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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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12월 4일 새벽, 책 한 권을 주문했다.

그날의 이름과 같은 책, 『계엄』이다. 주문하던 새벽에는 금세 읽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눠봐야지 했건만 3주도 더 지난 오늘에야 짧은 감상을 시작한다.


3주나 미뤄진 데에는 밖으로는 계엄 후의 풍경이 착찹해서고 안으로는 상상하던 내용과 조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비상계엄이 빠르게 해제 의결되고 실제로 해제 선언을 하면서 이후에는 당연히 진실한 사과와 온당한 처벌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듯 우리는 힘겨루기 중이다. 누가 이겨도 불행한 나날.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계엄』은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한 일본인이 우연히 1979년 서울로 일본어를 가르치러 오는 데서 시작된다. 1979년과 제목 『계엄』은 다만 그 정도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 뿐, 사실 이 책은 계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계엄의 엄중함이나 비극보다 오히려 1979년 당시의 국내 정세와 서울의 모습 등이 또렷이 담겨 있다. 지금의 서울은 5년 전과 또 달라져있겠지만 소설 속 1979년의 서울은 상상보다 더 초라했다. 막 지어진 고층 아파트에서 보이는 게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가 아니라 논과 밭이라면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할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 그만큼 서울의 변화, 우리의 발전 속도는 빨랐고 그 간극 역시 클 수밖에 없다.


『계엄』을 읽으며 발견한 건 의외의 단서다. 지금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 무효' 시위에 나서는 어른들과 어떻게든 대통령과 당의 안위를 챙겨보려는 정부와 여당이 왜 그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간신히 넘어왔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목격하고도 '설마 대통령이 그랬겠느냐'거나 '그래도 대통령을 몰아내서야 되겠냐'하는 10% 남짓의 지지자들의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 『계엄』이 전두환 신군부 비상계엄의 엄중함이나 이후의 비극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서술하게 된 건 주인공이 일본인이고, 대한민국에 오래 머물거나 사회의 혼란에 밀접하게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엄 이후의 상황, 광주의 비극, 한국의 발전 소식을 거의 일본에서 해외 소식으로 듣는 간접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남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과 소식이 자신에게 어떤 신체적이거나 경제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거나 건너 아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기에 가끔 걱정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그건 자신이 좋은 사람,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안타까워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기에 함께 할 이유도, 같이 싸워 얻을 무언가도 없는 완벽한 타인. 계엄이 경계하는 건 그들이 아니기에 어쩌면 돌이킬 수 없었을 사건들을 두고 "그래도 그 걸 다 이겨내서 다행이네"라거나 "어쨌든 잘 됐으니 더 다투지 말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들이 삐딱하게 읽혔다면 옳게 읽은 것이다.


잃거나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어쩌면 전혀 무관한 사람들 혹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난 12월 3일의 계엄을 무감각하게 옹호하는 것이다. 반대로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들, 정말 밀접히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12월 3일의 계엄을 전력으로 두둔할 수밖에 없다. 무감각과 전력이 뭉쳐 80%의 국민과 싸우는 모양이 오늘의 대한민국 풍경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월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63년에는 민정을 회복시키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2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과 함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0월 유신'을 내세워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새마을 운동'을 주창하며 농촌 근대화를 추진하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고도성장을 이뤘다. 1974년 북한에서 보낸 재일 한국인이 쏜 흉탄에 육영수 여사를 잃었지만 평생을 걸쳐 청렴결백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17년 동안 한국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무리 아쉬워해도 충분하지 않았다.『계엄』

"대통령이 친일이라는 뜻인가?" "아닙니다. 대통령은 친일이 아닙니다. 선생님, 아시겠어요? 우리나라에 친일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한국에는 단지 한국만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대통령은 일본의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일본 정치인들과도 친하고 지냈고 일본어도 자유롭게 구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계엄』

누군가에게는 일본인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들이 서술하는 역사가 자신의 체험이자 자기의 역사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자기 이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추구한 적 없는 사람으로 박정희를 기억하듯 윤석열과 그 일당도 그렇게 믿는 것이다.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는' 믿음. 그리고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두환 때랑은 다르다"라는 말에 설득력을 더한다.

"아, 그렇게 믿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나오는 것도 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해의 갈래가 생겨나는 것이다.

시중에는 대통령이 총살당하던 날 밤 산토리 위스키를 마셨다는 것과 옆에 인기 절정인 가수가 있었다는 비속한 소문이 돌았다.

『계엄』

10. 26 당일 밤, 박정희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는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더 적지만 그때는 '비속한 소문'으로 치부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이므로. 자신들이 젊음과 피, 땀을 바쳐 이뤄낸 기적의 선봉에 선 사람을 흠집 낸다면 자기가 흠집이 나는 것만 같았을 것이므로. 그의 부정과 비행, 혹은 악의는 부인해야 하는 것이고 오히려 순교자처럼 숭고하게 만드는 편이 자신들의 젊음과 온당한 마음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라면 친일파, 독재자의 이름을 붙여두어야 할 자리에 다른 이름을 붙여두고 '그래야만 한다'라고 선언한 후 바꾸지 않는 것이다. 그랬고 그래왔던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것.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이 나아지느냐.


책임과 재발방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며 인심 후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까지 양보하는데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하며 윽박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윤석열, 정부, 여당, 그의 10% 남짓한 지지자의 생각인 것이다.


『계엄』을 읽은 가장 큰 효용이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라는 게 서글프다. 남일처럼 생각해도 되는 외국인의 시각이나 다를 바 없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저 위에 앉아있던 것이다. 역사나 국민보다 자기와 내 편들 이 중요한 이기심과 독재, 기이한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가짜 무속인들이 판치는 오늘.


우리가 계엄해야 하는 건, 엄중히 경계해야 하는 건 그런 가짜들, 가짜와 거짓을 자신과 한 몸이라 믿는 사람들, 애매모호한 연민, 그래서 너는 잘한 게 뭐냐는 갈라 치기, 이 기회를 틈타 자기 변신을 꿈꾸는 음모론자들이다.


경계하라.

이건 우리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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