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바벨의 도서관 27
허먼 멜빌 지음, 김세미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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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우리는 언제 놀라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 속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했는가?"하는 물음과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필경사 바틀비』는 두 질문에 같은 것으로 답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내가 생각한 답은 '허무함' 혹은 그와 쌍둥이나 다름없는 '덧없음'이다. 

무엇의 허무함이고 덧없음인지 얼마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신을 '나'로 소개한 화자는 스스로 밝히기를 '극도의 안전 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법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야망 없는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며, '부자들의 채권과 저당권과 권리증서들을 다루며 안락하게 일'하는 신중함이 장점이라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나'가 업무가 크게 늘면서 새로운 필경사를 고용하게 된다. 그렇게 고용된 필경사가 바로 '바틀비'다. 

 보통의 필경사를 기대했던 '나'의 바람과 무관하게 바틀비는 필사 외의 업무를 거부한다. 정말 당당하고도 단호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거다. 아마도 '나'가 극도의 안전 주의자인 동시에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업무를 거부하고도 바틀비는 당장에 해고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틀비는 점점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늘어간다. 

 '나'는 결국 특단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바틀비의 운명은 비극적인 결말을 향한다.

『모비딕』속 에이해브의 광기에 찬 복수와 비극적 운명과도 닮아 있는 바틀비지만 그 태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하고 싶지 않다'는 수동적인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능동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바틀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자면 '수동적 능동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가 결말에 닿아 '나'가 바틀비의 이력을 이야기해줄 때까지 독자는 왜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아 하는지, 그 고집스러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는 저절로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바틀비의 '싶은'이라는 표현이 갖는 마력이 전염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내 경우에는 평생을 필사로 먹고 살아온 60대 동료 필경사인 터키가 쓴 '싶다'는 단어를 '나'가 짚어내는 순간에 바틀비처럼 나 자신 역시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에 놀란 이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뭐라고 마음속에 숨겨진 '소망'이라고 해도 좋을 본능을 일깨웠을까 싶어 졌기 때문이다. 

 터키도, 또 다른 필경사 니퍼즈도, 화자인 '나'조차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틀비의 당당하고도 단호한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태도에 끌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야기가 결말 무렵에 이르면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끌림, 전염이 사실은 이미 텅 빈 껍데기를 향한 '죽어버린' 혹은 '의미를 잃어버린' 어떤 것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 짧은 소설, 도무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거부를 거듭하는 바틀비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 된다(왜 그런지 궁금하다면 길지 않으니 꼭 읽어보시길).    


 세상에 존재하는 일단의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하나의 의미가 살아남아 전해지기 위해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바틀비의 이야기가 허무함과 덧없음에 수렴하는 이유는 이미 바틀비는 의미를 잃고 껍데기만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바틀비의 말과 행동이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 또한 바틀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 역시 텅 비어있었으므로, 바틀비의 울림을 따라 공명했던 것이 아닐까. 그 공명이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의 내부에까지 퍼졌던 것은 아닐까.


 '본래 그러했어야 했던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런 의도가 전해 지거나 실현되지 못하고 유실되어 사라졌다면, 그 사라짐으로 인해 처음의 의도를 통해 삶의 무게 혹은 마음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던 사람들, 행복해져야 했던 사람들이 불행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갔다면(반드시 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닐지라도) 처음의 의도는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어지는 것일까.


 바틀비의 이야기에 담긴 비극은 그 지독한 허무함으로 허무 타령을 일 삼곤 했던 나를 놀라게 했다.

덧없음이 다시 의미를 갖는 순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무함은, 덧없음은 상실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바틀비의 삶은 허무했으나 그의 이야기는 전해지고 다시 전해져서 다른 의미를 낳을 것이다. 

'싶다'는 말이 사치처럼, 때로는 금기처럼 되어버린 시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오래된 박물관의 박제처럼 낡아가는 이 날들에 바틀비의 삶은 어떤 의미를 낳게 될까.

 새롭게 생겨난 이 의미에 허무함과 덧없음에서 느꼈던 놀라움보다 더 커다란 놀라움을 느낀다.


 조용하고 격렬하게 분노하는, 수동적인 능동성을 소유한 바틀비.

나도 가끔 바틀비처럼 말하고 싶어 질 것 같다.

"아니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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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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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걸 쓰다 말고 간단히 죽어버렸을까."

이 소설의 마지막에 적힌 -미완-이라는 단어를 보며 했던 생각이었어요. 

600페이지 가까이 늘어놓고도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이야기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글을 읽는 일이 쓸쓸한 일이라는 걸 새삼 실감합니다.


다음이 없는 이야기.

