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은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한 일본인이 우연히 1979년 서울로 일본어를 가르치러 오는 데서 시작된다. 1979년과 제목 『계엄』은 다만 그 정도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 뿐, 사실 이 책은 계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계엄의 엄중함이나 비극보다 오히려 1979년 당시의 국내 정세와 서울의 모습 등이 또렷이 담겨 있다. 지금의 서울은 5년 전과 또 달라져있겠지만 소설 속 1979년의 서울은 상상보다 더 초라했다. 막 지어진 고층 아파트에서 보이는 게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가 아니라 논과 밭이라면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할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 그만큼 서울의 변화, 우리의 발전 속도는 빨랐고 그 간극 역시 클 수밖에 없다.
『계엄』을 읽으며 발견한 건 의외의 단서다. 지금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 무효' 시위에 나서는 어른들과 어떻게든 대통령과 당의 안위를 챙겨보려는 정부와 여당이 왜 그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간신히 넘어왔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목격하고도 '설마 대통령이 그랬겠느냐'거나 '그래도 대통령을 몰아내서야 되겠냐'하는 10% 남짓의 지지자들의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 『계엄』이 전두환 신군부 비상계엄의 엄중함이나 이후의 비극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서술하게 된 건 주인공이 일본인이고, 대한민국에 오래 머물거나 사회의 혼란에 밀접하게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엄 이후의 상황, 광주의 비극, 한국의 발전 소식을 거의 일본에서 해외 소식으로 듣는 간접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남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과 소식이 자신에게 어떤 신체적이거나 경제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거나 건너 아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기에 가끔 걱정하는 마음이 들겠지만 그건 자신이 좋은 사람,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안타까워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기에 함께 할 이유도, 같이 싸워 얻을 무언가도 없는 완벽한 타인. 계엄이 경계하는 건 그들이 아니기에 어쩌면 돌이킬 수 없었을 사건들을 두고 "그래도 그 걸 다 이겨내서 다행이네"라거나 "어쨌든 잘 됐으니 더 다투지 말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들이 삐딱하게 읽혔다면 옳게 읽은 것이다.
잃거나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어쩌면 전혀 무관한 사람들 혹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난 12월 3일의 계엄을 무감각하게 옹호하는 것이다. 반대로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들, 정말 밀접히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 역시 12월 3일의 계엄을 전력으로 두둔할 수밖에 없다. 무감각과 전력이 뭉쳐 80%의 국민과 싸우는 모양이 오늘의 대한민국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