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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기억은 물기가 마르는 속도보다 더 빨리 흩어져 사라진다. 그 신속한 휘발성이 기억 본래의 속성인지 오직 나에게만 그런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고백하고 시작하려고 한다. 이 책을 읽은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용의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곱씹지 않고, 음미하지 않고, 되새기지 않고 후다닥 읽어내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읽혔다. 후다닥 하고.
마음에 가시처럼 박히거나 앙금처럼 고이지 않았다. 이제와서 혈육이라니. 혈연의 트라우마라니. 한국이 싫어서 이민갈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는 넘치는 이 시대에 말이다.
혈육이라는 끊기지 않는 연결, 그 족쇄와 같은 구속과 부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사회적인 이슈를 문제을 제기하며 담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문제는 공감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격하게 공감하게 되지는 않았다. 이 공감의 부재가 무지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허나, 그것은 또 그것대로 좋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고, 많은 것을 알고자 하지만 그 앎이 절대적이지는 않으며, 거의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것이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앎이므로.
'혈육'이라는 표현을 공유하는 범위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에 비해 대단히 좁다. 내 경우에 '혈육'이라고 하면 멀리 잡아도 6촌까지다. 6촌은 할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의 아들딸들의 아들딸까지다. 교류가 적은 집이라면 일가족만이 혈육의 개념 안에 포함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혈육이란 그렇게 좁을 수도 있는 개념인 거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혈육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호적을 파내면 혈연이 무의미해진다고 믿는 사람이 지금도 존재한다. '절연'은 전기만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피의 연결까지도 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용준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는 이 혈연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 상징적이며 고질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수십 년이나 떨어져 잊고 지내던 아버지가 어느날 회사로 찾아온 것으로 일상과 사고가 무너질 듯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순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점점 커져서 지금까지 부정했던 모든 시간을 불식시키려고 한다. 그러면서 던지는 말이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혈육이니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
"혈육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무엇을 해도 혈육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혈연이란 분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뛰어넘어 가장 강력하고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은 사회적 의미로서의 혈연이 아닌가 싶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깊이 연결될 때 오히려 더 강한 유대가 생기는 것이 인간의 관계다. 단순히 혈육이기 때문에 묶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구식의, 과거의 생각이다. 그 생각에서 놓여날 수 없기에 혈육에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혈육이라는 사실로 정당화 해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초월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뿐'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모든 결과는 선택의 산물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선택이다. 선택지가 불합리하고 부자유스러우며, 부자연스러웠다고 해도 그것은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강압'이나 '위협'에 의한 것이 아닌한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예외를 하나 적어보면 위협에 의한 성폭력 같은 것이 있겠다. 성폭력이란 피해자 쪽이 약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범죄 행위다. 거기에는 어떤 정당화의 가능성도 없다. 실수나 잘못이라는 말을 성폭력 앞에 가져다 붙이는 것만큼 파렴치한 일이 있을까.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지르는 극악한 행위가 바로 성폭력 행위다.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은 학습된 무기력 혹은 편리한 관습을 따르는 관성에 불과하다.
변덕은 동요와는 다른 것 같다. 심장이 얼음으로 된 것 같은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일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의 방문 사실을 알고 동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혈육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하는 식의 고정된 관념에 의한 것이다. 혈육이기에 오히려 냉정해지고 모질어지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다. 혈육에게 오히려 모질게 구는 것이 마찬가지로 혈육에 얽매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혈육에게나 타인에게도 무심하게 구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다. 오히려 지나가다 우연히 먹이를 던져 준 들개나 길고양이에게 더 마음을 쓰는 사람도 있다.
구구절절, 어지럽게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혈육이라는 것이 필연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인간의 감각이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혈육에 이끌릴 정도로 예민한 것인 동시에 확실한 혈육에게도 얼마든지 무덤덤할 수 있다. 혈육이라 사랑하는 것도, 혈육이라 미워하는 것도 아닌,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읽으며 혈육이라는 대단히 가까운 집단 속에서 벌어질 법한 갈등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불안해 하지 말자. 전혀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잘 쓴 소설이라고 느꼈다. 가장 큰 이유는 매끄럽게, 거의 내리 읽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단편들을 모아 담은 것이고, 그 주인공의 사정이나 상황, 이야기가 전혀 다름에도 단절감이나 흐름의 끊김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넓은 바다 속을 흐르는 각각의 해류처럼 저마다 흐르는 동시에 함께 나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혈육'이라는 커다란 공통 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띠지에 적힌 문구의 '서사'가 각각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거대한 통로를 뜻한다면 이 작품들은 분명 서사가 살아있는 작품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서사의 흐름 안에 독자 역시 포함되어 함께 흐를테니 더 좋을 수가 없는 거다.
솔직히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 가운데 정말 공감되는 것은 없었다. <개들> 정도가 어려서 시골에서 본 개를 잡는 풍경들을 떠올리게 했기에 가장 와닿았을 뿐이다. 트라우마가 없어서가 아니다. 만약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갈등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크게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구절 메모해둔 곳이 있어 남기기로 한다.
105쪽 농장에서는 거부하는 개가 없다. 늙고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다리를 절고 눈이 돌아간 병신이라도 농장은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모든 고기는 저울 위에서 평등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저울이 평등한 것도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평등은 어디에도 없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