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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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혼자 살고 있는 바움가트너가 논문에 인용할 책이 아래층에 있다는 걸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책을 가지러 내려오는 중에 동생에게 전화하기로 한 걸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마침 전화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 전화를 걸러 가다가 부엌에서 나는 냄새에 버너에 계란을 올려두고 잊어버렸다는 걸 떠올리고 급한 마음에 맨손으로 냄비 손잡이를 잡아버려 순간 느껴진 뜨거움에 냄비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게 되고 비명을 지르며 화상을 입었을지 모를 손을 찬물로 식히는데 마침 전화벨이 울리기에 동생인가 하고 전화를 받았더니 전기 회사 계량기 검침원이고 통화를 마치고 이번에야말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더니 마침 초인종이 울려서 문을 열고 보니 책을 배송하러 온 배달원이었는데 그와 소소한 즐거움인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걸려고 했더니 다시 전화벨이 울려서,,,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 바움가트너의 적나라한 삶, 소설 『바움가트너』는 그런 이야기다. 흐르는 시간처럼 끊기지 않고 한 문장으로 구구절절이 이어나갈 수 있는 어디엔가, 누구에겐가 일어났거나 일어났을 보통의 삶.

10년 전쯤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 70대 남자, 그 남자 이름은 바움가트너로 그는 교수였고 지금은 논문이며 글을 쓰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면서 먼저 떠나버린 아내와의 마지막을 회상하며 후회하거나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변화를 주고 싶은, 더 깊은 의미로 지금과 다르면서 과거와 같은 삶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고 있다. 마치 10대 아이들이 호감 가는 사람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고서는 기대하거나 걱정하면서 자기가 고백해야만 하는 확실한 이유를 찾는 것처럼. 

 만약  사람이 평생 가장 사랑한 존재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다면 그를 애도하는데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1년이면 될까, 10년이어도 부족할까. 바움가트너에게는 1년이면 되었던  같기도 하고 10년이 지났어도 부족한 것만 같다. 어지럽게 떠오르고 이어지는 일상의 생각들이 언뜻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거의 모든 순간 아내의 부재를 어떤 식으로든 메꾸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져서다. 나라면, 내게 소중한 누군가를 아무것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떠나보냈다면, 상상하는 것조차 싫은  생각이 현실이라면 삶은 계속되는 걸까. 

 소설은 마치 바움가트너 자신의 삶은 이미 10년 전에 끝이 났고 지금은 다만 살아지는 삶을 살아내는 것처럼 날것 그대로 흐르는 시간을 이어 붙인다. 문장이 길어지거나 반복되거나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것도 그게 삶이어 서일 것이다. 사람이 없는데,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렸는데  늦게, 그토록 나이 든 사람에게 어떻게 새로운 삶이 찾아올  있는가 묻는 것처럼. 

 소설 제목이 사람의 이름이 되면  이렇게 고요한  깊고  여운이 되는 걸까. 법이  사람의 이름이 그의 사연과 이야기를 기억하게 하듯, 나와 전혀 무관한, 애초에 세상에 존재한  없는 허구의 인물의 삶을 기억해 달라는 걸까.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때로 작가는 어떤 완벽한 예언을 하기도 하니까. 


 소설은 살아내는 바움가트너의 마음과 무관하게 너무 간단히, 쉽게, 술술 읽힌다. 의문도 고민도 없이 작가가 펼쳐 보여주는 이야기에 영상을 덧입히듯 어제  삶에 있던 대화나 오래전 어딘가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페이지가 나아갈수록 남은 종이가 줄어들수록 바움가트너에게 어떤 형태이든 구원, 변화의 계기가 찾아올까 하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이대로 지지부진, 머뭇거리다 끝장나는  아닐까 하는 허무함을 두려워하는 마음. 


 스포일러는 좋아하지 않아서 꾹꾹 비밀로 하려니 이야기를 풀어내기 쉽지 않다. 


아마  소설을 읽는 다른 독자의 마음도 비슷한 흐름을 따라갈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적나라한 삶을 마주한 사람들의 태도란 대개 비슷해지니까.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바움가트너에게 그가 적응하지 못한, 상상하거나 일으킬  없는 변화가 찾아오기를. 그가 집필 중인 『운전대의 신비』가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까지 온전히 완결되기를. 기적은 있음을. 


