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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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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_"경!칠!!" 제임스 조이스_의식의 흐름을 읽는 방법
이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절실하게 와 닿은 감정은 '권태로움'이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흘러가는 시선, 생각의 전환, 분명하지는 않지만 격렬한 감정의 충돌들이 매 순간순간 그려지고 있음에도 읽는 내내 권태로웠다. 주제를 정하고 감상을 적지는 않지만, 굳이 이 감상에 제목을 다시 적자면, <그들의 권태로움에의 변명>쯤 되겠다.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읽어나갈수록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 마치 다른 데 신경을 너무 쏟은 나머지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 것처럼 호흡이 곤란해져 왔다. 가만히 앉아서 20분이고 30분을 읽는 게 힘이 들었다. 정말, "이런 적 처음이다."싶었다.
'사고(思考)란 사고의 사고인 거다.'_76쪽/스티븐
스티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건 그 사고에 사고를 더한 4중 충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곤란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한다는 건 사고와 사고가 부딪히고 이어지는 과정의 연속인 거다. 그래서 사고의 흐름이 맞지 않으면 그 사고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워지고 자꾸만 끊어지기 마련인 거였다. 이제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그만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고를 맞춰보는 거다.
다행히도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하나를 택하고 호흡을 느리게 했다. 한쪽을 읽는데 일 분이 걸리건 삼 분이 걸리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읽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하지만 생각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렇게 가까워졌어도 역시 같아지기는 어려워서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봤을 때 열에 하나쯤 이해하게 되었다면 다행이지 싶다.
초반에 적어둔 메모는 이렇다.
"제임스 조이스는 읽었을지 몰라도, 《율리시스》는 읽지 못했다."
이 메모의 의미는 이렇다.
"제임스 조이스가 기묘한 문장으로, 정신 사납게, 마치 미친 것처럼 질리지도 않고 이런 이야기를 써낼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확인했지만, 《율리시스》가 왜 율리시스인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게 될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이 예언은 적중해서 15장쯤 읽을 때까지도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방탕하고, 선정적이며, 과격하다 못해 어떤 의미로는 폭력적인 이야기를 왜 썼을까?"하는 의혹의 구체화가 뒤따랐다.
말 돌리기는 그만 두기로 하자.
《율리시스》처럼 여러 방향에서 여러 편의 글을 쓰게 한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벌써부터 힘을 빼놓아서야 다음 글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을 것 아닌가.
내가 읽은 《율리시스》는 이랬다. 다른 사람과 같지 않더라도,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정당한 요구임을 여기에 선언한다.
《율리시스》는 걸작이다. 규모가 너무 커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읽어 가면 읽어갈수록 등장인물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혹 마지막까지 '괴롭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건 내 사정이 아니라 모르겠다.
농담이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물의 사고와 작가의 사고와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사고가 계속해서 사고를 일으키고 있는 건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답이 나올 리가 없다는 거다.
솔직히 《율리시스》의 거대함은 거의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의 거대함이다.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는 쓸데없는 규모인 셈이다. 마스토돈이나 매머드를 가끔 블룸이 언급하는데, 그렇다. 그 멸종한 거대 동물들처럼 불필요해서 이제는 멸종되었을,혹은 앞으로 멸종할 것이 분명한 그런 거대함이 바로 《율리시스》의 정체다.
《율리시스》는 귀향이다. 오디세우스가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위험을 겪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분투하는 것처럼, 애쓰고 노력해야만 얻어낼 수 있는 휴식이다.
《율리시스》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핵심 귀향자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오디세우스'와 '리오폴드 블룸', '스티븐 데덜러스', '마리언 블룸'의 네 사람이다. 그리고 그 외에 연회의 끝에서 저마다의 휴식처를 찾아간 이들은 이 배의 선원들이다.
그 선원들의 면면은 대략 이렇고, 그들의 목적지는 이렇다.
「블룸이 그날 그 종소리의 여운을 따라 남쪽 샌디마운트에서 북쪽 글래스네빈까지 함께 여행했던 일행 중 몇몇의 구성원들은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가?
