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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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기다리던 어느 날에 반가운 책 한 권이 도착했다. 투명한 비닐에 싸여 온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갱부>였고, 그건 지난 몇 개월의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런데 '갱부'라니 지금 떠올린 그 갱부가 맞는걸까?

 

 


'갱부'라는 단어는 참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광산, 석탄, 금, 은, 철광석 등의 광물, 칠레의 광부 33인, 다이아몬드와 아프리카, 지하, 어둠, 갱도, 아오지 탄광, 왜 '광부'가 아니라 '갱부'일까?에 대한 의문, 강원랜드, 일직선으로 뚫고 나가면 지구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어린 시절의 철없던 생각 그리고 '죽음'.

 

모든 광산이 지표면보다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광산의 갱도는 뭔가 지하로 이어져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류가 죽은 이를 묻기 시작한 이래 땅 아래로 들어가는 것,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그와 유사한 행위는 많은 경우 죽음과 연결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 <갱부> 역시 한 젊은이가 죽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선 이야기로 시작된다. 

 



​ 소세키의 많은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갱부>의 주인공 역시 어딘가 천연스럽다. 

 

그러니까, 꾸밈 없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어딘가 시치미를 뚝떼고 모른척 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애석한 건 이 천연함을 이용하는 자가 늘 함께 등장한다는 거다. 

 

 간략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어쩔 수 없어' 길을 나서 죽을 자리를 찾아 북으로 걷던 '나'는 어떤 찻집을 지나다 '조조'라는 남자와 만난다. 이 조조라는 사람의 직업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살하기 위해' 혹은 '조용한 곳을 찾아' 길을 서두르는 나를 향해 거리낌 없이, 말을 걸 기척도 없이 이렇게 물어온다. 

"임자, 일할 생각 없나?"

 방금 전까지 죽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던 사람의 속내도 모르고 일할 생각 없냐고 묻다니 정말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게 우습게도 통한다. 

 '나'는 "일해도 됩니다만." 하고 대답한다.

 소세키가 종종 작품에서 되뇌는 것처럼, '나'라는 놈은 제법 '건방진 놈'이다. 

죽을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읽어나가던 내게는 나를 놀리는 소리처럼 들리는 거였다. 이런 놈은 골탕을 좀 먹어야 한다는 괜한 앙심을 품게 된 순간이었다.

 조조 씨는 자기가 "갱부로 만들어주겠다"고, "갱부가 되면 큰 돈을 번다"며 어디론가 데리고 가기 시작한다. 

기차를 타고 무진장 걸어 산으로 산으로 올라간다. 그러다 '빨간 담요'와 '나'보다 더 건방지지만 몸이 날랜 '꼬맹이'도 합류해 함께 산을 오른다. 

 겨우겨우 산을 다 올라 '함바'의 담당자 앞에까지 갔지만 '나'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고 조조 씨가 말했던 것처럼 갱부가 되는 일은 쉽고 간단하지가 않다. 거기다 '나'를 갱부로 만들어주겠다며 산꼭데기까지 끌고 온 조조 씨는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휭하니 가버린다. 

 쌤통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산에도 왔고 함바에도 들어왔으니 기어코 갱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다음부터는 직접 읽어보기를. 클클클.

 


 

23쪽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경우가 되면 우리는 죽음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위로가 된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다만 목표로 하는 죽음은 반드시 멀리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가까우면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운명이다.」

 

흔히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두려움과 절망을 가져오는 불길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정리된다는 의미에서 안도하게 하고 안심하게 만드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위로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소세키가 말하는 것처럼 그날은 어디까지나 지금 혹은 가까운 날이 아닌 멀리 있는 날, 너무 멀리 아득한 곳에 있어서 실감할 수 없는 날이어야만 한다.

 

 가까운 존재건 먼 사람이건 사람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일깨우고, 필멸자라는 우리 삶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 '느닷 없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에 대해 한참이나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결국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나 100세를 넘긴 노인에게나 모든 죽음은 분명 느닷 없는 것일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시한부 인생의 죽음은 느닷 없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3개월 시한부였던 사람이 2개월만 살고 죽는다면 그 죽음은 느닷없는 죽음이 되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에게는 '예정 된' 죽음이었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분명 '느닷 없이 찾아든' 죽음이었을 거란 말이다.