『바움가트너』는 소설이지만 표지 뒤에 적힌 작가의 약력을 본다거나 이미 작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작가 본인의 이야기와 연결 짓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출시지역, 등장인물의 가계와 작가의 혈통, 다른 형태의 헤어짐이긴 하지만 아내의 부재와 그 이후에도 이어진 집필. 마치 작가의 자기 고백처럼 들려도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 작가가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이 소설은 진실이지만 모든 소설은 허구고 모든 소설은 작가와 떼어놓을 수 없지만 작가의 삶과 완전히 무관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폴 오스터 유작 출간에 앞서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오직 100명에게만 주어지는 기회라고 해서 덜컥 신청했더니 선정되었다는 메시지가 왔고 도착한 책에는 No. 6이라고 적혀있었다. 여섯 번째.  읽어가는 시점에 정식 출간된 도서를 주문해 두고 감상 적기를 미뤘다. 둘을 나란히 두고 찍어야 어떤 의미 있는 마무리가   같아서. 다만 주문이 늦어서 지금은 함께 올리지 못한다. 


 업데이트.

덧붙이기 역시 삶에 흔한 일이니까.

함께 찍은 사진은 뒤에 덧붙이기로 하고, 지금은 지금 있는 대로 기록을 마친다.


 새삼, 작가,  오스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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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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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12월 4일 새벽, 책 한 권을 주문했다.

그날의 이름과 같은 책, 『계엄』이다. 주문하던 새벽에는 금세 읽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눠봐야지 했건만 3주도 더 지난 오늘에야 짧은 감상을 시작한다.


3주나 미뤄진 데에는 밖으로는 계엄 후의 풍경이 착찹해서고 안으로는 상상하던 내용과 조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비상계엄이 빠르게 해제 의결되고 실제로 해제 선언을 하면서 이후에는 당연히 진실한 사과와 온당한 처벌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듯 우리는 힘겨루기 중이다. 누가 이겨도 불행한 나날.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계엄』은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한 일본인이 우연히 1979년 서울로 일본어를 가르치러 오는 데서 시작된다. 1979년과 제목 『계엄』은 다만 그 정도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 뿐, 사실 이 책은 계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계엄의 엄중함이나 비극보다 오히려 1979년 당시의 국내 정세와 서울의 모습 등이 또렷이 담겨 있다. 지금의 서울은 5년 전과 또 달라져있겠지만 소설 속 1979년의 서울은 상상보다 더 초라했다. 막 지어진 고층 아파트에서 보이는 게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가 아니라 논과 밭이라면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할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 그만큼 서울의 변화, 우리의 발전 속도는 빨랐고 그 간극 역시 클 수밖에 없다.


『계엄』을 읽으며 발견한 건 의외의 단서다. 지금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 무효' 시위에 나서는 어른들과 어떻게든 대통령과 당의 안위를 챙겨보려는 정부와 여당이 왜 그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간신히 넘어왔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목격하고도 '설마 대통령이 그랬겠느냐'거나 '그래도 대통령을 몰아내서야 되겠냐'하는 10% 남짓의 지지자들의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 『계엄』이 전두환 신군부 비상계엄의 엄중함이나 이후의 비극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서술하게 된 건 주인공이 일본인이고, 대한민국에 오래 머물거나 사회의 혼란에 밀접하게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엄 이후의 상황, 광주의 비극, 한국의 발전 소식을 거의 일본에서 해외 소식으로 듣는 간접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남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과 소식이 자신에게 어떤 신체적이거나 경제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거나 건너 아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기에 가끔 걱정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그건 자신이 좋은 사람,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안타까워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기에 함께 할 이유도, 같이 싸워 얻을 무언가도 없는 완벽한 타인. 계엄이 경계하는 건 그들이 아니기에 어쩌면 돌이킬 수 없었을 사건들을 두고 "그래도 그 걸 다 이겨내서 다행이네"라거나 "어쨌든 잘 됐으니 더 다투지 말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들이 삐딱하게 읽혔다면 옳게 읽은 것이다.


