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석을 기다리던 어느 날에 반가운 책 한 권이 도착했다. 투명한 비닐에 싸여 온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갱부>였고, 그건 지난 몇 개월의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런데 '갱부'라니 지금 떠올린 그 갱부가 맞는걸까?

 

 


'갱부'라는 단어는 참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광산, 석탄, 금, 은, 철광석 등의 광물, 칠레의 광부 33인, 다이아몬드와 아프리카, 지하, 어둠, 갱도, 아오지 탄광, 왜 '광부'가 아니라 '갱부'일까?에 대한 의문, 강원랜드, 일직선으로 뚫고 나가면 지구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어린 시절의 철없던 생각 그리고 '죽음'.

 

모든 광산이 지표면보다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광산의 갱도는 뭔가 지하로 이어져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류가 죽은 이를 묻기 시작한 이래 땅 아래로 들어가는 것,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그와 유사한 행위는 많은 경우 죽음과 연결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 <갱부> 역시 한 젊은이가 죽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선 이야기로 시작된다. 

 



​ 소세키의 많은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갱부>의 주인공 역시 어딘가 천연스럽다. 

 

그러니까, 꾸밈 없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어딘가 시치미를 뚝떼고 모른척 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애석한 건 이 천연함을 이용하는 자가 늘 함께 등장한다는 거다. 

 

 간략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어쩔 수 없어' 길을 나서 죽을 자리를 찾아 북으로 걷던 '나'는 어떤 찻집을 지나다 '조조'라는 남자와 만난다. 이 조조라는 사람의 직업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살하기 위해' 혹은 '조용한 곳을 찾아' 길을 서두르는 나를 향해 거리낌 없이, 말을 걸 기척도 없이 이렇게 물어온다. 

"임자, 일할 생각 없나?"

 방금 전까지 죽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던 사람의 속내도 모르고 일할 생각 없냐고 묻다니 정말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게 우습게도 통한다. 

 '나'는 "일해도 됩니다만." 하고 대답한다.

 소세키가 종종 작품에서 되뇌는 것처럼, '나'라는 놈은 제법 '건방진 놈'이다. 

죽을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읽어나가던 내게는 나를 놀리는 소리처럼 들리는 거였다. 이런 놈은 골탕을 좀 먹어야 한다는 괜한 앙심을 품게 된 순간이었다.

 조조 씨는 자기가 "갱부로 만들어주겠다"고, "갱부가 되면 큰 돈을 번다"며 어디론가 데리고 가기 시작한다. 

기차를 타고 무진장 걸어 산으로 산으로 올라간다. 그러다 '빨간 담요'와 '나'보다 더 건방지지만 몸이 날랜 '꼬맹이'도 합류해 함께 산을 오른다. 

 겨우겨우 산을 다 올라 '함바'의 담당자 앞에까지 갔지만 '나'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고 조조 씨가 말했던 것처럼 갱부가 되는 일은 쉽고 간단하지가 않다. 거기다 '나'를 갱부로 만들어주겠다며 산꼭데기까지 끌고 온 조조 씨는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휭하니 가버린다. 

 쌤통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산에도 왔고 함바에도 들어왔으니 기어코 갱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다음부터는 직접 읽어보기를. 클클클.

 


 

23쪽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경우가 되면 우리는 죽음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위로가 된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다만 목표로 하는 죽음은 반드시 멀리 있어야만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가까우면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죽음의 운명이다.」

 

흔히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두려움과 절망을 가져오는 불길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정리된다는 의미에서 안도하게 하고 안심하게 만드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이 가져다 주는 위로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소세키가 말하는 것처럼 그날은 어디까지나 지금 혹은 가까운 날이 아닌 멀리 있는 날, 너무 멀리 아득한 곳에 있어서 실감할 수 없는 날이어야만 한다.

 

 가까운 존재건 먼 사람이건 사람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일깨우고, 필멸자라는 우리 삶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 '느닷 없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에 대해 한참이나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결국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나 100세를 넘긴 노인에게나 모든 죽음은 분명 느닷 없는 것일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시한부 인생의 죽음은 느닷 없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3개월 시한부였던 사람이 2개월만 살고 죽는다면 그 죽음은 느닷없는 죽음이 되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에게는 '예정 된' 죽음이었을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분명 '느닷 없이 찾아든' 죽음이었을 거란 말이다.

 

 타인의 죽음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내게 그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은 반드시 내게도 찾아온다. 결국 죽음은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죽음' 혹은 '고립'을 찾아 집을 떠난 젊은이가 '삶'을 발견하게 되는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거다 저거다 하고 결론을 내린다기 보다 하나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아쉬운 건 읽을 때는 더 다양한 관점에서 읽었건만 감상문을 적자니 하나를 적기도 힘들어져 버렸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 삶과 죽음의 이면에 대해 쓰게 된 게 내내 죽음 이야기나 하게 된 까닭이다.

