달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우리가 귀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의 감각이란 얼마나 불완전한가?

 체험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삶으로 뛰어들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단순히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미신에 의지한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했으므로 게이타로 역시 자신만의 결론에 닿은 거다.


깔끔하게 정리해내지 못하는 걸 보이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법하다. 

다음에, 조금 더 세상과 삶을 실감하고 난 후에 읽어보면 아주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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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 처음 만나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설
서희석.호세 안토니오 팔마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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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전에 앞면과 뒷면이 있는 것처럼 세계의 모든 역사에는 그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역사가 있는 모양이다. 역사교과서 문제로 떠들썩한 지금 이 시대의 우리가 후대의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되게 될지 궁금해지는 이유는 앞면에 남을지 뒷면에 남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정사니 야사니 하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신빙성이 있으며 진실 혹은 사실에 가까울 지는 그저 추측해볼 뿐이라 역사 역시 편협하지 않게 두루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한 것 아닌가 싶다. 

 결국 E. H. 카의 유명한 말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가 아닌가. 


 이 책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의 가장 특징적인 점을 꼽으라면 저자가 한국인과 현지인의 공저라는 거다. 그 나라의 역사는 꼭 그 나라의 사람이 써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쉬운데, 오히려 역사의 속성 상 어느 거울에 비춰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기에 외국인이 기록하고 해석한 역사서가 있는 편이 폭넓은 견해를 제공 받을 기회를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도 좋겠지만 스페인에도 독이 되지 않을 책이라는 거다. 

 다음 가는 특징은 이 책이 일종의 역사의 뒷이야기, 야사를 담은 책이라는 거다. 형식과 규율에 구속되기 쉬운 정사는 솔직히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이기는 하겠지만 읽는 재미는 덜한 게 사실이다. 스페인 사람들도 모르고 있을 역사 속 이야기를 수천 킬로 밖의 우리가 알게 되었다는 것, 놀랍지 않은가?


 21세기 인종의 용광로가 미국이라면 고대에서 중세까지 인종의 용광로 역할을 맡았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었다. 번영을 구가하는 나라의 잠재력이 '다양성'이라면 현재의 미국이 100년 넘게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과 과거 스페인이 영국 이전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역사도 납득이 간다. 반대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규제와 통합, 흡수와 배제의 노선을 선택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 역사는 어떤 나라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몰락하게 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스페인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헤라클레스의 전설에서 시작해 로마의 역사와 이슬람의 역사까지 품고 있는 파란만장한 과거를 품고 있는 나라다. 포르투갈 역시 스페인 역사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이나 다름 없는 나라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덧붙여 신대륙 탐험을 나섰던 콜롬버스의 만행 또한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콜롬버스의 만행이란 자신의 욕심만큼 황금이 발견되지 않자, 원주민의 손발을 자르는 등 학대를 거듭한 거였다. 위대한 항해자이자 탐험가로 알려졌던 콜롬버스 역시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황금에 눈이 멀었던 폭군에 불과한 가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제국주의 또다른 그늘처럼 비쳤다.

 콜롬버스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로 콜롬버스의 유언인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언을 어기지 않으면서 스페인에 콜롬버스의 관을 가져온 방법은 기발하기 짝이 없으니 책 속에서 꼭 찾아볼 것을 권한다.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콜롬버스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까 싶을 정도다. 


 스페인은 대표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 그만큼 다툼이 많고 또 잦았다는 거다. 다툼이 잦았다는 것은 그 대지가 머금고 흘려야 했을 피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타오르듯 한 정열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두려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하나의 민족도, 하나의 종교도 아니었기에 지배자들의 이익에 따라 언제 어떤 처지에 놓일 지 예상할 수 없었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은 적이 되었으며, 친척끼리 피를 흘리며 싸웠고, 어느날 갑자기 가진 것 전부를 빼앗기고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런 혼란을 이겨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정열을 불살랐던 건 아닐까?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보면 같은 스페인 안에서 언어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장면이 여러 번 거듭된다. 무식한 소년 병들이 전장으로 뛰어들어 죽어나간다. 무엇을 위한 희생인줄도 모르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용병이 된다. 고대, 중세, 근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까지도 스페인은 그랬다. 다툼과 불통, 가난에 시달렸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우리의 역사도 들여다보지 않는데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읽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지 아마 다들 알 것이다. 역사는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비슷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반복은 흔히 단일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만 한다.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관광 가이드만큼이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거다. 

다만, 문장이 유려하지는 않으니 그 부분은 감안하고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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