잃거나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어쩌면 전혀 무관한 사람들 혹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난 12월 3일의 계엄을 무감각하게 옹호하는 것이다. 반대로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들, 정말 밀접히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12월 3일의 계엄을 전력으로 두둔할 수밖에 없다. 무감각과 전력이 뭉쳐 80%의 국민과 싸우는 모양이 오늘의 대한민국 풍경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월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63년에는 민정을 회복시키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2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과 함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0월 유신'을 내세워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새마을 운동'을 주창하며 농촌 근대화를 추진하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고도성장을 이뤘다. 1974년 북한에서 보낸 재일 한국인이 쏜 흉탄에 육영수 여사를 잃었지만 평생을 걸쳐 청렴결백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17년 동안 한국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무리 아쉬워해도 충분하지 않았다.『계엄』

"대통령이 친일이라는 뜻인가?" "아닙니다. 대통령은 친일이 아닙니다. 선생님, 아시겠어요? 우리나라에 친일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한국에는 단지 한국만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대통령은 일본의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일본 정치인들과도 친하고 지냈고 일본어도 자유롭게 구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계엄』

누군가에게는 일본인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들이 서술하는 역사가 자신의 체험이자 자기의 역사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자기 이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추구한 적 없는 사람으로 박정희를 기억하듯 윤석열과 그 일당도 그렇게 믿는 것이다.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는' 믿음. 그리고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두환 때랑은 다르다"라는 말에 설득력을 더한다.

"아, 그렇게 믿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오는 것도 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해의 갈래가 생겨나는 것이다.

시중에는 대통령이 총살당하던 날 밤 산토리 위스키를 마셨다는 것과 옆에 인기 절정인 가수가 있었다는 비속한 소문이 돌았다.

『계엄』

10. 26 당일 밤, 박정희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는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더 적지만 그때는 '비속한 소문'으로 치부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이므로. 자신들이 젊음과 피, 땀을 바쳐 이뤄낸 기적의 선봉에 선 사람을 흠집 낸다면 자기가 흠집이 나는 것만 같았을 것이므로. 그의 부정과 비행, 혹은 악의는 부인해야 하는 것이고 오히려 순교자처럼 숭고하게 만드는 편이 자신들의 젊음과 온당한 마음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라면 친일파, 독재자의 이름을 붙여두어야 할 자리에 다른 이름을 붙여두고 '그래야만 한다'라고 선언한 후 바꾸지 않는 것이다. 그랬고 그래왔던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이 나아지느냐.


책임과 재발방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며 인심 후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까지 양보하는데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하며 윽박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윤석열, 정부, 여당, 그의 10% 남짓한 지지자의 생각인 것이다.


『계엄』을 읽은 가장 큰 효용이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라는 게 서글프다. 남일처럼 생각해도 되는 외국인의 시각이나 다를 바 없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저 위에 앉아있던 것이다. 역사나 국민보다 자기와 내 편들 이 중요한 이기심과 독재, 기이한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가짜 무속인들이 판치는 오늘.


우리가 계엄해야 하는 건, 엄중히 경계해야 하는 건 그런 가짜들, 가짜와 거짓을 자신과 한 몸이라 믿는 사람들, 애매모호한 연민, 그래서 너는 잘한 게 뭐냐는 갈라 치기, 이 기회를 틈타 자기 변신을 꿈꾸는 음모론자들이다.


경계하라.

이건 우리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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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 성심당의 도시, 대전이 만들어진 이유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104
주혜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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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 소도시로 이주하면서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멀어졌다. 처음에는 드물게나마 안부를 물었지만 몇 년이나 지난 지금은 SNS나 우연히 연락이 닿은 지인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전부다. 이렇게 얘기하면 '소도시의 쓸쓸'이나 '지방의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겠구나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도시 생활에 적응하고 나니 서울에서 살며 누리거나 누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편안함과 낯선 도시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불편과 어려움에 두루 익숙해진 지난 겨울 이 책을 알게 됐다.


 『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보고 '대전이 노잼도시'인 이유와 그럴 수밖에 없는 근거를 담은 책인걸까 생각하며 천천히 읽었다. 대전이 노잼도시로 불린다는 걸 이렇게 명확하게 인지한 건 처음이라 가벼운 충격과 궁금증이 생겼다.