 

 타인의 죽음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내게 그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은 반드시 내게도 찾아온다. 결국 죽음은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죽음' 혹은 '고립'을 찾아 집을 떠난 젊은이가 '삶'을 발견하게 되는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거다 저거다 하고 결론을 내린다기 보다 하나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아쉬운 건 읽을 때는 더 다양한 관점에서 읽었건만 감상문을 적자니 하나를 적기도 힘들어져 버렸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 삶과 죽음의 이면에 대해 쓰게 된 게 내내 죽음 이야기나 하게 된 까닭이다.

 

 조조 씨의 목적이야 어떻든 그 우연한 만남은 또다른 만남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저 '빨간담요'를 두르고 있을 뿐인 촌놈에게, 붙임성 없는 떠돌이 꼬맹이에게 '나'는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갱부가 되기 위해 안내받아 들어간 갱도의 어둠과 수직으로 뚫린 잔도의 끝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과 절망, 포기라는 유혹과 이를 악물게 하는 오기 그리고 그 끝에서 밟은 땅이 주는 안도, 죽음을 의미하는 '잔보'로 구경거리를 삼고 곧 '잔보'가 될 병 깊은 환자를 거리낌 없이 놀리는 갱부들을 대하면서는 삶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 특유의 오기가 생긴다. 

 

 무식과 야만의 상징 같은 갱부들 속에서 '지성'을 갖고 있는 존재 야스 씨와의 만남은 '나'에게는 정말 의외의 사건이었다. 살아있지만 전락하여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존재들 속에서 나가라고 야스 씨는 자꾸만 권한다. 

 전락했지만 여전히 살고 있는 존재가 살아갈 존재에게 삶을 권하고 있는 셈인거다. 다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존재들은 '나'를 비웃고, 비꼬고, 놀리고, 골리며 무시한다. 죽음은 죽음으로 끌어내릴 뿐 결국 삶을 내버려두지 않는 거다.

 

 현암사의 소세키 전집 뒷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

현암사 판의 소세키를 읽기 전부터 우리 시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이 한 문장이 더 깊이 와닿았다.


 이 시대는 전락한 자들, 실패자들, 패배자들을 표본으로 삼아 가르치기를 "저런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대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죽음을 보여주면서 "죽기 싫으면 살라"고 하는 셈이다. 하지만 공포에 가까운 그 가르침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달았기에 이 세계가 이렇게 되어가는지 생각해봐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흑과 백, 성공과 실패 오직 두 가지 길만 있는 갱도로 밀어넣으며 그들을 '갱부'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 속 '나'는 결국 갱부가 되지는 못한다.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을 수 없는 것처럼(슈뢰딩거의 고양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갱부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갱부일 수는 없는 거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소화가 안 된 작품에 대해 적는 일은 참으로 불편하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이렇게도 쓸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과 "읽으면서는 이것도 생각했었는데"하는 생각으로 이것도 적고 싶고 저것도 넣고 싶지만 그럴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탄이다. 

 한 번 더 읽고 적는 감상은 조금 더 나아지기만 바랄 뿐이다.

 

 아쉬움을 대신해 몇 구절 발췌하는 것으로 두서 없는 글을 마친다.

 

24쪽

흔히 소설가가 이런 성격을 그린다느니 저런 성격을 창조한다느니 하며 득의양양해하고, 독자도 그 성격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아는 척을 한다.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을 쓰며 즐거워하거나 거짓말을 읽고 기뻐하는 일일 것이다. 사실상 성격 같은 것은 정리된 게 없다. 소설가 따위가 사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고, 설령 썼다고 해도 소설이 될 일은 없는 것이다. 묘하게도 진짜 인간은 정리하기 어려운 법이다.

 

170쪽

세상에는 경멸하면서도 무서워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 모순은 아니다.

 

258쪽

가장 옅은 생애 속에 옅은 기쁨이 있었다.

