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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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세 편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확히는 두 편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한 편의 안티고네 이야기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세 편의 이야기의 제목이자 실린 순서대로 써 본 것이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이 죽고 난 후, 그의 딸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성으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다. 대략 상황을 적어보면 이렇다.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광야로 떠돌아 다니다 콜로노스에서 숨진다. 그 직전에 그의 두 아들 가운데 장자인 폴뤼네이케스가 자신의 동생이 자신을 몰아냈다며 아버지를 찾아온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폴뤼네이케스를 냉정하게 내쳤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더해 돌려보낸다. 그 저주란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저주대로 두 아들은 서로 다투다 서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문제는 왕이 된 크레온이 동생인 에테오클레스는 장례를 치러준 반면 폴뤼네이케스는 들짐승에게 뜯어 먹히도록 시체를 방치하도록 명령했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 시신을 장례 지내지도 묻지도 못하게 한데서 생겨났다. 여동생 안티고네는 오빠인 폴뤼네이케스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결국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오빠의 장례를 치르다 파수꾼에게 붙잡혀 동굴에 갇혀 죽게 된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비극이다. 소포클레스는 셰익스피어만큼 혹은 셰익스피어보다 먼저 비극을 쓴 것으로 따지면 셰익스피어보다 더 단호하게 비극을 완성해버린다. 주요 등장 인물이 모두 죽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신의 의지'가 개입해서 그들을 죽이거나 살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신 앞에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하며 무력했다. 그 무력함이 그 어떤 비극보다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의 마지막 이야기일 것 같은 <안티고네>는 이렇게 거의 모두가 죽는 것으로 끝난다.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의 시작인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테바이를 구해낸 영웅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을 섞어 자식까지 낳은 패륜아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란 잘 알려진 것으로 "아침에는 네 발로 다니고, 점심에는 두 발로 다니며, 저녁에는 세 발로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정답이 '인간'인 그 수수께끼다.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나라에 '오염'이 생겨나 희생자가 늘어가고 피해가 커지자 이 오염을 없애기 위해 원인을 캐 나가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 밝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이 한 실수를 알아챈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결로 생을 마친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머리장식으로 눈을 멀게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추방할 것을 크레온에게 부탁하지만 그 결말은 보여주지 않고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지막 이야기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세상을 떠돌아 다니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복수의 여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된다. 오랜 방황으로 저주가 풀린 것인지 오이디푸스의 안식이 가까워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테나이의 왕인 테세우스에게 나라의 번영을 약속하며 그 땅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테세우스 외에는 누구도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이디푸스의 축복의 조건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는 <안티고네>에서 알 수 있다. 


 세 이야기에 대한 설명을 적는데 너무 많은 지면을 써버렸다. 그래도 하려던 말은 적어야겠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에게 어떤 악감정을 가졌기에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성적 욕구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누명이다. 이 책 속의 세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오이디푸스는 모든 행위를 자신의 의지로 행했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신의 의지'가 개입해 있었다. 

 처음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이디푸스를 버리게 만든 것도 '신탁'이었다. 버림받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고향인 줄도 모르고 고향으로 향하게 된 계기도 역시 '신탁'이었다. 이 신탁의 내용은 '오이디푸스가 자라면 그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일 것이며,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을 낳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그 신탁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모두가 그 신탁을 피했다고 믿었던 생각을 비웃듯이 완전하게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과격하게 굴었던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오이디푸스도 언급하듯이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를 향해 "당신이 내 아버지입니까?"하고 묻지는 않는다.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니란 말이다. "아임 유어 파더"같은 식의 대사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대사인 거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죽이고,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것도 전적으로 왕이 되려는 속셈에서라고 볼 수 없다. 이제 막 나라의 관문을 지나려는 자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면 스핑크스가 자살할지 어떨지 어떻게 알았겠으며 그 나라의 왕비가 왕을 잃고 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계산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신들이 꾸민 음모였다는 것 말고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런 선량한 오이디푸스를 어머니를 범하려는 욕망의 이름으로 삼아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정한다. 