계속될 수 없는 이야기.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이야기.

필연만이 있고, 우연은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는 쓸쓸한 것이더군요.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0대 남자가 있어요. 

남자에게는 과거가 여럿 있는데(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역사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여자'입니다.

결혼의 상대가 아닌 그 '여자'와 헤어진 지 오래지 않아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게 지금의 아내인데, 이 아내와의 만남이 제법 극적이라 당시에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한 모양이 되었습니다. 남자에게가 아니라 여자에게 드물게요. 

이 남자의 아내는 독립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주관도 뚜렷해서 당시 일본의 여성상보다는 '현대 여성상(그런 게 있다면 말 입니다만)'에 더 가깝습니다.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지요. 

 남자의 집도, 여자의 집도 제법 잘 살아서 생활에 걱정이 없을 것 같지만, 남자나 여자나 조금은 헤프달까요, 자기들을 위해 돈을 쓰는 것에 머뭇거림이 없다 보니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받아 살고 있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벗어날 생각이 없이 당연히 계속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죠. 그러다 남자의 아버지가 화가 나서는 더는 돈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해버립니다. 남자는 곤란해지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식으로 태평하게 지냅니다. 실제로도 어떻게든 되어가지요.

 이 남자에게는 병이 있는데(죽을병은 아니고요), 그 병의 치료를 위해 수술을 하게 됩니다. 간단한 거라고는 해도 일주일쯤 입원해 있어야 하는 거였죠. 병원에 병문안을 온 사람이 몇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남자를 돌봐주고 있는 집안의 부인입니다. 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고, 남자의 '과거의 여자'와도 밀접한 사람이죠. 그 사람이 와서는 전에 그 여자의 근황을 알려주며 제안을 하나 합니다. 

 그 여자가 유산으로 요양 중인 온천으로 이 남자를 보내주겠다는 거였죠. 물론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고요. 

 그 전과 후에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 사람들의 심리와 시선을 따라다니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줍니다. 소세키 답다고 해야겠죠.


 이런 식의 이야기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100년 전에 죽었습니다. 

 100년 전은 일본이란 나라가 지금보다 더 가부장적이고 호전적인 시대였기에 소세키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나는 남성우월주의를 참아줄 수 있다면 아마 더 많은 사람이 소세키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사상이 아닌, 시선을 말이죠. 

 잘 사는 집안 출신의, 최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인 소세키가 왜 그렇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외로워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런 이해에 대한 갈망과 고독이 만들어낸 세상을 향한 시선과 해석을 즐길 뿐이죠.

 소세키가 편안하게 읽히는 이유는 사람답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사소한 일로 다투고 삐치고, 고집을 부리고, 허세를 내세우고, 그러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경제를 논한다거나, 세계를 염려하지도 않는 평범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도 이해를 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의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남의 것 같지 않아서요.

  

 그런 소세키가 죽기 직전까지 쓰던 작품이 바로 이 『명암』이라는 소설입니다. 우연과 필연의 이야기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요. 


우연에 대해서라면 저마다 한 마디씩 할 말이 있겠고, 생각이 있겠지요. 소세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푸앵카레의 주장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이 우연, 우연, 하는 이른바 우연한 사건이라는 건 원인이 너무 복잡해서 도무지 짐작이 안 될 때 쓰는 말이네."

 그럴 듯 한 말이죠? 

그런데 이런 우연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쉽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알게 되는 순간 우연은 당연한 결과가 되어버리는 거지요.


소세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이상해도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당신처럼 그렇게……." 
"그래서 이제 이상하지 않아요. 이유만 들으면 뭐든지 당연해지네요."

정말 당연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가 납득할 만하다면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존재.

사람이란 그런 모순된 존재입니다. 아주 당연한 것도 납득할 수 없다면 이상하게 여기는 그런 존재요.


그래서일 겁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우연한 사건보다 필연적인 사건에 더 놀라게 되는 것이라고요.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해놓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고는 하는지.


나비효과, 머피의 법칙.

그건 정말 우연이었을까요.

<과학 콘서트>라는 책에서도 우연에 대한 이야기 나옵니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연이란 신이 서명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가명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원인 없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원인이 있는데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막연히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명암』을 통해 소세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이요. 

그런데 혹시 아나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을지요.

 이 이야기를 쓰다 소세키가 죽는 것도,

100년이 지난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읽은 것도,

이 이야기를 읽고 쓴 이 감상을 당신이 읽는 것도.


세상에 우연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무수한 선택의 연속과  결과 외에는요.

