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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이야기는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꾸며낸 이야기인 이 소설보다 실제의 사건이 더 참혹하게 느껴질만큼 지독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떠올리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기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가지만 이야기 해두기로 한다.
실제 사건에서의 범인은 '아버지'였다.
이 소설 속의 범인이 '낯선 사람'인 것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가?
현실은 꾸며낸 이야기보다 '거의 언제나' 더 비극적이며, 비참하다.
이 이야기는 열아홉 살이던 해에 납치되어 감금된 후, 7년이라는 긴 시간을 갇혀 지내다 아들의 활약으로 탈출한다는 이야기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천정의 작은 채광창으로부터의 빛 뿐인 사방 3.3미터 정도의 공간인 '룸'이 주된 배경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연은 7년째 갇혀 지내는 엄마와 룸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된 아들이다.
아, 정정해야겠다.
이 이야기는 '탈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들 '잭'이 느끼기에는 '룸'보다 바깥 세상 쪽이 더 위험하고, 힘겨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룸'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낸 두 사람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세상이라는 넓으면서도 룸보다 더 좁은 세계에 갇혀 지내는 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할 거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 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왜 떠오르지 않는지는 잠깐 생각해 보고 나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첫 째, 한 번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오로지 한 사람과의 관계가 전부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주된 화자인 아들 '잭'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막 다섯 번째 생일을 지낸 '잭'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공간에서도 티브이와 엄마를 통해 글자와 말을 익혔다.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분리 불안의 증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엄마와 약속된 시간에는 '엄마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통제력도 갖고 있다. 사실 이 점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분리 불안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가 엄마가 지정한 분리 시간 동안에는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것에서 분리 불안이 아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계속하게 된 이유는 잭과 엄마가 방에서 나온 이후에 거치는 사회화 과정에서 보이는 잭의 행동이 오히려 방 안에서의 통제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리 불안의 또다른 형태였을까 아니면 엄마가 잭의 나중을 생각해 고안해낸 '분리'라는 장치가 효과를 보았던 것일까.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생각해볼만 하다고 본다.
생각할만 하다고 보는 것에도 이유는 있다.
이 '엄마'의 '룸 탈출 계획'이 하루이틀 만에 세워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나는 잭의 언어 능력이다. 잘은 모르지만 통제된 공간과 환경에서 성장한 여섯 살 짜리 아이가 거의 완벽하게 읽고, 말하며, 좁은 공간에서도 적당한 근력과 순발력을 갖고 있으려면 분명 계획된 교육이 필요할 것 같은 거다.
둘은 잭의 자기 통제 능력이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자기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울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엄마는 그것을 해냈다. 그런 통제가 가능한 아이로 자신의 아들을 키워낸 것이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이 엄마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거다.
탈출에 성공한 이후 세상의 지나친 관심과 무례하고 무신경한 참견과 이익과 호기심의 해소를 위해 시도되는 모든 활동들은 두 사람을 상처입힌다. 잭이 룸을 그리워 하는 순간은 거의 그런 순간이었다. 잭에게 룸은 위험이자 공포다. 그러나 동시에 엄마와 자신 두 사람만의 아늑하고 안전하며 돌발상황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계획대로 움직이는 '통제 가능한 공간'이기도 하다. 만약 엄마가 원하지 않았다면,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의 상황에 처했음을 자각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잭'은 탈출을 생각했을까 싶어졌던 이유다.
무슨 수를 써서든 기회를 만들어 탈출하고자 하는 엄마와 잭은 이렇게 다르다. 분명 다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는 게 가장 좋다. 두 사람을 가뒀던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잭과 엄마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면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는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는 엄마와 아들의 생활기이자 탈출기인 동시에 적응기다. 그런데 내게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도 읽혔다.
"누구나 자기 안에 방 하나쯤 갖고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 공간에서 모든 것은 나의 의지로 움직이고, 통제가 된다. 무엇도 자신을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규칙도 존재한다. 무제한의 자유나, 무한한 쾌락 혹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천국 같은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공간의 최대 장점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나를 상처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 방에서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 역시 자신이기에 외부의 위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통제되지도 않는다. 자율적인 통제, 즉 자아가 그 공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간 후에 겪는 일들을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화'에 빗대어서 말이다.