만약 그 상태가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면 나는 그 한 시간 동안 만족했을 것이다. 하루 동안 계속되었다면 하루 동안 만족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만약 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해도 역시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새로운 마음의 활발한 작용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그 상태가 내 희망대로 같은 곳에 머물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265쪽

사다리 중간에서 분하다, 에잇 죽어버리자, 라고 생각했을 때는 손을 놓는 것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물론 전철머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죽으려고 손을 떼려고 했을 때 다시 묘한 정신 작용을 깨달았다.

 

290쪽

야스 씨는 갱부로 일하고 있지만 뼛속까지 갱부는 아니다. 그래도 전락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 전락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고도 했다. 전락의 밑바닥에서 죽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전락한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살아서 일하고 있다. 살아서 깡깡 두드리고 있다. 살아서……자신을 구원하려 하고 있다. 야스 씨가 살아가는 이상 나도 죽어서는 안 된다. 죽는 것은 나약한 것이다.

 

 

- 이 글은 현암사에서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인상을 적은 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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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인문학은 ˝타인이 타인의 생각에 부여한 타인의 권위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생각을 되찾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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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 - 법정에서 바라 본 세계사의 극적인 순간들과 숨은 이야기
L. 레너드 케스터 외 지음 / 현암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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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공정하게 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악당은 없는 법이다_는 말은 영국 속담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악당들은 어떤 판결이 나오든 그 판결에 승복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일 것 같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피고로 재판에 임하든, 원고로 임하든, 힘이 있는 쪽은 거의 악당이기에 악당에 맞서 소송을 벌이는 이들이야말로 공정하게 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일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악당이 어떤 처벌을 받건, 피해자는 그 판결이 공정하고 정당하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법'은 힘 없는 사람들이 최후에 의지하는 생명줄 같은 것이지만 보통의 힘 없는 사람들은 법에 무지한 게 일반적이고, 가해자들은 힘이 있는데다 법까지 잘 알아서 처벌을 피해가는 일이 적지 않다.

단순히 처벌만 피해간다면 억울함이 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피해자가 거꾸로 가해자가 되어 처벌을 받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8조법, 고구려의 1책 12법, 조선의 경국대전과 현재의 헌법과 여러 법률들이 '필요한' 이유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법이 공정성을 잃어버렸을 때, 혹은 판단력을 상실했을 때 한때 울타리처럼 우리를 보호해주던 법은 반대로 우리를 가두고 구속하는 감옥이 되어 버린다.


이 책 <세계를 발칵 뒤집은 판결 31>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세계사에 남겨진 판결 가운데 특히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31가지 사례를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홀로코스트와 전범 재판, 미국에 혼란과 변화를 야기한 O. J. 심슨 사건과 수백 억 달러 규모의 사기에 대한 재판까지 그 유형도, 처벌도 다양하다.


31건의 사건 가운데 특히 관심이 갔던 건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의 배경이 된 '모스크바 재판'에 대한 것과 '잔 다르크 재판' 이었다. 

두 사건은 성격도 시대도 대상도 다르지만 권력자에 의해 '이용'되고 '조작'되어 희생되었다는 면에서 많은 부분 닮아 있었다.

조지 오웰 소설의 배경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흔히 해설에서 말하는 누가 누구를 형상화한 케릭터고 뭐고 하는 것도 알게 됐다.

잔 다르크 재판은 권력의 비겁함과 비열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로 한 때 자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 정치적, 종교적 걸림돌이 됐을 때 얼마나 신속하고 철저하게 잘라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세력에 대한 맹신과 편견이 지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더 큰 모순을 끌어들인다는 보편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정 사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책에 실린 31건의 판결들은 모두 법의 '해석'에 있어 얼마나 다양한 '여지'가 존재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재판부터 일본 전범 재판까지 그들을 죄를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얼마나 극명하게 다른 판결이 나올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법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명문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해석이 공정성을 잃어버린다면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많은 나라가 3권, 즉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의 분립을 법으로 명시하지만 사실 세 가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떨어지기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 나라 역시 3권의 분립을 명시해두었지만 많은 경우 '관행'처럼 유착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한다.

 때로는 혈연, 학연, 지연, 금전적 상호 연대 이유도 다양하다. 