 책은 크게 다섯으로 나누어 지방 도시, 노잼도시, 대전을 이야기한다. 처음은 현재 거의 모든 지역이 직면한 소멸이라는 이슈로 연다. 다음으로 검색과 SNS가 도시와 장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 세 번째로 노잼도시 대전을 분석한다. 네 번째로 분석의 결과물 중 '힙함'을 부각해 왜 힙하거나 힙하지 않은지 이야기 하고 마지막으로 '나만의 도시'라는 새로운 방향을 들여다 본다. 


 책은 검색어, 게시물, SNS 등의 콘텐츠 분석을 기반으로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이어간다. 기분이나 추측으로만 쓰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얻었고 덕분에 대전 옆 더 작은 도시에 사는 나의 경험과 생각을 자극하는 부분이 명확해졌다. 


 우선 충남의 소도시 출신이라는 지방도시 출신인 나를 돌아보게 됐다. 지방 출신인 걸 숨기거나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디나이얼 지방출신'이라는 개념은 생소하지만 처음 대도시에 살게 되었던 무렵 실제로 뭔가 지방보다는 대도시가 좋아보이고 서울은 더 우위에 있는 듯 느꼈던 경험을 되살려냈다. 지방 출신인 게 잘못은 아니지만 뭔가 덜 좋아보였던 경험이 이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강화되어서 지방에서 서울의 어느 지역, 어느 장소, 서울에 있는 어떤 카페나 식당 등을 모방하며 닮으려거나 따라가야 한다는 경향도 종종 체감한다.


 무엇을 해도, 어떤 것이 생겨도 서울에 비교 당하는 지방의 현실.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지금에 이르러 오히려 견고해져 있었다.


 대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지방 도시가 같은 처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서울이 아니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소도시에서 살아가기를 택한 나로서는 서울을 동경하고 서울로 지향하는 주류의 분위기와 다른 비주류의 '나만의 도시'를 찾는 사람들의 챕터가 가장 흥미로웠다. 


 오래 전부터 도시는 생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예전과 지금은 그 생각의 결이 달라졌다. 예전의 생물이 다양한 모습을 지닌, 다름과 새로움이라는 관점이 컸다면 지금은 태어나서 기쁘고 죽어감에 슬퍼하는 도시의 감정 관점에서 생물 같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노잼도시로 남아서는 안 된다거나 다른 도시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거나 살고 싶은 도시로 변모해야 한다거나 하는 슬로건에는 사는 사람이 없어지면, 재미가 없어지면, 매력을 잃어버리면 지도상에서 사라져 역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될 거라는 불안이 읽힌다. 불안을 넘어 초조해 하고 두려워 하는 '감정'을 체감하게 되는 거다. 


 어떤 도시가 살아남을까.

노잼도시 이야기는 이런 질문으로 이어졌다.


 소도시에 살기로 하고 살아오며 더 확신하게 되는 게 있다. '나의 경험', '나의 기쁨'이 도시의 곳곳에서 살아있을 때 그 도시에 마음이 끌리고 더 살고 싶다고 느끼게 된다는 거다. 큰 쇼핑몰이 없다거나 백화점이 들어설 가능성이 없다거나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부재 같은 건 부수적 차원의 문제다. 내게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면 즐거운 사람들이 도시의 물리적 요소보다 중요했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떠날 때가 가장 소도시를 떠나고 싶어지는 때일 거라 생각한다. 


 내 관점에서 '재미'는 소비의 요소다. 그리고 지방 정부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도시를 소비하러 오도록 꾸미고 홍보한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그 도시에 살고 싶어지게 했던 매력이 사라지기도 한다. 대도시와 닮은, 어느 지방 도시에도 비슷한 게 있을 것만 같은 아류가 주류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 지방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도시가 재미없어진다고 느낀다. 이야기가 사라진 탓이다. 무난하고 평범하게 새로운 도시는 재미있는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오늘은 몰라도 내일은 아닐 것이다.


 질문을 떠올리게 하고 질문의 대답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매력과 재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한다는 지점에서 이 책은 적당하다. 재미 없어서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은 시도해 볼 만 하다. 무엇보다 어디에 살고 있든 도시의 일부가 아닌 도시가 내 삶의 일부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읽어 볼 만 하다. 서울 역시 세계로 시야를 넓혀 보면 지구의 어느 지방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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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지음, 안진희 옮김 / 위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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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나'였던 날이 있다.