아이는 태어나 엄마의 품에서 자라다, 가정이라는 최초의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에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게 되면서 그 사회는 점점 넓어지고 확대되는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는 '사회'라고 할 수 없는 '동일 시'되는 것이기에 관계가 시작되는 계기나 거리가 다른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엄마와 분리되어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자라면서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와도 같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왜?
혼자서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사람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것을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한 마디로 함께 하면서 구분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서의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난 후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죽었다'였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갑자기 사라졌을 뿐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록 어떤 형태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살아있다'였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고 믿은 것은 엄마였다. 아빠는 딸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후 엄마와 이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딸이 돌아온 후에도 서먹한 관계에 머물뿐 아니라 손자와도 어우러지지 못한다. 딸과 아빠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서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본래의 범인이 아빠였기에 둘은 화해하지 못하고 다시 멀어진 것 아닐까.
묘한 말이 괜스레 길어져버렸지만 이 책을 읽으며 아들 잭에게 거의 공감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 느껴지는 묘한 공감대는 정말 기묘한 것이다. 이 기묘함의 원인이 앞에서 이야기한 '누구나 갖고 있을 수 있는 자기 안의 방'에 대한 생각이란 걸 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던 범인과 의외로 번화한 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라는 의외성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악도 선도 실제로 평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특별하기도 하고 말이다.
엄마와 잭이 탈출한 이후에 세상은 아들에게 여러가지 칭호를 가져다 붙인다. 용감한 아이라거나 아름다운 천사 같은 말들 말이다. 그러나 잭은 자신의 마음을 '무섭-용감'이라는 식으로 단일한 것이 아닌 모호한 것으로 표현한다. 나는 잭의 표현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용감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무섭기도 하지만 용기를 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가 말이다. 천사같다는 칭호에 잭은 자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한다. 날개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지 않는 것, 그렇다고 여기지 않는 모습까지도 타인이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것은 굳이 정정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어서 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작 다섯 살인 잭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무섭-용감 상태이며 천사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순수함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특징은 아니다. '솔직함'이지만 그것이 '정말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 아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재밌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나만 재밌을 수도 있다. 솔직함이면 솔직함이지, 정말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건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건 하는 것이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인간은 학습된대로만 행동하는가? 가치있다고 배운 것을 정말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도 세상의 누군가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것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 답이 나올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인간은 학습된 대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가치있다고 배웠다고 해서 그 가치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학습된 것보다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려고 하고, 가치있다고 가르쳐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기보다 스스로 가치있다고 믿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고생스럽지만 그렇게 하는 거다. 잭에게는 사실 반드시 탈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간절히 탈출을 바라고 원했다. 그래서 마치 소원을 이루어주는 지니처럼 죽은 척하고 밖으로 나가 엄마를 구한 것이다. 잭은 어린 나이에 이미 가치의 충돌을 경험한 셈이다. 자신을 위한 가치와 자신이 이루어주고 싶은 가치 사이를 저울질 한 후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다섯 살 생일 전까지 엄마는 그 공간이 마치 '완벽한 것'처럼 가르쳤던 것 같다. 티브이를 통해 보는 '모든 것'이 '가짜'라고 가르친 것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 단서가 생긴다. 물론 그것은 자기 방어적인 '생존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언제까지 갇혀 지낼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에게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을 가르치려고 해도 잘 되었을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자꾸 적어봤자, 횡설수설만 늘어날 것 같으니 적당히 마무리 하기로 한다.
느닷 없이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결국 자기의 삶은 자신의 삶이어야 한다."는 거다.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만의 완벽하고 또 안전한 방 하나쯤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방 안에 다른 사람을 가둬서는 안 된다. 물론 자기 자신을 가둬서도 안 되고 말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동안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서로의 행복을 망칠 뿐,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