 


 하소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을 쓴 사람과 출간한 사람들은 책의 출간에 어떤 의미를 담았을까?

굳이 역사는 세계의 재판소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데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 자체는 유한한 존재로 짧은 시간을 살아갈 뿐이지만 재판의 기록과 의미는 후대에 전해져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는 법이다.

 현재 책임을 피하고 처벌을 면했다 해도 그것이 영구적인 해결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의 전범재판에서 보인 소극적 처벌들은 냉전이라는 거대한 세계 구도에서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확보하고 키워야만 하는 그들의 사정이 있었다. 그로 인해 한국의 친일 세력 역시 청산을 면한 셈이 됐고, 역사를 바로잡을 기회를 잃고 크게 어긋나 지금에 이르렀다. 

 때로 어떤 판결들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재판은 그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궁극적으로 법은 심판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최초의 혼란을 다스릴 질서를 만듦으로써 자유와 권리,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법이 아닐까.

과거의 한 시대를 끝내거나 시작했고, 움직이게 하거나 멈췄던 31 건의 판결들을 보며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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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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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가서 조르바를 만났더라면 둘이 참 잘 맞았을 텐데. 도련님과 조르바 좋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탓에 도련님은 상당한 손해를 보며 자랐다예를 들면 2층에서 뛰어내리다 허리를 삔다거나 잘 드는 칼로 손가락을 잘라보려 한다거나 하는 식의 무모한 일을 벌였던 거다자라면서 반복해서 드러난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은 결국 부모님과의 사이도 멀어지게 했다하지만 그에게도 응원군이 있었으니 집안의 하녀 기요다기요는 도련님을 무척 소중하게 대했고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주었다아버지까지 돌아가신 후에 도련님은 오래 살았던 도시를 떠나(타의 반자의 반시골 학교로 부임해 간다그리고 그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쟁탈전에 휘말리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이나 한국에서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유사하다다만 옷과 쓰는 도구들이 달라져 더 그럴듯해 보일 뿐이다.기회가 닿으면 그것을 손에 넣어야 하고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어리석은 것이 되며삶 속 신조마저도 미련한 고집이 된다. <도련님>의 배경은 시골이다흔히 시골을 떠올리면 푸근한 인상과 따뜻한 마음씨가득한 정이 생각나는데 현실은 도시와 시골이 다를 것이 없다그래서 그런 동일함은 시골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배신감을 안겨 준다.

거기다 시골은 작다’. 작다는 건 그만큼 단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결속이 강하다는 건 외부와의 대결에서는 유리할지 몰라도 내부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롭지 못한 일이다. ‘도련님은 본래 혈기가 드세다잘 욱하고지기 싫어하며앞뒤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걸 저지른다달리 말하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도련님에게 작은’ 마을은 새장혹은 감옥 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소세키는 자신의 교사로서의 경험을 능숙하게 활용해 작품의 신뢰성을 높인다부임해 간 학교에서 즉석으로 별명을 붙이는 일도 재밌다.참 유쾌한 사람이다.

사실 도련님은 작고 사소한 것을 재미로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사건 자체는 작지 않지만 그 계기는 참 작고 작아 옹졸하게까지 보인다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는 분명 마돈나빨간 셔츠니 알랑쇠니 산미치광이니 하는 별명은 아무리 많이 등장해도 무게감이 없는 것 같다.

나쓰메 소세키를 읽고자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아마 가장 먼저 추천할 책이 바로 이 <도련님>일 것이다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주인공이지만 유유자적한 가운데 신경을 갉아먹는 작은 소란의 중심에 본의 아니게 놓이는 구조는 다른 작품과도 유사함을 보일 뿐 아니라 분량도 부담이 없고가벼워 오가며 들고 다니면서 읽어도 부담이 없다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도 좋을 정도다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통쾌해 보이지만 분명 비극이다.

이 작품이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100년도 더 전의 이야기이건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를 것이 없기에 비극인 거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1월이다능력 향상마음 다짐을 위한 힐링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도 좋지만조금 더 살아 있다는 생기와 활기를 느낄 수 있는 이런 작품들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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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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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풀베개>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품을 읽어보면 <구름>일 수도 있겠고, <기차>일 수도 있겠고, <아가씨>일 수도 있겠는데 왜 풀베개여야 했을까.

