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8쪽

 전공 교재는 나이 들어 쇠약해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었다.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이 알고 있던 교육의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지 꺼져 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공 교재뿐 아니라 거의 어디에서도 나이들어 쇠약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이는 들었지만 활기차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어디에나 있다. 사람인 이상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걸 알지만 그 죽음이 찾아든 그 순간 이전까지는 죽음을 외면하는 게 최선이라고 하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살고자 하는 게 사람인 거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하기를 미루기만 한 탓에 길지 않은 마지막이 더 짧아지거나 아예 사라진 것처럼 잃어버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가족,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병원의 침대에 몸에 온갖 관과 바늘을 꽂고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며 누워있으니)로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정말 이상적인 결말인 걸까? 

 이 책의 우리나라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지만 실제로 이야기하는 건 죽음이 임박한 사실을 알고난 후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역시 '그래도 삶'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18쪽

 그때는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느꼈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물론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는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 내가 책임져야 할 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자는 외과 의사다. 무수한 죽음을 목격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손으로 살려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될 여지가 큰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의사에게조차 죽음의 자연스러움은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될 뿐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거라고 한다. 특히 그 죽음이 찾아들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죽음과 그들을 같은 위치에 두고 생각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마는 거다. 

 '죽음은 실패다'는 생각은 의사에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암과의, 사고의 상처와의, 죽음과의 싸움에 실패해 이제 죽음에 의해 희생될 희생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가져다 놓고 슬퍼하는 거다.

 20쪽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일,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는 상태가 성공인지 아니면 진정한 성공이 달리 있는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의 문제에 달려있다고 한다. 가장 중요시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성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공허하다. 

 20쪽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자실같이 고립되고 격리된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흔한 풍경일 거다. '깨어날 지조차 불분명한, 수술의 결과 '정말 삶이 연장되는지'조차 모호하며, 그렇게 연장된 삶 동안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뇌와 육체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요양원에서의 삶 또한 만족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삶이 자유라면 그 자유를 잃은 삶은 이미 삶이 아니지 않은가.

 43쪽

 인류 역사상 나이 드는 일이 이보다 더 나은 시대는 없었다. 세대 간 힘의 균형이 재편되긴 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노인들은 자신이 누렸던 통제력과 지위를 일부 나눠 주었지만 완전히 잃은 게 아니었다. 현대화가 강등시킨 것은 노인들의 지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현대화와 함께 사람들의 기대 수명과 평균 수명이 크게 올라갔다. 이런 경향에 따라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늘리는 일에 많은 노력과 수고가 들어갔다. 물론, 이러한 노력과 수고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는 더 필요해지게 될테니 말이다. 현대화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해체는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켰다. 노인과 가족은 분리되었다. 때로는 누가 사는지, 혹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옆집의 사람들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 머물기도 한다. 일 년에 몇 번 씩 찾아다니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후회하는 일(동시에 안도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거다. 가족의 의미는 끊임 없이 변해왔지만 지금처럼 급격하고 또 극심하게 가족의 개념이 흐릿해진 동시에 그 지위가 강등된 시기가 있었을까 하게 된다. 

 44쪽

 이런 삶의 방식에는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숭배가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현실 말이다. 언젠가는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이 덮쳐 오게 될 것이다.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생각하기엔 이르다고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를 잃는다는 건 자유와 자아를 잃는다는 이야기이며, 자유에는 신체적인 자유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와 의식의 자유가 포함된다. 

 단순히 '죽음'이 곧바로 찾아온다면 사실 걱정할 것이 없다. 마음껏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맞이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 역시 단순하지 않다. 죽음에도 '과정'이 있고 그 과정 가운데는 '독립의 상실'도 들어 있다는 거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오래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결과를 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스운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과정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아직 준비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다. 아직 젊다는 걸로 독립이 불가능해지는 시기에 대한 생각을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다.

 73쪽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대로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늙어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일은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불편함과 예전같지 않음은 느끼지만 적응하는 존재이기에 그런 상태에도 적응하게 된다. 그렇기에 당장은 큰 불편이나 이상이 생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로 '쇠락'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거다. "내가 이렇게 약해졌다니!"하는 식으로 말이다.