당신은 우연을 믿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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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최정수 옮김 / 부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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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한다'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나만의 감각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통한다는 게 비슷하다거나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가 끌린다는 말처럼 같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럼, 통한다는 건 뭘까?

앞뒤 다 자르고 정말 간단하고 단순하게 적어보기로 한다.

통한다는 건, 서로에게 이해의 여지를 둔다는 거다.

이해의 여지를 둔다는 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기울인다는 거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자기 뜻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상대만을 찾아다니는 비겁한 부류도 존재한다. 

반대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서로를 너무 아끼고, 이해하려고 하고, 배려하기에 오히려 오해가 생기고 다투게 되는 일이 늘어나는 사람들 말이다. 

덜 사랑하고, 덜 이해하기에 덜 다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싶기에 더 다투는 사람들이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스크바에서의 오해>는 후자의 이야기다.

그들은 너무 사랑하고, 너무 이해하고 싶고, 너무 함께 하고 싶었기에 오해를 하고 다투게 된다. 

사르트르라는 거대한 지성의 동반자로 생을 함께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여성의 첫인상이 된 이 소설은 너무 귀엽고, 애틋해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람들인지.


<모스크바에서의 오해>에는 개인적으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출간 소식을 듣고 마침 서평단을 모집하기에 신청을 했더란다.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아이고, 이거 떨어졌구나."하고는 다른 책을 사며 함께 사버렸다.

책이 도착하고, 읽기 시작한 다음 날 한 권의 책이 내게 왔다. 

그 책의 제목도 <모스크바에서의 오해>였다. 

하루 늦게 받은 서평 도서였다. 그렇게 이 책은 두 권이 된 거다. 


이 에피소드가 개인적으로 재밌게 느껴진 건 <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속 주인공들처럼 사소한 일(서평단 당첨 공지를 확인하지 않은) 하나로 내 쪽에서 일방적인 오해를 하게 됐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60대의 노부부가 러시아로 이주해 살아가는 딸의 집에 한 달 일정의 휴가를 보내기로 한 데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에게 몰두하고, 사랑하기에 지치지 않았다.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이라 더 함께 있고 싶고, 서로의 즐거움을 위해 조금의 양보와 희생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남편 앙드레는 더 돌아다니고 싶고, 러시아의 풍경을 즐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아내 니콜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 알기에 자제한다. 니콜은 니콜대로 러시아나 모스크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앙드레가 좋아하기에 기꺼이 동행한다. 그런 두 사람이 크게 다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앙드레가 얘기도 없이 일정을 10일이나 늘인 데서 생겨났다. 

 앙드레는 자신이 얘기를 했고 니콜도 동의했다고 말했지만, 니콜은 앙드레가 일방적으로 정했고 자신에게 얘기한 적이 없다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당신은 좋은지 몰라도 너무 지루하다고 말해버렸던 거다. 두 사람은 하마터면 별거까지 가게 될 만큼 크게 다투는데 그 상황을 해결한 건 정말 사소하고 단순한 방법, 잠시 동안의 대화였다. 


 얼마나 자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묻고 싶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서 꺼내지 못하고 참다가 한 순간에 터뜨려서 서로 당황하고 화를 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기에 이 책 속의 이야기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 거다.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참 많다.

바빠서, 그런 것까지 다 얘기해야 하나, 좀 이해해주면 안 될까.

이런저런 상황이나 조건, 동정에의 호소, 일방적인 요구. 

대화는 너무 많은 이유로 봉쇄되고 오해는 그 몸피를 끊임없이 불려 간다.

결정적인 상황에 이르러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건 사실 단순하고 간단하다.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잠시 동안의 대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 쓰는 이들이라면 아주 잠시 동안의 대화로도 많은 것을 풀어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거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니콜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다. 앙드레 곁에서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한다."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 납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느끼는 고독은 그 사람이 소중할수록 급격히 커진다. 그 납득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달콤하지도 않을 거라는 건 뻔한 일이다.


니콜과 앙드레, 두 사람은 서로를 몹시 사랑하지만 서로에 대해 크고 작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예로 나이 듦에 대해 상대방의 생각을 추측하는 장면이 있다. 니콜은 앙드레가 젊은 시절과 다르지 않으며 나이 듦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는다. 반대로 앙드레는 자신보다 니콜이 나이 듦에 대해 덜 불편해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당신은 좋겠어. 변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질투와 원망을 담아서. 조금의 실망과 함께.


 이 모든 오해가 풀리는 순간의 대화는 소꿉놀이 중에 다투는 어린아이들을 닮아있다.