 오이디푸스는 비겁한 자가 아니다. 몰상식하지도 않다. 오히려 지극히 선량하며 공정한 인간이다. 그런 공정한 인간이 신이 보기에는 좋은 놀잇감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축복해줄 테니 실컷 골탕 먹어봐." 하는 식인 것도 같다.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성경 속 인물인 '욥'과도 닮아 있다. 

악마의 손에 넘겨져 온갖 시험을 겪는 동안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잃어갔던 욥은 결국 신을 원망하기에 이르렀을 거였다. 물론, 성경 속에서는 악마의 시험을 이겨내고 새로이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얻게 된다. 그러나 재산과 달리 가족은 '보상'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은 무시되었다. 그들이 천국에 갔을 거라고? 천국에서의 삶은 천국에서의 삶이고 지상에서의 삶은 지상에서의 삶이다. 둘은 하나라고 하지만 하나가 아니다. 하나를 빼앗으면서 다른 것을 주겠다고 하다니, 갓난아기도 그런 행위의 부당함을 알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던가.


 오이디푸스 왕은 마지막 순간에 마치 수호신처럼 위상이 회복되지만 자식들조차 그의 임종을 볼 수 없게 된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이 삶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장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저주받아 태어나 축복받은 죽음에 이른다는 게 가능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더라도 내게는 그러지 말아주기를 꼭 부탁하고 싶어 진다. 


오이디푸스, 이 가련한 사람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꼬리표를 달아 두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라도 그의 이름에서 콤플렉스를 떼어내 주고 싶다. 


 

 선량한 오이디푸스여, 편안히 잠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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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의 무희.천 마리 학.호수 을유세계문학전집 39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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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세 편의 작품이 담겨있다. 

세 편을 읽는 데는 거의 아무런 무리도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읽는 것 이상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 마음이 흐트러지고 무뎌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결국 세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남아서 움켜쥘 수 있던 생각이란 몹시도 편협한 데다 뻔한 것이라 낙담하기도 했다.

그 생각을 풀어 적으면 이런 문장이 될 거다.


"전 후 일본의 풍요롭고도 빈곤한 세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만큼 망가져 있던 게 분명하다."


 전후의 충격은 여러 면에서 일본을 망가뜨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즈의 무희>와 <천마리 학>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진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즈의 무희>에 남아 있던 모호한 아름다움이 <천마리 학>에서는 허무할 뿐 아니라 짓밟히고 침범당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이제부터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아름다움보다 연민과 미련으로 가득한 미래를 끌어 안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망령에 시달리듯, 과거의 꿈 같은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재밌게 느꼈던 것은 <호수>였다. 국내에는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는데 이야기의 짜임새가 좋았다. 등장 인물 가운데 누구하나 버려지지 않고 두루 돌아가며 역할을 받아 쓰이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당사자 둘은 모르지만 사실은 둘 모두가 제각각, 나름의 인연으로 이어진 또 다른 사람을 공유하는 그런 형태였다. 그러나 그나마 <호수>까지 모호한데다 허무하기까지 한 결말로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끝내버림으로써 허탈함을 부풀렸다. 

 잘 해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결정적인 일격을 당해 허무하게 목적을 잃어버린 채 항복해버린 전쟁과 닮아 있는 결말이었다.


<이즈의 무희>에는 무희 일행을 뒤쫓는 학생이 등장한다.

<천 마리 학>에는 아버지와 무관해지려 하고, 아버지와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마치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듯 이끌려 다니는 남자가 등장한다. 물론 아버지의 환영에 이끌려 다닌다는 건 내 인상일 뿐이고 실제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그러나 '천 마리 학'에 이끌리면서도 멀리 하려고 하는 모순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건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끈질긴 인연의 그림자였다.

<호수>에서는 여자들을 미행하고 다니는 남자가 등장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도 분명 허무함으로 가득차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거기에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쫓거나 쫓겨다니고 있을 것도 같다. 이런 쫓고 쫓김의 원인은 다른 데가 아닌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내면에 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고독했기에 끊임없이 무엇, 혹은 누군가를 쫓아다녀야 했을까.


 이 세 이야기를 거의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길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느낀다. 