 94쪽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다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저자는 굳이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나이를 떠나 명백히 죽음에 이르는 길에 서 있다고 느끼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일 거다. 정말 슬픈 건 "나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거다. 죽음 뒤에 또다른 삶이 있다고 믿는다 해도, 죽음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두 가지만 잃는다면 그렇게 두려움이 크지는 않을 거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기에 두려워지는 거다.

 116쪽

 병원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로비를 벌였고, 의회는 1954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을 지을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다. 바로 이것이 현대 요양원의 시초였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nursing home', 즉 요양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요양원'이라는 이름의 시초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단지 '나이든 것 뿐'인 환자들이 병원에 이익이 되지 않기에 병실을 비우기 위해 고안된 시설이 요양원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지금은 어떤 분야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노인 모시기'가 상품으로 나오는 일도 있지만 말이다. 요양원의 생활은 정신이 맑을수록, 신체의 부자유가 클수록 괴로울 것만 같다. 

 119쪽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 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우스개로 스스로 돈을 지불하면서 감금 생활을 계속할 리 있겠는가하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면서도, 잃어버린 신체의 자유와 함께 정신의 자유까지 박탈당하는 일을 경험한다. 책 속의 할머니가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감금됐다고 느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흔히 "이것이 최선이다"고 하는 결론에서 선택되는 이 결과는 사실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누구보다도 그 안에서 감금됐다고 느낄 그 사람이 느낄 불행이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

 155쪽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내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우리는 행복조차 유예한다. 그 이유는 지금은 더 나중의 행복을 위해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괴롭고 힘겨워도 그것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현재의 불행은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견뎌내지 못하는 건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당장 내일, 아니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준비에 너무 많은 걸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애초에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말이다.

 157쪽

 연구 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흔히 나이는 사고의 척도로 여겨진다. '젊은 사람이' 혹은 '나이들었으니' 하는 식의 이야기가 무척 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거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이가 아니라 관점이다. 무엇에 더 큰 가치와 삶의 비중을 부여할 것인지를 정하는 건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172쪽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수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


 이런 상태를 비유하자면 무인도에 홀로 던져지면서 완벽한 식사와 잠자리와 함께 부루마블 게임이 제공된 것에 가깝지 않을까. 얼핏 보면 완벽하다. 먹을 것도 얼마든지 있고, 잠자리도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부루마블은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그는 그저 '혼자'인 거다. 

 '당사자를 위한' 선택이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당사자를 돌봐야 할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걸 안다. 돈을 낸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시설에 버려둔 소중했던 존재를 잊고 지내려 하는 삶 역시 시설 속의 당사자들만큼이나 텅 빈 삶을 사는 셈 아닌가.

 198쪽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부여는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게 아니며 부여된 의미가 옳은지 그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의미의 부여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안다. 죽음이 가져올 허무함, 의미 없음을 대체할 의미를 발견하는 건 죽음을 향해 가는 동안에는 큰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남는 사람들에게도 그 의미가 전해질 지도 모른다. 설사 그 의미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다 해도 그 때는 그것에 공포를 느낄 사람이 없기에 의미는 그 역할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 된다.

 218쪽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데 따른 투쟁은 곧 자신의 삶을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와 현재 유지하고 싶은 나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릴 만큼 너무 쇠약해지거나, 너무 소진되거나, 너무 종속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질병과 노화만으로도 이 투쟁은 충분히 힘겹다. 우리가 의지하는 전문가들과 시설들이 이 투쟁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환자를 위한 일', 혹은 '당사자를 위한 일'이라는 미명 하에 취해지는 조치들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단지 그들의 번거로움과 최대한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환자'가 된 그들은 이끌려 다니는 수가 많다. 그렇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고 압박해오는 질병과 나이듦 뿐 아니라 전문가와 시설과도 투쟁해야 할테니 무엇이 누구를 위한 일이라는 말인가.