어디 가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고,

'나'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먹이고 나를 키우고 나를 살찌우며 나 스스로 생각하며 나로 호흡하면서도 그 모호한 정체를 밝히지 못한.


세상 속 사람들을 오래 살피고 관찰해봐도 그 안에 나는 없었다. 

때때로 닮은 사람을 보거나 만난 날은 있다. 

 '어쩌면'.

불행한 과거, 잘된 미래, 다행스러운 오늘의 '나'가 아닐까 싶은 추측을 늘어놓게 되는.

결론은 항상 '저건 내가 아니다'였다. 

닮은 줄 알았던 건 언제나 섣부른 기분의 문제.

자꾸만 속으로 침잠하면서 '나'를 찾고, '나'와 마주할 방법은 멀어지는 듯했다.


이제는 습관이 가져온 우연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읽던 책에서 어린 나, 조금 더 자란 나, 어쩌면 내일의 '나'일 것만 같은 이야기와 만난.


 오늘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보다 옛날이라고 뭉뚱그리는 과거 사람들 이야기에서 더 많은 '나'를 찾았다.

평론가나 교수, 전문가가 쓴 글보다 어느 이름 없는 독자가 쓰다만 감상이 더 마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렇게 오늘에서 먼 과거에서, 유명보다 무명에서 '나'를 만나는 길을 찾아다니다 닿은 자리가 지금 여기인 셈이다.


 여전히 이름난 누군가가 남긴 추천사 보다 작은 책방을 지키는 이의 한 마디가 더 강하게 책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 서울 지하철 6호선 마포구청 역 근처의 작은 책방 '그렇게 책이 된다'에서 만난 책들처럼.


 오늘은 그중 하나,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우선순위 문제겠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경제적 안정이 심리적 안정에 우선하는 듯 보인다. 

물론 경제적 안정은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둘 사이에 명확한 선후관계, 특히 경제적 안정이 우선될 때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 주위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들은 흔히 나약하다고 여겨졌다. 나약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믿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기 자신도 타인도 쓸모없다고 믿어버리기 쉬웠다. 

 강하고, 당당하고, 뚜렷한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 

섬세함이나 신중함, 모호함은 때때로, 어느 영역에서만 '재능'으로 인정받거나 '쓸모'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쌓은 시간의 결과가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이다.

'불안'으로 함축되는 아픈 세계.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를 읽으며 '심리치료'를 생각했다.

나는 심리치료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우리 사회는 또 어떤지 궁금해졌다.

내게는 심리치료라는 말보다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상담'이 더 익숙하다.

섣부른 결론이겠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이나 심리 역시 의학이라는 전문 영역에서 전문가가 환자를 '치료해 주는' 진단과 처방 개념에 치우쳐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더 강해진 건 저자의 생각, 이야기에서 여러 번, 거듭, 반복해서 언급되는 말이 이런 맥락이기 때문이다.

우리 심리치료사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내담자보다 우월해서 치료사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님을 자신에게나, 자신에게 조언을 듣는 사람에게나 거듭 일깨우고 있는 거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는 심리치료사인 메리 파이퍼가 심리치료사 과정을 준비하는 대학원생 로라에게 쓴 편지 형식의 글을 묶은 책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전하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를 다양한 사례와 인간 심리를 꿰뚫는 작가들의 문장을 통해 전한다. 


 주목할 부분은 자신을 치료자라거나 전문가라며 권위를 세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실수할 수 있는 여지와 불완전한 판단의 위험, 내담자와의 공감과 소통에 무게를 두고 있는 거다. 

 또한 저자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네럴리스트를 자청하고 더 많은 내담자를 상대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기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쓰라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심리치료사가 마법사가 아니며 내담자 자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이제 막 심리치료사의 길에 들어서는 이에게 염려와 자부심, 사랑을 담은 편지는 한 해, 네 계절을 돌아 끝을 맺는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를 읽으며 만난 나는 과거의 나이기도 하고, 지금 혹은 내일의 나일 수도 있는 '나'다.

우울함을 호소하는 이에게 가장 자주 권하는 방법인 '적당한 운동'이나, 글쓰기에서 실제로 큰 도움을 받은 경험도 되살아났다. 


'자기'와 '나', '우리'를 둘러싼 일상에 고민하는 이라면 누구든 읽어봐도 좋겠다.