 아,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 1968년 이라기에 나이를 계산해보려고 작가 소개를 읽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생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69세쯤이 된다. 작가 소개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두 살과 세 살 때 잇달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되던 해 누나를 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열다섯 살에 조부마저 잃어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바로 앞에 적었던 '쫓거나 쫓겨다니고 있'는 것의 배경에는 상실과 고독이 숨겨져 있던 모양이다. 작품을 아주 헛 읽은 것은 아니구나 하는 위안이 들기도 하지만 뭔가, 그래도 그렇게 쫓겨다녀서는 안 되는 것 아니었나 하는 반항하는 마음이 움트는 걸 아주 막을 수가 없다.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는 동정과 공감의 마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란다. 


 부모와 형제 자매, 조부모까지 모두 잃은 것만으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은 고단했을 것이며 흔들렸을 거다.

거기에 나약해질 시기에 나라의 젊은이들의 무수한 죽음을 목격함과 동시에 전쟁의 패망에 더해, 전 후 나라의 타락까지 그대로 지켜봐야했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순간의 나라를 떠나 이상향을 찾아 가고 싶은 마음도 품었던 게 아닐까. 


 설국까지 읽고 다시 읽어보면 조금 더 나은 인상에 닿을 수 있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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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 네안데르탈인에서 데니소바인까지
스반테 페보 지음, 김명주 옮김 / 부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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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성 : ★

유용성 :  

재미 :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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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무리가 짙게 낀 다음날은 비가 내릴 확률이 높다."

 "저녁 노을이 유난히 붉은 다음 날은 흐릴 확률이 높다."

 "아침 안개가 낀 날은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덥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위에 적은 내용들은 중고등학교에서 모두 배웠던 거다. 어쩌면 이제는 워낙 간단히 날씨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기에 배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래의 친구들에게 저런 내용을 이야기해줄 때면, 종종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되묻는 통에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혼자만 배웠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보기도 하는거다. 이런 이야기를 적는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며 "지금 이 책을 왜 읽고 있는 것일까?"하는 물음과 "이 책을 읽어서 뭘 하려는 걸까?"하는 의문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 책의 쓸모는 뭘까?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아지는 것이 있기는 할까? 

 무엇을 알고 싶어서 읽고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이 물음들에 적당한 답을 찾아낼 때까지 이런 교양 과학서들과 조금 멀어지게 될 거다. 

 사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권한 것도 아닌데다 심지어 스스로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사서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품는다는 건 모순된 행동임이 분명하다. 필요하지 않았다면 사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고, 왜 읽어야하는지 모르겠다면 읽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서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앞부분은 연구의 목표오 과정을 거듭 확인하고 나열하기 때문에 실제로도 몹시 지루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발견이나 연구가 그렇듯 정말 운이 좋은 게 아니라면 모든 발전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 책 역시 그렇다. 단순히 흥미로 책을 읽고 있는 내가 이 정도였다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려 한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깜짝 놀랄 준비를 해두는 게 좋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는 제법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적어도 나는 지금까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니 하는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고, 네안데르탈 인은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와의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 멸종한 것으로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네안데르 탈 인의 DNA를 분석한 결과를 통해 네안데르탈 인이 현재의 인류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짓는다.

"네안데르탈 인은 멸종하지 않았다. 네안데르탈 인은 우리 안에 살아있다."고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아니면 말고.


 다카노 가즈아키는 소설 『제노사이드』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 인을 멸종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표현한다. 실제로 네안데르탈 인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잡아먹히거나 학살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 인의 유전자가 현대의 인류에게 남아있으므로 '멸종했다'는 표현은 조금 성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인간의 DNA 지도가 완성된 이후에 진행된 고대인류의 DNA 연구에 대한 최신의 보고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불과 몇 그램의 뼈만 가지고도 네안데르탈 인을 '복제'할 수도 있다는 암시도 하고 있다. 어쩌면 실제로 어딘가에서는 이미 복제를 해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복제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책 속에서 연구한 네안데르탈 인과 데니소바인의 DNA 연구 결과는 분명 인류의 역사와 진화에 영향을 준 요소들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어떤 유전자가 어떤 형질의 발현을 담당하는지, 왜 진화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했는지, 결정적으로 분기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성도 커진 게 사실이다.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는 걸 잊지 말자. 