 228쪽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요.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최선의 보험이 아닌가.

 248쪽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호스피스 케어가 모든 치료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술과 집중적인 치료보다 더 수명을 늘리는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효과의 근원은 '현재의 삶을 누리는 일'이었을 거다. 수술과 약물 치료로 인해 세상, 소중한 사람들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348쪽

 나는 아버지가 일어서는 걸 도와 드렸다. 아버지는 내 팔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지난 반년 동안 걸어 다닌 거라고는 거실을 가로지를 때뿐이었다. 그 이상 걷는 걸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천천히 농구 코트를 지나서 콘트리트 계단 20개를 올라가 관중석에 마련된 가족석에 앉았다. 그 광경은 나를 완전히 압도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전혀 다른 방식의 케어 ―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의 의학 ―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어려운 대화가 이뤄 낸 일이었다.


 저자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저자도 의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머지 않아 전신이 마비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들여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다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선택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와 가족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렸던 거다. 저자의 아버지에게는 수술이라는 선택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수술을 유예한다. 그리고 '치료될 가능성'보다 현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도록 했다. 저자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의학을 발견한다. '어려운 대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355쪽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끝이 있음을 받아들이더라도 어디가 끝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어떤 행동 혹은 선택을 취하는 게 그렇게 현명한 선택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리기 위해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누리기 위한 선택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거다. 두려움은 때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뒷걸음질치는 결과를 만든다. 두려움은 무엇도, 누구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373쪽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결론이다. 이 책의 제목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면서도 계속해서 삶, 더 나은 삶, 최선의 삶을 이야기하던 이유가 잘 담긴 결론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은 있을 수 없다. 그 죽음이 아무리 편안한 단계를 지나온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디에도 '편안한' 죽음은 없다. 결국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삶을 위해서라는 거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Fati)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카르페디엠(Carpediem), 죽음을 알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좋은 삶으로 이끄는 최선인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눈으로 사물을 본다. 하지만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에 기억하는 일의 축적이며, 마음도 그럼으로써 성장한다. 마음이 사물을 보는 데 능해진다. 눈은 사물을 보기만 하지만, 마음은 본 것을 해석한다. 그 해석이 가끔은 눈으로 본 것과 다를 때도 생긴다._451쪽」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믿고 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말하는 편이다.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행동이지만 처음의 의도는 그렇게 의미심장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간교하고, 집요했다고 말하는 게 사실에 가까울 거다. 눈을 보고 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말을 하고 있는 내 마음도 전해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보통 "너 너무 부담스럽게 쳐다보지마"였다. 연상의 사람들에게는 버릇 없어 보였을 거고, 한참 연하의 사람들에게는 집요해 보였을 거다. 하지만 여전히 눈으로 말하고자 했고, 마음을 드러내고자 애써왔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 


 머리로는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은 사실. 

누구도 '같은 눈'을 가지고 서로를 볼 수 없으며,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였다. 위에 적어둔 본문 속 쇼노스케의 말을 여러 번 되새기게 된 이유 말이다. 설사 '같은 눈'을 하고 '같은 마음'을 지니더라도 '해석'이 달라진다면 결국 같아질 수 없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우리가 서로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깨달아지던 순간이다.


 이 소설 <벚꽃 다시 벚꽃>은 무사 집안에 태어났으면서도 무에 재능이 없고, 아버지를 닮아 야심도 없는 차남 후루하시 쇼노스케가 누군가의 모함으로 할복 자살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음모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쇼노스케는 어머니의 지인인 동시에 에도 대행인 사카자키 시게히데의 도움과 지시를 받아 진실에 점점 더 다가가게 된다. 후루하시 쇼노스케는 자신이 밝혀야 하는 진실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모함하게 했던 '위조 장부'를 작성한 대서인을 찾는 거라고 믿는다. 누구의 글씨든 완벽하게 똑같이 쓸 수 있는 재주를 지닌 수수께끼의 대서인만 찾는다면 집안을 다시 세우는 일도, 고향의 번의 혼란을 막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쇼노스케가 진실에 닿았을 때 오히려 쇼노스케는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그가 눈으로 보았던 것을 마음에서는 다르게 기억했고, 마음으로 바랐던 것을 눈은 다르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진실은 하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이야기는 내게 그런 교훈으로 남았다.


