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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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풀베개>였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작품을 읽어보면 <구름>일 수도 있겠고, <기차>일 수도 있겠고, <아가씨>일 수도 있겠는데 왜 풀베개여야 했을까.

 

소세키의 이런 표현이 좋다.

「이런 결심까지 했을 때 날이 수상해졌다. 끄물끄물하던 하늘의 구름이 머리 위로 기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허물어져 사방이 그저  구름바다가 아닌가 하고 괴이하게 여기는 가운데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채꽃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산과 산 사이를 가고 있는데, 빗발이 가늘어 거의 안개를 무색하게 할 정도여서 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구름이 단순히 비나 눈을 내리는 것이 아닌 '허물어진다'는 표현이 참으로 좋다.

작품 속 화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끝날즈음까지 무엇도 그리지 않는다. 어쩌면 그리지 않은 것일 수 있지만 좀처럼 그리지 못하는 거다.

 화가는 그리고자 하는 '어떤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하지만 머릿속의 장면과 일치하는 '발견'을 하지 못해 잠시 일을 미뤄두고 있는 거다. 그러던 차에 어떤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침 그가 묵고 있는 집에서 지난 밤 마주쳤던 여자와 동일 인물인 그 '아가씨'는 '미쳐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다. 적어도 화가에게 그 아가씨가 미쳤다는 생각은 미친 생각이었고 오해였다. 오히려 미쳐 있는 건 그 시대였고, 그 시대에 휩쓸린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마치 바람이 불어 풀이 눕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어떤 시인이 노래한 '풀'처럼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일어난다. 하지만 베어진 풀은 더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근본이 있고, 뿌리가 있는 존재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는 '태풍'과도 같은 시기였다. 많은 풀이 거센 태풍을 못 이기고 부러졌을테고, 더 많은 풀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여러 번 몸을 눕혔다 일으키기를 반복하며 살아남았을 것이다. 

 바람에 꺾여 부러진 쪽이나,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해 살아남은 쪽이나 밖에서 바라보면 모두 가련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은 '연민' 외에는 무엇도 아닌 셈이다.

 

 몇 작품 읽은 것은 없지만 이 작품은 유난히 이해하기 어렵게 다가왔다. 아마 문장의 형식이나 소재탓인 것 같은데, 가장 편안하게 읽기 위해서는 작품 속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 장면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장 자체를 이해하려고 하다가는 손을 번쩍들고 백기를 휘두르는 항복자처럼 고개를 흔들게 될 것 같으니 말이다.

 

작품 속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건 소세키의 동서양에 대한 편중된 인식이다. 소세키를 잘 모르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부분은 소세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110쪽 - 중국의 기구는 다 어설프다. 아무래도 바보 같고 굼뜬 인종이 발병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보고 있는 동안 멍해지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소매치기의 태도로 예술품을 만든다. 서양은 크고 섬세하며, 어디까지나 속된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자국 일본을 소매치기에 비유하다니 그것도 단 한 줄로 말을 마치다니, 어지간히 엄한 태도다. 중국에 대한 혹평과 서양에 대한 태도가 대비되어 보인다.

 소세키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정정해주고 싶다. 

165쪽 - 먼 옛날 공물을 싣고 찾아온 고구려의 배가 멀리서 건너올 때 저렇게 보였을 것이다.

어디, 고구려가 '공물'을 싣고 갔을 일이 있겠나.

 

182쪽 - 기차만큼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백명이나 되는 인간을 같은 상자에 집어넣고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인정사정없다. 집어넣어진 인간은 모두 같은 정도의 속력으로 동일한 정거장에 멈추고 그리하여 똑같이 증기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소세키가 그려놓은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화가의 인상이다. 현대를 아프게 꼬집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 큰 돈을 벌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기차'나 다름 없다. 더 고약한 점은 언제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기차'라는 것이다. 애써 외면하려 해봐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개성을 짓밟으려는 세상의 의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소세키를 왜 읽어야 하느냐고 한다면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들은 이런 식으로 말할 것 같다.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일본 사람도 아닌 우리는 왜 소세키를 읽어야 할까.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내일이나,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닌,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조금 더 꿈틀거려 보기로 하자. 아직 내 뿌리가 잘리지 않았으니, 이 바람이 지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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