 네안데르탈 인의 유전자가 인류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은 분명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저자인 스반테 페보도 염려한 것처럼 인종차별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에 굴절을 더하고 차별을 정당화 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책에서 언급된 내용은 없지만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학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은 기대를 품게 만드는 동시에 두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네안데르탈 인이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도태된 것처럼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 역시 언제든 새로운 종에 밀려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권의 책이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책은 세상에 나온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역시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게 전해진 의미는 단순하게는 "네안데르탈 인은 사라지지 않았다"였고, 조금 깊이는 "인류 역시 같은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대 인류와 진화에 관심이 있는 분은 꼭 읽어보시길.

당신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네안데르탈 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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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12년 - Movie Tie-in 펭귄클래식 139
솔로몬 노섭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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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소설이라고 부르기 미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도, 가상의 이야기도 아닌 누군가에는 현실이었던 이야기다. 자유인으로 태어나 노예로 전락한 상태로 절망적일 정도로 길게 느껴졌을 12년 동안의 이야기인 거다. 


 이 작품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은 1808년 노예제도가 폐지된 미국의 북부, 뉴욕 주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노예였지만 마음 좋은 주인을 만나 일찍 자유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솔로몬 노섭은 흑인이지만 자유인으로서 30년 넘는 시간을 보낸다.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고 기술을 익히고, 부인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납치되어 아직 노예제도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남부로 끌려가게 된다. 자신의 본래 신분을 떠벌렸다가는 언제든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다시는 가족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 된다. 결국 솔로몬 노섭은 틈을 노려 편지를 보내서 소식을 전하거나 탈출을 궁리하면서 훌륭한 노예를 연기한다. 


 만약 나였다면 30년 넘는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불과 며칠 만에 박탈당하고도 참아낼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많은 흑인들이 납치되어 노예가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중 대부분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주인에게 살해당하거나 도망치려다 죽거나 잡혀와서 맞아 죽거나 하는 비극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남은 노예들은 더 순종적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일단 사람이기에 살고 싶어 하는 게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놀라운 건 대부분의 노예들은 결코 반항하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들은 완전히 길들어 있었다. 이것은 학습된 무기력과 다르다. 어떤 노예들은 '기꺼이' 노예를 자처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노리고 다른 노예들을 괴롭히는 노예도 있었다. 


 사실 이런 풍경은 현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해 있다. 노예를 자처하는 사람과 노예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흔히 우리는 '권력의 노예'라는 말 혹은 '금전의 노예'라는 말을 예사로 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말을 하는 본인들이 그 누구보다 앞장서 있는 노예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노예 12년 속 솔로몬 노섭의 경우는 무척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글을 몰랐다면, 손재주가 없었다면, 악기를 잘 연주하지 못했다면 그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았을 거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몰랐다면 악사로 고용되어 납치되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를 납치하려는 사람들이 무슨 구실을 대고 그를 끌어들였을지 모르기에 그의 배움과 앎이 힘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겠다. 


 솔로몬 노섭이 노예 생활을 끝내고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이 자유인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였다. 자유는 마치 형상기억 합금 같다. 자유롭던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한 그 자유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0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을 잊고 노예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자유를 위한 생존보다 생존을 위한 복종을 택한다면 자유를 되찾을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거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고 하루하루 무너지고 망가져가는 여자 노예의 사연이었다. 그 여자는 주인에게 사랑을 받아 거의 자유인처럼 살며 아이를 낳고 기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인이 약해진 틈을 타, 여자 주인과 사위가 그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상에게 팔아버린 거였다. 아직 어린 딸은 크면 예뻐질 것이라며 높은 값을 매겨 여자를 산 주인이 함께 사들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들과도 그렇게 헤어졌다. 혼자 남은 여자는 아이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느라 야위고 약해져 간다. 그리고 결국 아이들과 다시 만나는 일 없이 일찍 죽어 묻힌다. 