 112쪽

개구리를 잡으려면 못으로, 전갱이를 잡으려면 바닷가로 가야지. 표적과 같은 못에 있으면 아무리 넓은 못이라도 파문을 감지할 수 있다. 같은 바닷가에 있으면 제 아무리 복잡한 바닷가라도 같은 파도가 밀려올 것이야.


 진실 혹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위에 적은 말들은 하나 같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개구리를 잡으러 못으로 갔다가, 못에 잡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실제로 적지 않다. 전갱이를 잡으러 바닷가에 가더라도 전갱이를 잡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더 높다. 같은 못에 있으면 같은 파문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넓은 못'이라는 전제와 '장애물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가 요구되는 거다. 파문은 펴지면서 넓어지지만 동시에 약해진다. 그런 파문이 장애물과 부딪히면 굴절되기 마련이고 그 파문을 감지한 사람이 장애물의 파문 안에 있다면 최초의 파문이 아니라 장애물에 굴절된 파문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왜곡된 파문을 감지하고 그것이 그 못에 번진 최초의 파문과 같을 것이라는 착각에 이를 수도 있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같은 바닷가에 있더라도, 같은 파도가 밀려올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시작이 같다고 해서 그 파도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굳이 밝히자면 쇼노스케는 그 왜곡되고 굴절된 파문만을 감지하는 사람이다. 그가 진실에, 사실에 접근하기란 무척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다.


 169쪽

사람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게 마련이오. 글씨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지. 보는 것, 보이는 것이 다르면 그것을 베껴 쓰고 그리는 것도 다른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소?


 이 말에서는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적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오히려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당연한 말이다. 두 번 적으면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길만큼. 같은 못에 있다고 해서 같은 파문을 감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해도 '나'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눈'이 정보를 다르게 바라보거나, 해석하는 '마음'이 다르게 해석해버리면 그것은 다른 것이 된다. 결국 글씨나 그림이나 생각이나 쓰는 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 왜곡이나 굴절이 우리를 사실이나 진실, 더 나은 내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곡이나 굴절은 거의 모든 일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리기가 더 쉽다.


 이 작품의 한국 제목은 <벚꽃 다시 벚꽃>이지만 원 제목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라고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얽히고,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섞이니 당연히 뒤죽박죽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 


극적인 불행이나 행운이 없더라도 모두의 삶은 뒤죽박죽이어서 예측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르게 하고, 본 것들을 가지런히 마음에 담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게 아닐까. 

 옳기만 한 사람도 없고, 그르기만 한 사람도 없으니 역시 세상이 뒤죽박죽일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씨스터즈 - 눈만 뜨면 티격태격, 텔게마이어 자매의 리얼 버라이어티 성장 여행기
레이나 텔게마이어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수, 혹은 친구, 그리고 동반자.

나의 형제와 자매를 떠올리고 그들과의 시간을 추억하며. 



 언니 레이나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여동생과는 전혀 딴판인 여동생 아마라와 남동생 윌, 엄마는 자동차로 일 주일이라는 시간동안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앙숙을 넘어 원수나 다름 없어, 사사건건 부딪히고 으르렁 거리는 자매와 자기만의 세계 속에 푹 빠져있는 남동생과의 여행.

이 여행은 과연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조금쯤 달라져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짧고도 짧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담고 있어요.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 가족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지요.



 어느 날, 한 소녀는 혼자 놀기에 지쳐 "같이 놀아줄 사람"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이렇게 소원을 빕니다.

"엄마! 아빠!! 나 여동생이 갖고 싶어요!"

아아, 이 일을 어쩌죠? 

소원을 빌어버리고 말았어요. 


소녀의 이름은 '레이나'예요.




 다른 소원은 잘 이루어지지 않아도 이런 소원은 용케 잘 이루어지지요.