 

책을 만나는 과정, 책과 만난 장소, 책을 선택한 이유가 중요하지 않던 때가 있다.

거의 모든 책과의 만남이 취향과 경험이라는 관성의 레일 위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관성은 편안하고 안전한 선택을 보장할 수 있지만 의도치 않게 의외의 '나'와 만나는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의외의 선택을 하기엔 지나치게 신중한 편이라 그럴 수도 없다.

그렇기에 책방을 지키는 책방지기의 선택과 추천이 큰 의미가 될 수 있다.


자기 안에서 '나'를 찾기는 몹시 힘이 든다.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책은 '나'와 만나는 방법 중에 가장 수월하고 믿을만한 수단이다. 

자신에게 태만하지 않는 한 노력에 배신당하는 경우도 적다. 


시시때때로 손에 닿는 책을 펼치길,

손에 닿지 않은 책도 발길 닿는 곳에서 집어 들길.

이야기 안에서 종종, 때로, 반드시 만날 '나'와 이야기 나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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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세상 을유세계문학전집 96
레이날도 아레나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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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세르반도의 용설란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 '방법 중 하나'라는 걸 먼저 밝히기로 한다.

어떤 책, 어떤 이야기들에는 특별한 접근 방식이 요구되기도 하니까.

 일단 달려들어 시작하는 걸 말릴 필요 없고, 자기에게 더 알맞은 과정을 거쳐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의 방법을 참고하는 일마저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으니 덧붙이자면 '나는 지금 겁을 주고 있는 거다'.

스페인 어를 모르니 제목 <현란한 세상>이 얼마나 적확하게 뉘앙스와 의미를 반영한 건지 판단할 수 없지만 '현란하다'는 건 '난무하다'와도 통한다. '난무'는 어지러운 모양을 의미하고 어느 한 지점, 시간, 주제로 수렴하지 않는 듯 보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림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실점이 명확해서 시선의 방향이 분명한 경우와 달리 시선이 작품 사방으로 분산되는데 각각으로 분산된 시점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끊김 없이 나름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만한 경우다. 

  이 감상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디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때. 

현란한 혼란 속에 길을 잃었을 때에 도움이 될지 모를 방법 하나를 남기려는 의도임을 밝혀둔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은 화자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끌며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레이날도 아레나스가 <현란한 세상>을 시작하며 던진 단서는 '용설란'이다. 정확히는 1980년 7월 13일로 날짜가 명시된 작가의 말에 나오는 단서다. 아마 그전까지 작가가 숨겨둔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사람이 없었거나 자기 작품을 둘러싼 억측에 가까운 문학 평론가들을 비웃어주기 위해 적은 게 아닐까 싶다.


 여기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언급한 건 <현란한 세상>의 주인공 세르반도 수사를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기억 혹은 순간으로 이끌어 가는 장면 속에 등장하며 세르반도 수사의 운명을 빗대거나 암시하기 때문이다. 

 용설란이 뭔지 모르는(나처럼) 사람을 위해 덧붙이자면 용의 혀를 닮았다 해서 용설이라 이름 붙인 난이다. 10년 이상 꽃이 피지 않아 1세기 만에 꽃이 핀다고 과장되어 회자되고 있다고(실제로 어느 뉴스 방송을 보니 '100년 만에 핀 꽃'하는 식으로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용설란의 꽃은 용설란의 죽음 혹은 사멸을 의미한다. 꽃을 피운 용설란이 죽기 때문이다. 


 도다 세이지는 <이 삶을 다시 한번> 속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얘기한다. 

꽃을 피우지 않는 방법은 적당한 환경을 갖추고 알맞은 영양과 물을 공급하는 거다. 반대로 생각하면 적당히 가혹한 환경을 만들어주면 꽃을 피울 거라는 거다. 


 용설란과 꽃을 피우는 방법을 조합하면 <현란한 세상>에서 들려줄 세르반도 수사의 삶의 굴곡을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 1단계가 갖춰지게 된다. 한 번은 꽃을 피우고, 그 과정이란 어쩌면 몹시 가혹할 수 있으며, 두 번은 없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누구의 삶을 들여다보든 다르지 않을 텐데 마음의 준비 2단계는 인내심을 갖는 거다.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며 듣는 노력이 요구된다.