 우리나라에도 노예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바로 노비제도다. 하지만 나는 노예제도보다  노비제도가 더 악독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노예는 피부색이 다르거나 인종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다른 인종을 저능하다고 여겼고, 천하다고 믿었으며, 발달이 덜 된 미개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고를 노예에게 심어주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 재우고 가축과 동일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비제도는 어떤가? 바로 이웃하고 지내던 이웃집 사람들이 다음 날부터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같은 민족, 같은 피부색, 같은 교육 수준에 있어도 노비는 양반은커녕 평민과 마주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지독한 차별과 계급의 구별이 우리나라에는 있었다. 노비는 혼까지 노비로 물들게 만들었다. 노비 문서를 만들어 대대로 사고 팔며 종속시켰다. 노비는 물건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분이 천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개혁의 의지도 가능성도 없는 꽉 막힌 세계. 그것이 과거 우리나라에 드리웠던 어둠이다. 


 이 시대는 어떨까? 조선이 대한민국이 되면서 우리는 자유를 되찾은 걸까?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누리고 있는가? 


 노예와 자유인의 간극은 아주 작은 사고의 차이에 있다. 자유인이라고 해도 사고가 노예나 다름없으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노예처럼 묶여 있더라도 자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고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노예로 살다 노예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생각의 문제다. 행동은 생각의 결과물이다. 아무리 무의식적인 행동, 충동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생각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의지라는 이야기다. 

 자유인으로 태어나 노예처럼 부려지는 삶이 있는가 하면, 노예로 태어나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되묻는다. 대답은 당연히 자유로운 삶이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 것이다. 


 나는 노예는 되지 않겠다.

그런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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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였는지 매일 '더 많은 것'을 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고, 효율을 높여야한다는 강박이 지극히 평범하면서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마 이런 깨달음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고 떠올렸다가 잊어버리고, 다시 잊었다가 떠올리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뭐, 그런 거겠죠. 이번의 깨달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질 거라는 걸 압니다. 그래서 몇 자 적어두기로 해요. 내일 혹은 더 나중의 내가 지금 끄적여 둔 이 글을 보고 다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라도요.


 『모모』를 처음 읽은 건, 10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오래됐거나 덜 오래 된 어느날이었습니다. 그때 어쩌다 읽게 됐는지는 기억하지 못해요. 그러나 그때도 이야기 속 모모의 모습과 시간도둑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렇게 살지 않겠어"라고 다짐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모모』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색 신사들, 즉 시간 도둑들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저 역시 잊어버린채 살아왔지요. 바쁘기 때문에 잊어버린 것인지, 잊어버렸기 때문에 바빠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두 가지 모두 사실이에요. 

 저는 잊어버렸고, 또 바빠졌다고 느꼈어요.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된 이유는 그런 거였습니다. 단순한 거였어요. 이런 물음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나는 왜 시간을 아낄수록 더 바빠지고, 시간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걸까?"


 책을 읽을 틈이 있음에도 전처럼 느긋하게 책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책을 읽으면서도 순간순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하는 생각에 방해를 받았구요. 결국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죠. 

 

"왜 이렇게 된 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내가 그렇게 되는 걸 허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모』에서 시간 도둑들은 결코 무단으로 시간을 빼앗아 가지는 않아요.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허락을 받고 난 후에야 시간을 빼내게 되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 도둑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되고, 너무 바빠서 다시 생각할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사람들은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더 시간이 없어지게 되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버려요. 서두르지 않으면 뒤쳐지고 말 것 같은 두려움에 떨지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모모는 자꾸만 더 서두르려는 사람에게 '느리게 할수록 더 빨리 나아가게 되'는 공간을 통해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느긋해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언제나 전력을 다해 달려나가는 걸 보게 될 것이고, 그들이 달려가면서 하는 소리를 듣게 될 테니까요. 

 "어이! 넌 지금 어마어마하게 뒤쳐지고 있다고! 패배자가 되고 말 거라고!!"

결국 이 말을 자꾸만 거듭해서 듣는 동안 조바심이 커질테고 다시 전력질주하는 대열로 돌아가게 되는 거지요.



 가볍게 쓰고 자려고 했는데 이거 또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해버렸네요.