소녀의 소원도 마치 '꿈처럼'(꿈 가운데에는 길몽 말고도 흉몽 혹은 악몽이 있는 법이죠) 쟈쟌! 하고 이루어졌답니다.

그런데, 이런.

소녀의 여동생은 소녀가 '원했던' 그 여동생과는 너무나너무나 달랐어요.

애초에 이게 여동생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도무지 뭐가 재밌는지 알 수 없는 데서 까르르 혼자 웃곤 하는 거였죠.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못한다고 자기는 절대 '저랬던 적'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여동생의 이름은 '아마라'입니다.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름 답죠?



 

  그래도 '언니니까 참고 놀아줘야지'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특한 마음으로 함께 놀아보려고 해도 영문 모를 곳에서 싫다며 난리 발버둥에, 온갖 소리라는 소리는 다 질러대는 통에 금세 질려버리고 맙니다.

 왜 그러는지 말이라도 해주면 해줄 수 있을지 없을지 생각이라도 해볼텐데, 그저 막무가내로 싫다고만 하니 곤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울고 보채는 통에 애완동물로 금붕어를 사가지고 왔어요.

동생의 금붕어가 똥을 누는 걸 보고 언니는 자기도 모르게 놀리듯 "아마라의 물고기가 똥쌌다"고 말해버립니다.

그 똥은 마치 살사 소스처럼 빨간 색이었는데요, 짖궂은 아마라는 언니가 나쵸에 살사 소스를 찍어 먹는 걸 보고는 자기의 물고기의 '똥처럼 생겼다'고 말해버리죠. 그통에 레이나는 입안을 헹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물고기를 가지고 서로를 놀리며 며칠을 보냈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마라의 물고기가 죽어버려요. 

엄마는 애먼 레이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책임을 묻습니다.

그저 레이나는 억울할 뿐이었죠.



 

 아아, 여동생 하나만으로도 벅차건만 남동생이 또 생겨버렸어요. 

이름은 윌인데요, 신의 뜻이라는 의미랍니다. 

그런데 이 남동생이 어찌나 아빠랑 똑같은지, 철이 없는데다 제멋대로라면 둘째가가 서러울 지경이지요. 

엄마는 그저 비명같은 부탁을 소리 높여 부르짖을 뿐이죠.



 레이나와 아마라, 윌과 엄마는 목적지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도착한 곳에서도 레이나는 자기와 '놀아줄'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하고 말아요. 어렸을 때는 곧잘 어울렸던 사촌언니오빠들도 이제는 관심사가 달라져 어울리기 어려워졌습니다.

 부모님과 이모님들의 이야기야 말할 것 없이 고리타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뿐이라 근처에도 가지 못하지요.

 남동생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또 어찌나 소란스럽게 굴던지 지나갈 때마다 질러대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하릴 없는 마음으로 밖에 나와보니 동생 아마라가 혼자 앉아 있었어요.

자기와 같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으로 말을 붙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쿨'하고 단호해서 마음을 붙이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처음 마음과는 달리 다시 다퉈버리고 말았어요.

왜 여동생인데도 나와 이렇게 다를까요? 

아마라는 어쩌면 이렇게 냉정할 수 있을까요?

다시 화가 난 레이나는 문을 '쾅' 닫아버립니다.



 

 친척들과의 모임이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 주일 간의 여행이 시작됐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죠?

 도중에 차가 고장나서 도로 한 가운데 멈춰버리고 말았어요. 그리고 이미 죽은 줄 알았던 뱀마저 다시 나타났구요.

과연 이 가족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레이나와 아마라는 화해하고 사이 좋은 자매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오래 전 동생과 매일, 매순간,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서로 티격태격 아웅다웅 다투던 때가 떠올라서 웃음도 나고 아련해지기도 합니다.

 셋째로 태어난데다 위로 누나가 둘이고 그 터울이 작지 않아서 어렸을 때는 혼자 놀았을 거에요. 기억은 없지만.