마지막 3단계는 다시 돌아가 보는 수고까지 감수할 수 있다고 마음먹을 필요를 인정하는 거다. 종종 어떤 이야기들은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끝나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 몇 페이지에서 몇십 페이지까지 다시 읽을 때 조금 더 이해가 깊어지기도 한다. 

 <현란한 세상>도 그랬다.


여기까지가 내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을 읽은 방법이다. 

떠올리고, 예감하며, 마지막까지 동행하다 나 홀로, 스스로의 의지로 처음으로 돌아가 본 거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맥락이 있었다.


 <현란한 세상>은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 수사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실존 인물일 수도 있는 이 인물이 남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니 실존하지 않았을 듯하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세르반도 수사는 유아기에 일어난 사건들에서 도망치듯 집 안에 박혀 있다 종소리를 따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떠나 여행을 하다 어떤 신부와 만나게 되고 신부와 함께 어떤 도시에 이른다. 도착한 도시에서 어떤 부인이 화형에 처하는 모습을 보고 방황하듯 헤매다 수도원에 닿게 되는데 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타락 그 자체다. 음란하고 천박하며 구역질 나는 짓을 태연하게 벌이고 있던 거다. 이 타락에 함께 하기를 거절한 죄로 감옥에 갇히는데, 이 거절 혹은 반항 또는 투쟁과 감옥, 탈출이 이야기에서 다양한 이유, 모습, 결과로 반복되고 되풀이된다.

 이러한 타락한 유혹을 이겨내며 자신의 신앙을 좇던 세르반도 수사는 운명적으로 과달루페 성모에 관한 계시를 받아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 설교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평생 쫓기게 된다. 거기에 덧붙여 세르반도 수사는 왕족과 권력자들 앞에 굴복하거나 하는 일 없이 신념으로 맞서게 되는데 그들이 노여워하는 게 당연하고 세상 어디에나 권력자 혹은 왕족이 없는 곳이 없었기에 어디로 도망치든 핍박받으며 쫓기지 않는 날은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소설은 내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거나 뒤집기도 하고, 상상 속에서나 벌어질 일들을 태연히 현실로 그려내기도 하면서 수십 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유난히 복잡해지는 이유는 이 의식의 흐름 속에 사회와 세태, 세계에 대한 비관과 비판, 풍자와 폭로가 섞여 들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다양한 메시지, 단어와 문장에 숨겨둔 암시와 묘사들을 다 이해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반면, 어떤 장면이나 부분을 잘라내어 풀어볼 때 의미가 분명 해지는 부류의 소설이 되는 거다. 


 줄거리는 한 줄로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집을 떠난 세르반도 수사가 평생 동안 겪은 핍박과 수난으로 굴곡진 삶과 혁명 완성을 위해 싸워온 이야기'.


간단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

평생은 하루나 이틀, 한 해나 두 해가 아니고 핍박과 수단은 한두 번이 아닌 데다 이유도 가해자도 다르며 어떤 혁명을 위해 언제, 무엇과 누구를 위해 싸웠는지를 한 두 문장으로 풀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익히 배웠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동시에 권력자의 과거와 현재다. 권력에 맞섰던 한 개인의 투쟁을 온전히,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권력자는 없을 것이므로 문제가 더 어려워지는 거다. 투쟁한 사람 본인이 남긴 회고록이라면 더더욱 불분명한 부분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제목 그대로 '현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던 거다.


 내가 할 수 있던 건 마지막까지 수사의 이야기를 견디고 따라간 것과 한 번 더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다시 들어본 것 정도다. 덧붙여 몇몇 문장에서 단어를 건져 올려 연결해보는 시도 정도일까?


그 시도를 조금 보여주는 걸로 감상을 끝내야겠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감상까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버리고 마는 기분이라서 말이다. 일단 감상은 여기서 끝이 난다.


 참고로 <현란한 세상>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 혹은 역사의 비극 중 몇 가지를 적어보면 이런 거다.

'아메리카와 흑인 노예'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

'타락한 가톨릭 수도사들(ex 소돔)'

'혁명의 탈을 쓴 권력의 찬탈'

'멕시코 독립'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등등.


연결해본 건 이런 부분을 이런 식으로다.