 

소세키의 이런 표현이 좋다.

「이런 결심까지 했을 때 날이 수상해졌다. 끄물끄물하던 하늘의 구름이 머리 위로 기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허물어져 사방이 그저  구름바다가 아닌가 하고 괴이하게 여기는 가운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채꽃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산과 산 사이를 가고 있는데, 빗발이 가늘어 거의 안개를 무색하게 할 정도여서 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구름이 단순히 비나 눈을 내리는 것이 아닌 '허물어진다'는 표현이 참으로 좋다.

작품 속 화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끝날즈음까지 무엇도 그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리지 않은 것일 수 있지만 좀처럼 그리지 못하는 거다.

 화가는 그리고자 하는 '어떤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하지만 머릿속의 장면과 일치하는 '발견'을 하지 못해 잠시 일을 미뤄두고 있는 거다. 그러던 차에 어떤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침 그가 묵고 있는 집에서 지난 밤 마주쳤던 여자와 동일 인물인 그 '아가씨'는 '미쳐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다. 적어도 화가에게 그 아가씨가 미쳤다는 생각은 미친 생각이었고 오해였다. 오히려 미쳐 있는 건 그 시대였고, 그 시대에 휩쓸린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마치 바람이 불어 풀이 눕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어떤 시인이 노래한 '풀'처럼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일어난다. 하지만 베어진 풀은 더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근본이 있고, 뿌리가 있는 존재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는 '태풍'과도 같은 시기였다. 많은 풀이 거센 태풍을 못 이기고 부러졌을테고, 더 많은 풀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여러 번 몸을 눕혔다 일으키기를 반복하며 살아남았을 것이다. 

 바람에 꺾여 부러진 쪽이나,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해 살아남은 쪽이나 밖에서 바라보면 모두 가련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은 '연민' 외에는 무엇도 아닌 셈이다.

 

 몇 작품 읽은 것은 없지만 이 작품은 유난히 이해하기 어렵게 다가왔다. 아마 문장의 형식이나 소재탓인 것 같은데, 가장 편안하게 읽기 위해서는 작품 속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 장면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장 자체를 이해하려고 하다가는 손을 번쩍들고 백기를 휘두르는 항복자처럼 고개를 흔들게 될 것 같으니 말이다.

 

작품 속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건 소세키의 동서양에 대한 편중된 인식이다. 소세키를 잘 모르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은 소세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110쪽 - 중국의 기구는 다 어설프다. 아무래도 바보 같고 굼뜬 인종이 발병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보고 있는 동안 멍해지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소매치기의 태도로 예술품을 만든다. 서양은 크고 섬세하며, 어디까지나 속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자국 일본을 소매치기에 비유하다니 그것도 단 한 줄로 말을 마치다니, 어지간히 엄한 태도다. 중국에 대한 혹평과 서양에 대한 태도가 대비되어 보인다.

 소세키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정정해주고 싶다. 

165쪽 - 먼 옛날 공물을 싣고 찾아온 고구려의 배가 멀리서 건너올 때 저렇게 보였을 것이다.

어디, 고구려가 '공물'을 싣고 갔을 일이 있겠나.

 

182쪽 - 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백명이나 되는 인간을 같은 상자에 집어넣고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인정사정없다. 집어넣어진 인간은 모두 같은 정도의 속력으로 동일한 정거장에 멈추고 그리하여 똑같이 증기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소세키가 그려놓은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화가의 인상이다. 현대를 아프게 꼬집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 큰 돈을 벌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기차'나 다름 없다. 더 고약한 점은 언제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기차'라는 것이다. 애써 외면하려 해봐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개성을 짓밟으려는 세상의 의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소세키를 왜 읽어야 하느냐고 한다면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들은 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다.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일본 사람도 아닌 우리는 왜 소세키를 읽어야 할까.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내일이나,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닌,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조금 더 꿈틀거려 보기로 하자. 아직 내 뿌리가 잘리지 않았으니, 이 바람이 지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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