아마 그때는 저도 모르게 '동생 하나'쯤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에도 적은 것처럼 동생과 함께 보낸 첫 기억 역시 싸웠던 것 같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는 생소해서 처음 받았을 때는 "이건 어떻게 읽으면 좋은 거지?"하고 잠깐 생각했더랍니다. 

하지만 막상 읽을 때가 되니, 단편 소설조차 읽기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에,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만화는 또 아니다 싶다면 그럴 때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마 직전에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이 클 것 같네요. 


처음 읽은 그래픽 노블치고는 재밌게 잘 읽었다고 자평해 봅니다.


정말 비슷할 것 같고, 가장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존재가 바로 가족이죠.

그 가족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것은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 사이구요. 하지만 그렇게 늘 함께 있어도 이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 수록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배려와 관심이 필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들 가족은 여행을 계속하고 있어요. 

이 책의 말미에서 여행은 끝이 나지만, 아마 지금도 여전히 씨스터즈의 이야기, 레이나와 아마라, 남동생 윌과 엄마, 아빠의 이야기는 진행형일 겁니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만한 걸 찾으신다면 한번쯤 들춰봐도 좋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저 뱀의 행방이 궁금하군요.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질까요?)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는 거대한 산맥을 넘었던 덕에 유난히 휴식하듯 읽힌 책이었어요.

역시 세상에 다양한 책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이유는 제가끔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내일은 고향 집, 누나들에게 전화 한 번 해야겠구나 하게 되는 밤입니다.


- 이 감상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적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율리시스_"!!!" 제임스 조이스_의식의 흐름을 읽는 방법

 

이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절실하게 와 닿은 감정은 '권태로움'이었다어마어마한 속도로 흘러가는 시선생각의 전환분명하지는 않지만 격렬한 감정의 충돌들이 매 순간순간 그려지고 있음에도 읽는 내내 권태로웠다주제를 정하고 감상을 적지는 않지만굳이 이 감상에 제목을 다시 적자면, <그들의 권태로움에의 변명>쯤 되겠다.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읽어나갈수록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마치 다른 데 신경을 너무 쏟은 나머지 숨을 쉬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 것처럼 호흡이 곤란해져 왔다가만히 앉아서 20분이고 30분을 읽는 게 힘이 들었다정말, "이런 적 처음이다."싶었다.

 

'사고(思考)란 사고의 사고인 거다.'_76/스티븐

스티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로 했다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건 그 사고에 사고를 더한 4중 충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곤란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한다는 건 사고와 사고가 부딪히고 이어지는 과정의 연속인 거다그래서 사고의 흐름이 맞지 않으면 그 사고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워지고 자꾸만 끊어지기 마련인 거였다이제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그만 두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사고를 맞춰보는 거다.

다행히도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다른 하나를 택하고 호흡을 느리게 했다한쪽을 읽는데 일 분이 걸리건 삼 분이 걸리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읽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하지만 생각은 빠르게 가까워졌다그러나 그렇게 가까워졌어도 역시 같아지기는 어려워서 결국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봤을 때 열에 하나쯤 이해하게 되었다면 다행이지 싶다.

 

초반에 적어둔 메모는 이렇다.

"제임스 조이스는 읽었을지 몰라도, 《율리시스》는 읽지 못했다."

이 메모의 의미는 이렇다.

"제임스 조이스가 기묘한 문장으로정신 사납게마치 미친 것처럼 질리지도 않고 이런 이야기를 써낼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확인했지만율리시스》가 왜 율리시스인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게 될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이 예언은 적중해서 15장쯤 읽을 때까지도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오히려 "이렇게 방탕하고선정적이며과격하다 못해 어떤 의미로는 폭력적인 이야기를 왜 썼을까?"하는 의혹의 구체화가 뒤따랐다.

 

말 돌리기는 그만 두기로 하자.

율리시스》처럼 여러 방향에서 여러 편의 글을 쓰게 한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벌써부터 힘을 빼놓아서야 다음 글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을 것 아닌가.

내가 읽은 율리시스》는 이랬다다른 사람과 같지 않더라도당연히 이해해야 한다이것은 정당한 요구임을 여기에 선언한다.