『모모』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눠주는 존재인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내놓죠. 물론 모모는 푸는 데 성공하지요.

그 수수께끼는 이렇습니다.




  210쪽

 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이는 거야.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이 있어.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어. 셋째를 보려고 하면 두 형 중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 말해보렴. 세 형제는 하나일까? 아니면 둘일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일까? 꼬마야, 그들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으면, 넌 세 명의 막강한 지배자 이름을 알아맞히는 셈이야. 그들은 함께 커다란 왕국을 다스린단다. 또 왕국 자체이기도 하지! 그 점에서 그들은 똑같아.


 오이디푸스 왕은 스핑크스가 내놓는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테베의 왕이 되지요. 그 결말이 행복했든 불행했든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은 스핑크스의 재앙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지요. 모모에게 주어진 수수께끼는 무척 복잡해 보입니다. 하지만 호라 박사는 모모가 풀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호라 박사와 함께 있는 정확히 '반 시간 앞을 내다보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 역시 모모가 수수께끼를 푼다고 말하고요. 

 수수께끼의 핵심은 '세 형제'가 누구인가와 '그들이 함께 다스리는 왕국'이 어디인가입니다.


 정답을 알려드리자면 세 형제란 시간의 세 가지 속성,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의미해요. 

첫째는 미래고, 둘째는 과거고, 셋째는 현재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중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벌써 나갔다고 했지요. 

셋째가 있으려면 첫째가 둘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미래가 과거가 되는 중간이 바로 현재라는 뜻입니다. 

현재를 보려고 하지만 우리가 현재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그 현재는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현재를 보려고 해도 과거나 미래만 보게 되는 거지요. 세 형제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또 셋이겠지요. 

 그 세 명이 다스리는 왕국은 당연히 이 세상입니다. 

 모모는 오이디푸스 왕처럼 왕위를 얻지는 못하지만 시간의 속성을 깨달음으로써 시간 도둑들을 물리치고 갇혀있던 시간들을 본래의 주인들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전처럼 마음 껏 상상하며 뛰놀 수 있게 되고, 어른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일하고 살아가는 게 가능하게 되지요. 모모에게는 소중한 친구들이 돌아오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모모 이야기의 핵심은 '시간'에 있지요. 

그런데 이 시간을 빼앗아 가는 시간 도둑들은 사실 그 사람 자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위해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과 자신만을 위한 시간들을 줄이거나 없애버란다는 거지요. 그것은 성공일수도 있고, 권력일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지까지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되고, 단지 열심히 하기 위해 열심히 하는 무의미한 열심의 실천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말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과의 시간을 희생시키는 식이죠. 나중에는 돈은 많지만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 되는 것일까요?

 카르페 디엠. 

우리는 이 말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죠. 

"현재에 충실하라", "지금을 즐겨라" 뭐 이런 뜻이라는 걸요. 하지만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느끼는 게 사실이에요. 지금 이렇게 쓰고 있지만 제게도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달려야 하는데 무슨 소리냐며 잠꼬대 혹은 팔자 좋은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미래와 과거는 모두 현재를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방금 전에 현재였던 순간은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어요. 이제 월요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할 시간이라는 거지요. 어쩌면 이번 주 역시 지난 주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 바빠질 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제나 여유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모모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입니다. 모모가 무엇을 해줘서도 아니고, 뭔가를 많이 가진 것도 아니지만 모모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모모에게만 가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요. 모모의 비결은 잘 들어주는 것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잘 들어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모모에게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모라고 48시간을 사는 건 아니지요. 다만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줄 수 있는 시간을 얼마든지 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는 거지요. 


 시간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만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 지쳐가는 분들께 이 책 『모모』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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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2015-11-18 0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어요ㅎㅎ 시간은 모두다 똑같이 주어지는데 왜자꾸 짧다고 느껴지는지 시간에 비해 왜 성관 없냐고 늘 투정하고 저 자신에게 스트레스만 쌓인거 같거든요... ㅜㅜ

대장물방울 2015-11-21 06:43   좋아요 0 | URL
^^ 맞아요. 정말 요즘에는 어찌나 시간이 빨리가는지 일주일이 하루 같아요.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함께 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