"당신에게 하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있어." 니콜이 말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난 팍삭 늙어버렸어.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아주 작은 불만도 견딜 수가 없었지. 당신은 나이를 느끼지 않겠지. 하지만 난 느껴." 
"오! 나도 나이를 느껴." 앙드레가 말했다. "심지어 나이 생각을 자주 한다고."
"정말이야? 한 번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잖아." "당신을 슬프게 하기 싫었으니까. 당신도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잖아." 
(중략)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야, 그녀가 생각했다. 대화가 되지 않는 부부 사이에는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우리 관계가 망가졌을까 봐 조금 두려웠어."
"나도 그랬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야." 그가 말했다. "우린 반드시 이야기를 나눠야 했어."
"그래, 맞는 말이야. 다음번엔 겁내지 않을 거야."

이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려울까를 생각해보면 '겁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가 위축되고, 상대에게 '이해를 구해야'하는 '약자'가 되는 게 겁나고, 얘기를 했을 때 이해받지 못할까 겁나고, 얘기하고 나서 후회할까 겁이 나고, 지금의 관계조차 깨질까 봐 겁내는 일.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자주 일어날까.


더 이상 겁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걸 겁내지 말아야겠다.

이 짧은 소설, 너무 쉽고 간단히 읽히는 이야기는 내게 겁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대화를 많이 해서 오해가 생기는 일은 없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게 대화가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서로에게 허락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언제나 오해는 대화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러니, 대화해야 한다. 사랑해야 하고.


이제,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를 시작할 결심이 섰다. 

마치 짧은 대화를 나눈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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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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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사랑 중요하고, 사랑하는 거 좋다. 그래도 도서관 장서에 밑줄 긋지는 말자.


 제목이 『밑줄 긋는 남자』고, 실제로 도서관 책에 그은 밑줄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나는 도서관 장서에 밑줄 긋는 사람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싫어한다. 마치 혼자 보는 것처럼, 자기 책은 줄을 긋기는커녕 표지가 긁히는 것조 못 참으면서 공공의 도서에는 그렇게 마구 긋는 것만큼 예의 없는 행동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 모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그러지 말자.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다. 
로맹 가리를 몹시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은 콩스탕스, 이름의 뜻은 변함없음, 한결같음, 항상성. 콩스탕스가 정말 안타까워하는 건 로맹 가리가 쓴 소설이 고작 서른한 편이라는 사실. 일 년에 한 권씩 읽어도 곧 고갈될 것을 고민하기 시작한 콩스탕스는 다른 작가를 발굴함으로써 로맹 가리의 고갈을 늦추려는 시도를 한다. 그 시도의 하나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로 한다. 

 콩스탕스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우연히 밑줄이 그어진 걸 발견한다. 그런데 이 밑줄이 그어진 부분이 절묘하게도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콩스탕스는 '혹시 누가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밑줄 그은 남자가 일러주는 다음 책을 찾아다니면서 누군지 모르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밑줄 긋는 남자』는 그렇게 알게 된 밑줄 긋는 남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정확히는 밑줄이 엄청 많이 등장한다. 로맹 가리, 도스토예프스키, 키르케고르와 같은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 주연인 셈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심리를 완벽하게 대변하는 고전 속 문장들을 읽어가는 재미가 색다른 즐거움이 되어준다. 


 도서관 장서의 틈바구니에서 로맨스가 일어나고 사랑이 싹튼다는 설정도 좋다. 죽은 나무의 무덤, 텍스트의 집합소가 아닌 생명이 움트는 공간, 감정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가 된다는 그 설렘이 좋은 거다. 한 번쯤 꿈꿔보게 되는 그런 낭만적 사랑이랄까.


 물론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는 하지만, 도서관 장서에 그렇게 마구 밑줄을 그으면 곤란하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도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내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말이다. 


 주된 관전 포인트는 콩스탕스의 감정의 흐름이다. 기대에서 흥분으로 나아가다가 실망하고 좌절했다가, 분노하기도 하는 그 과정에서 '남자'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사랑이라는 게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인 것마냥, 그렇게 보이는 거다. 하지만 어떤 사랑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가볍게 읽히면서, 이세욱 번역가의 맛깔난 우리말 표현도 즐길 수 있어서 잔재미가 많은 작품이다. 영어보다 낯선 우리말을 여럿 목격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콩스탕스가 클로드라는 남자 대학생과 처음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의 '남자가 리드해주지 않아서 좀 그렇다. 남자라면 박력이 있어야지'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는 좀 의외였다. 여자가 바라는 남자의 모습이란 국경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남자가 그래야만 하는 건가 하는 약간의 의문도 있었다.

 뭐, 꼭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저, 다만, 약간 그랬다는 거다. 