마틴 커닝엄(침대에), 잭 파우어(침대에), 사이먼 데덜러스(침대에), 네드 램버트(침대에), 톰 커넌(침대에), 조 하인즈(침대에), 존 헨리 멘턴(침대에), 버나드 코리건(침대에), 팻시 디그넘(침대에), 패디 디그넘(무덤 속에)_1174쪽」
일행들이 침대에서 무덤까지 자기 목적지에 찾아들어간 이 시간에 블룸과 스티븐은 블룸의 집이라는 목적지에 닿아 있었다. 그 목적지에는 페넬로페인 몰리가 있고, 블룸은 오디세우스가 되며, 스티븐은 텔레마코스였다.
위에 발췌한 부분은 아무 주석도 없다. 그냥 '귀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블룸과 스티븐이 목적지에 닿은 거라면 그들 역시 오랜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에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단순히 이들이 목적지에만 닿았다면 이 이야기는 내게 아무 의미 없이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럽기만 했던 따분한 책으로 기억됐을 거다. 하지만 스티븐과 블룸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영혼의 엇갈림이라고도 할 만한 무수한 시도와 어긋남이 있었다. 그 엇갈림으로 인해 스티븐은 방황하고 있었고, 블룸은 권태로워하고 있었다. 스티븐은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렸고, 블룸은 하녀들과 놀아나거나 길을 지나며 여인들의 속을 들여다볼 기회를 찾거나 훔쳐보거나 마사라는 여성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팔방미인의,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의 가능성이 권태와 방황으로 낭비되고 있었다.
굳이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 낭비는 개인을 넘어 도시, 더블린의 현실이었으며, 더블린 너머 아일랜드의 현주소였으리라.
스티븐과 블룸은 동행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블룸과 스티븐의 목적지에 닿은 셈이며 부자간(상징적인 의미의)의 화해이자, 세대 간의 연결에 닿은 거다. 잘은 모르지만 당시 아일랜드, 더블린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을 거다. 영국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거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거며, 과격한 방법도 불사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평화로운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율리시스》는 그들의 충돌과 화해를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이야기 속에서 블룸은 유대인으로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양쪽에서 핍박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의심을 산다. 그가 아무리 선량하게 베풀고, 나누어도, "꿍꿍이가 있을 거다"는 의심을 버리지 않는다(셰익스피어 작품 속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처럼). 그게 그들의 세계였다. 하지만 스티븐과 블룸이 하나로 이어짐으로써 세대와 민족을 넘어서는 연결이 완성되는 것 아니었을까?
이 생각에 닿았을 때, 제임스 조이스의 거대한 그림이 만약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면, 그렇다면 "정말 대단하구나." 하게 된 거다.
의도했든 의도 하지 않았든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 할지라도 이방인인 나에게 이 책이 이렇게 읽힐 수 있다면 같은 문화와 역사, 현실을 공유하고 있던 아일랜드인 들에게는 어떻게 읽혔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거였다.
그야말로 '걸작'이라 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임스 조이스의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작품이 아일랜드에 있다는 건 부러워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부정과 외도가 그려진다. 하지만 누구도 그 중 누구에게 주홍글자를 걸어 돌을 던지거나 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관심이라 읽을 수도 있지만, 포용력이라 할 수도 있다.
거대한 사상이나, 이념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유명한 정치가나 이름난 영웅을 가져다 쓰지 않아도 한 개인의 내면의 소리에서 시작해, 한 도시로, 다시 한 시대의 거대한 역사를 그려내는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을 읽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읽은 이가 움직이고 애쓰기 시작해야 무엇이든 남길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오랜 의문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다 풀지 못한 의문이다.
<파우스트>에서 마지막에 파우스트 박사가 '애씀'이라는 미덕으로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던 상황에서 천국으로 구원받는 장면 말이다.
애씀이 무엇이기에 그 많은 부덕과 잘못, 만행과 음행을 씻겨줄 수 있었을까?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타락해 있다. 술에 취하고, 성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목적지에 닿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그 애씀이 내 눈에도 보인다.
새삼스레 '애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그것은 애씀이다."
애씀이 무엇인가?
그것은 삶에서 구해야 할 답이다.
율리시스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모험은 끝났다. 지금쯤 여전히 페넬로페의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리오폴드 블룸 역시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찬가지로 그도 잠자고 있을 거다.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화해해야 할 것들, 사람들, 목적지에 닿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 것일까.
긴 이야기를 읽고 난 후라 그런지, 길게 이어진 물음표가 난무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