 

 조조 씨의 목적이야 어떻든 그 우연한 만남은 또다른 만남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저 '빨간담요'를 두르고 있을 뿐인 촌놈에게, 붙임성 없는 떠돌이 꼬맹이에게 '나'는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갱부가 되기 위해 안내받아 들어간 갱도의 어둠과 수직으로 뚫린 잔도의 끝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과 절망, 포기라는 유혹과 이를 악물게 하는 오기 그리고 그 끝에서 밟은 땅이 주는 안도, 죽음을 의미하는 '잔보'로 구경거리를 삼고 곧 '잔보'가 될 병 깊은 환자를 거리낌 없이 놀리는 갱부들을 대하면서는 삶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 특유의 오기가 생긴다. 

 

 무식과 야만의 상징 같은 갱부들 속에서 '지성'을 갖고 있는 존재 야스 씨와의 만남은 '나'에게는 정말 의외의 사건이었다. 살아있지만 전락하여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존재들 속에서 나가라고 야스 씨는 자꾸만 권한다. 

 전락했지만 여전히 살고 있는 존재가 살아갈 존재에게 삶을 권하고 있는 셈인거다. 다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존재들은 '나'를 비웃고, 비꼬고, 놀리고, 골리며 무시한다. 죽음은 죽음으로 끌어내릴 뿐 결국 삶을 내버려두지 않는 거다.

 

 현암사의 소세키 전집 뒷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

현암사 판의 소세키를 읽기 전부터 우리 시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이 한 문장이 더 깊이 와닿았다.


 이 시대는 전락한 자들, 실패자들, 패배자들을 표본으로 삼아 가르치기를 "저런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대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죽음을 보여주면서 "죽기 싫으면 살라"고 하는 셈이다. 하지만 공포에 가까운 그 가르침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깨달았기에 이 세계가 이렇게 되어가는지 생각해봐야만 하지 않을까 한다.

 흑과 백, 성공과 실패 오직 두 가지 길만 있는 갱도로 밀어넣으며 그들을 '갱부'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 아닐까.

이야기 속 '나'는 결국 갱부가 되지는 못한다.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을 수 없는 것처럼(슈뢰딩거의 고양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갱부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갱부일 수는 없는 거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소화가 안 된 작품에 대해 적는 일은 참으로 불편하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이렇게도 쓸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과 "읽으면서는 이것도 생각했었는데"하는 생각으로 이것도 적고 싶고 저것도 넣고 싶지만 그럴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탄이다. 

 한 번 더 읽고 적는 감상은 조금 더 나아지기만 바랄 뿐이다.

 

 아쉬움을 대신해 몇 구절 발췌하는 것으로 두서 없는 글을 마친다.

 

24쪽

흔히 소설가가 이런 성격을 그린다느니 저런 성격을 창조한다느니 하며 득의양양해하고, 독자도 그 성격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아는 척을 한다.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을 쓰며 즐거워하거나 거짓말을 읽고 기뻐하는 일일 것이다. 사실상 성격 같은 것은 정리된 게 없다. 소설가 따위가 사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고, 설령 썼다고 해도 소설이 될 일은 없는 것이다. 묘하게도 진짜 인간은 정리하기 어려운 법이다.

 

170쪽

세상에는 경멸하면서도 무서워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 모순은 아니다.

 

258쪽

가장 옅은 생애 속에 옅은 기쁨이 있었다.

만약 그 상태가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면 나는 그 한 시간 동안 만족했을 것이다. 하루 동안 계속되었다면 하루 동안 만족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만약 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해도 역시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새로운 마음의 활발한 작용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그 상태가 내 희망대로 같은 곳에 머물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265쪽

사다리 중간에서 분하다, 에잇 죽어버리자, 라고 생각했을 때는 손을 놓는 것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물론 전철머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죽으려고 손을 떼려고 했을 때 다시 묘한 정신 작용을 깨달았다.

 

290쪽

야스 씨는 갱부로 일하고 있지만 뼛속까지 갱부는 아니다. 그래도 전락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 전락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고도 했다. 전락의 밑바닥에서 죽은 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전락한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살아서 일하고 있다. 살아서 깡깡 두드리고 있다. 살아서……자신을 구원하려 하고 있다. 야스 씨가 살아가는 이상 나도 죽어서는 안 된다. 죽는 것은 나약한 것이다.

 

 

- 이 글은 현암사에서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인상을 적은 글일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