 문학이 사랑을 일으키고, 인연을 맺게 하는 이야기. 이건 문학에 하나의 가능성을 더하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단지 읽으면 재밌고 즐거울 뿐 아니라, 문학이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든지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니 말이다.


 더 많은 사람이 문학을 즐겼으면 좋겠다. 그 안에서 사랑을 찾고, 사람을 배우고, 그 배움이 사람들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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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5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물방울 2016-07-25 00:11   좋아요 1 | URL
:) 정말, 설정이 묘하지요. 그래서 취지만 받아들이고 문장을 옮겨 적었구나~ 하는 걸로 이해했어요. 도서관 책 훼손하는 사람 정말 ㅠㅡㅜ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지금보다 더 순진했던 날들에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하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설마'보다 더 나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었고,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닌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상처를 기꺼워하는 사람은 없다.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굳이 몸이나 마음에 새기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어딘가에 병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너무 많은 경우에 이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거다. 


 이 책《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상식적인 사람들의 비상식적인 행동과 태도에 대한 10가지 심리 실험이다. 목적은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재해나 재난, 폭력, 전쟁처럼 개인이 제어할 수 없는 충격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과 사랑의 근원과 같은 내밀한 심리까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결과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거다.


 중요한 건 이 책 역시 그러한 실험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잊지 않는 거다. 

 "그런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것을 알거나 모르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세상의 누군가가 경험한 일이라면 그 일이 언제, 누구에게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결정적인 근거 가운데에는 '사고한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 '사고능력'은 많은 순간 통제 불능이 되거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혹시 일어날지 모를 그러한 상황에 대한 예방접종 정도의 역할은 해줄 수 있으리라. 


 이것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나는 대체로 '트라우마'를 부정하려고 하는 편이다. 트라우마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것을 트라우마로 설명하려고 하는 불성실함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있어서 '할 수 없다'는 것, 그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거짓인 걸까?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스키너라는 사람은 행동주의 심리학자로 '스키너의 심리 상자'를 고안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이론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체벌은 인간의 그 어떤 것도 개선할 수 없다."는 거다. '적절한 보상'의 지급을 학습시키는 것을 통해 얼마든지 교육시킬 수도 개선시킬 수도 있다는 거다. 


 스키너의 이론에 따르면 체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얼핏 생각해도 뭔가를 하지 않게 하는 데는 체벌이 그나마 효과적일 것 같지만 무엇을 하게 만드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을 것 같다(실제로는 하지 않게 하는 데에도 큰 효과가 없다고 한다). 반대로 뭔가를 했을 때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 보상이 적절하다면 뭔가를 더 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다. 어떤 사람은 단점을 보완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은 장점을 극대화하라고 가르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간단히 바로잡을 수 있는 단점은 보완하되 장점을 해칠 것 같다면 그만두라고 하는가 하면, 장점이 조금 줄어들더라도 최대한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한다. 

 어느 방법을 택하는 게 최선일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서 다루는 심리실험들은 분명 납득할 만한 결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절대적이지는 않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다. 


 10가지 실험 중에 한 가지의 결론만을 꺼내놓았을 뿐인데, 벌써 지치는 것 같다. 그러니 다른 실험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돌려야겠다.


 모든 실험들이 생각해볼 만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한 가지만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인지 부조화에 대한 실험의 결론 부분이다.

 우리는 평생 자신의 믿음과 일치되는 정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주변에 자신의 믿음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두며, 자신이 이미 저질러놓은 것을 의심케 하는 모순된 정보는 무시해버린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중

 인지의 부조화의 흔한 예로 '나쁜 남자(여자)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서 자꾸만 좋은 점을 찾고, 발견하려 하고, 합리화하기를 계속하는 것은 아마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면서 계속하는 행동일 거다. 자신이 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선택했기에 자기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꾸만 거짓된 믿음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서 다루고 있는 실험은 하나 같이 세상을 흔들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표방한 '악의 평범성'과 '권위에의 복종', '사랑', '인지부조화'처럼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영원한 숙제들 말이다.


 인간이 선한 존재로 태어나는지 악한 존재로 태어나는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거다. 불완전하기에 더 알고자, 완전해지고자 노력하지만 때로는 그 과정이 불완전성을 키우기도 한다.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나 해석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더 많은 여지와 가능성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앞으로도 심리실험은 계속될 것이고, 그 심리실험이 설명하지 못하는 일들은 여전히 벌어질 것이며,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살아가게 될 거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것만 알아도 이해의 여지는 커지지 않을까. 

 이해하고 싶다. 이해까지는 아니라도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정도는 깨닫고 싶다. 내가 바라는  그저,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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