 

율리시스》는 걸작이다규모가 너무 커서 알아보기 힘들지만읽어 가면 읽어갈수록 등장인물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준다혹 마지막까지 '괴롭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건 내 사정이 아니라 모르겠다

 농담이고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인물의 사고와 작가의 사고와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사고가 계속해서 사고를 일으키고 있는 건데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답이 나올 리가 없다는 거다.


솔직히 율리시스》의 거대함은 거의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의 거대함이다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나에게는 쓸데없는 규모인 셈이다. 마스토돈이나 매머드를 가끔 블룸이 언급하는데그렇다그 멸종한 거대 동물들처럼 불필요해서 이제는 멸종되었을,혹은 앞으로 멸종할 것이 분명한 그런 거대함이 바로 율리시스》의 정체다.


율리시스》는 귀향이다오디세우스가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위험을 겪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분투하는 것처럼애쓰고 노력해야만 얻어낼 수 있는 휴식이다.

율리시스》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핵심 귀향자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오디세우스'와 '리오폴드 블룸', '스티븐 데덜러스', '마리언 블룸'의 네 사람이다그리고 그 외에 연회의 끝에서 저마다의 휴식처를 찾아간 이들은 이 배의 선원들이다.

그 선원들의 면면은 대략 이렇고그들의 목적지는 이렇다.

 

「블룸이 그날 그 종소리의 여운을 따라 남쪽 샌디마운트에서 북쪽 글래스네빈까지 함께 여행했던 일행 중 몇몇의 구성원들은 지금은 어디에 있었는가?

마틴 커닝엄(침대에), 잭 파우어(침대에), 사이먼 데덜러스(침대에), 네드 램버트(침대에), 톰 커넌(침대에), 조 하인즈(침대에), 존 헨리 멘턴(침대에), 버나드 코리건(침대에), 팻시 디그넘(침대에), 패디 디그넘(무덤 속에)_1174쪽」

 

일행들이 침대에서 무덤까지 자기 목적지에 찾아들어간 이 시간에 블룸과 스티븐은 블룸의 집이라는 목적지에 닿아 있었다그 목적지에는 페넬로페인 몰리가 있고블룸은 오디세우스가 되며스티븐은 텔레마코스였다.

 

위에 발췌한 부분은 아무 주석도 없다그냥 '귀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블룸과 스티븐이 목적지에 닿은 거라면 그들 역시 오랜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에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단순히 이들이 목적지에만 닿았다면 이 이야기는 내게 아무 의미 없이 길고 지루하며 고통스럽기만 했던 따분한 책으로 기억됐을 거다하지만 스티븐과 블룸이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확인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영혼의 엇갈림이라고도 할 만한 무수한 시도와 어긋남이 있었다그 엇갈림으로 인해 스티븐은 방황하고 있었고블룸은 권태로워하고 있었다스티븐은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렸고블룸은 하녀들과 놀아나거나 길을 지나며 여인들의 속을 들여다볼 기회를 찾거나 훔쳐보거나 마사라는 여성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팔방미인의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의 가능성이 권태와 방황으로 낭비되고 있었다.

굳이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자면그 낭비는 개인을 넘어 도시더블린의 현실이었으며더블린 너머 아일랜드의 현주소였으리라.

 

스티븐과 블룸은 동행하여 집으로 돌아온다블룸과 스티븐의 목적지에 닿은 셈이며 부자간(상징적인 의미의)의 화해이자세대 간의 연결에 닿은 거다잘은 모르지만 당시 아일랜드더블린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을 거다영국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거고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거며과격한 방법도 불사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평화로운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그런 의미에서 율리시스》는 그들의 충돌과 화해를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이야기 속에서 블룸은 유대인으로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양쪽에서 핍박당하고 박해를 받으며의심을 산다그가 아무리 선량하게 베풀고나누어도, "꿍꿍이가 있을 거다"는 의심을 버리지 않는다(셰익스피어 작품 속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처럼)그게 그들의 세계였다하지만 스티븐과 블룸이 하나로 이어짐으로써 세대와 민족을 넘어서는 연결이 완성되는 것 아니었을까?