영원한 것 - 현실 
영원한 것은 서열이 있거나 명백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중략) 현실을 하나의 각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각도에서 본다. 그런 상황고 각도에서 사실주의의 피해자들을 도외시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현실이겠는가? 
15페이지
패스(pass) - 악행 
모든 수련 수사들이 옷을 벗은 채너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갔을 때 무언가 네 안에서 '패스(pass)'했고 수많은 빛으로 부서졌지.(중략) 악행은 즐기기를 원하는 그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얽매이는 예속성과 영원한 의존성에 있다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47페이지
권력 - 죄인
권력을 가진 자와 죄인은 성서의 언어로 볼 때 동의어다. 
70페이지
연료 - 흑인
"연료 = 기관사가 외친다 - 연료가 없으면 도착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스물아홉 칸의 객차 한 칸이 텅텅 빈다. (중략) 그래서 흑인들을 사용하죠, 그들은 풍부하니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석탄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죠. 
279페이지
사기 - 완성
그를 다시 미치게 만드는 소란한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그의 전 생애 동안 사기를 당했다고 느꼈다. (중략) 모든 문명(모든 혁명, 모든 투쟁, 모든 목적)의 목적은 별자리의 완성, 변함없는 조화에 도달하는 것이다. 
355페이지


감상을 마친 지금에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며칠, 몇 주를 미루고 다시 미뤘다. 무슨 투쟁, 무슨 혁명, 무슨 고난을 위해 읽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자꾸 물었다. 로맹 가리의 소설 감상을 쓰면서 '문학 해석이 시대 해석'이라 적었었다. 이 소설, <현란한 세상>을 해석해낼 현실의 단면, 단서들이 필요했달까. 

 서사에 몰두했을 때 단면은 보이지 않았고 자꾸만 단서들을 놓쳤다. 그도 그럴 게 이 소설 속 시간은 묘하게 길면서 복잡한 데다 앞으로나 뒤로나 한쪽으로 흐르고 있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이야기를 했다가 수십 년 전 이야기로 건너뛰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전히 살아있거나 죽어가거나 죽어있는 거다. 

 서술의 주어도 자꾸만 달라진다. '나'였다가 '너'였다가 '그'가 되기도 한다.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야기의 주체조차 분명하지 않은 셈이다. 


 시간이 뒤섞이고, 화자는 불분명하며, 분명 멕시코와 스페인,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와 미국이라는 실존하는 나라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어떤 역사의 단면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도 않는 이야기. 주인공 세르반도 수사의 주적, 주된 핍박자로 등장하는 레온이니 누구니 하는 사람도 실제 존재했던 누군가를 빗대고 있는 듯하다는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을 뿐 부족한 역사 지식으로 단서조차 붙들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읽기 어려운 게 당연했던 게 아닐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는데 <뻬드로 빠라모>,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가장 비슷하겠고, 훨씬 수월하고 재밌게 읽은 경우로는 나보코프의 <절망>이나 빅토르 팔 레빈 <P세대>와 닮았으며, 어렵기로는 모옌 <열 세 걸음>도 만만치 않았던.


 재밌으면서 신기한 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 리스트에 올리고 싶은 소설이라는 거다. 단순히 난해해서, 이해하기 어려워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기보다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조금 더 다른 걸 보고, 생각하며, 더 많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 듯하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실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문학을 해석하고 그에 비추어 시대를 해석하는 데 능숙하기는 어렵지만 스스로의 지금을 들여다보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느낀다. 나는 조금 더 문학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긴장을 풀고, 해석이나 이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될 때, 조금 더 나은 감상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현란한 세상을 읽는 동안 마음은 무거웠고 머리는 복잡했으며 눈은 어지러웠지만 그 또한 좋았다.

물론,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만 나에게는 권력이 없으므로 그 죄가 무겁지 않을 것임에 안도할 수 있었음을 포함하여.

우리는 종려나무 숲에서 온다. 우리는 종려나무 숲에서 오지 않는다. 나와 두 명의 쌍둥이는 종려나무 숲에서 온다. 나 혼자 종려나무 숲에서 오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 내 생각인데 이 소설의 첫문장은 여기서 시작된다고 본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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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물방울 2019-04-1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개 반을 주고 싶었다.
이 소설에 대담하게 별 다섯개를 쏟아준 분들에 감탄한다.
나는 뭐, 그렇다. 그만큼 즐기려면 아직 좀 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