 

이 생각에 닿았을 때제임스 조이스의 거대한 그림이 만약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면그렇다면 "정말 대단하구나." 하게 된 거다.

의도했든 의도 하지 않았든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 할지라도 이방인인 나에게 이 책이 이렇게 읽힐 수 있다면 같은 문화와 역사현실을 공유하고 있던 아일랜드인 들에게는 어떻게 읽혔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거였다.

그야말로 '걸작'이라 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임스 조이스의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지만이런 작품이 아일랜드에 있다는 건 부러워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부정과 외도가 그려진다하지만 누구도 그 중 누구에게 주홍글자를 걸어 돌을 던지거나 하지 않는다이것은 무관심이라 읽을 수도 있지만포용력이라 할 수도 있다.

거대한 사상이나이념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유명한 정치가나 이름난 영웅을 가져다 쓰지 않아도 한 개인의 내면의 소리에서 시작해한 도시로다시 한 시대의 거대한 역사를 그려내는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을 읽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이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읽은 이가 움직이고 애쓰기 시작해야 무엇이든 남길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오랜 의문이 있다그리고 지금까지도 다 풀지 못한 의문이다.

<파우스트>에서 마지막에 파우스트 박사가 '애씀'이라는 미덕으로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던 상황에서 천국으로 구원받는 장면 말이다.

애씀이 무엇이기에 그 많은 부덕과 잘못만행과 음행을 씻겨줄 수 있었을까?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은 타락해 있다술에 취하고성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그럼에도 그들은 목적지에 닿기 위해 애쓰고 있다그리고 그 애씀이 내 눈에도 보인다.

 

새삼스레 '애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가?

"그것은 애씀이다."

애씀이 무엇인가?

그것은 삶에서 구해야 할 답이다.

 

율리시스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한 모험은 끝났다지금쯤 여전히 페넬로페의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리오폴드 블룸 역시 목적지에 도착했다마찬가지로 그도 잠자고 있을 거다.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화해해야 할 것들사람들목적지에 닿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 것일까.

긴 이야기를 읽고 난 후라 그런지길게 이어진 물음표가 난무하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구와 현의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다 "우륵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게 무리수"라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적는다.


이 이야기는 우륵을 중심으로 흐른다. 하지만 역시 우륵이 주인공은 아닐거다.

진짜 주인공은 소리이고, 악기일 거다.

쇠의 소리, 금의 소리, 사람과 고을, 나라의 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을 내는 제가끔의 악기들.

중요한 건 균형이었을 거다.

그래서 우륵이 앞에 세워진 것이고, 우륵이 현이 되어 제가끔의 소리를 받아 들려주고 있던 걸 거다.


간과한 것이 있다.

우륵이 금을 만드는 과정, 가야금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다.


「그 소리는 나무의 소리이기는 하지만, 빈 것을 지나온 소리였다. 빈 통이 단단한 나무의 소리를 펴서 둥글게 돌려내고 있었다._198쪽」


「― 니문아, 봐라, 비어야 울리는구나. 소리란 본래 빈 것이다. 비어 있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있는 것이다._199쪽」


「― 여러 고을의 금들이 석 줄이나 넉 줄인데, 이제 새 금에 몇 줄을 걸어야 하리까?

  ― 열두 줄을 걸자. 열두 줄이면 이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이 담기기에 족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두 손은 능히 열두 줄을 넘나들며 울려낼 수 있다. 더 많아도, 더 적어도 안 될 것이다. 열두 줄이다._199쪽」


「― 니문아, 다로의 금이 생각 나느냐?

  ― 줄을 버팀목으로 고여, 그 오른편이 튕겨내는 소리를 왼편이 데리고 놀 수가 있었습니다.

  ― 그랬다. 새 금에 줄마다 버팀목을 받쳐야 한다._199쪽」


「금은 길이가 다섯 자 다섯 치에 폭이 한 자 세 치로, 사람의 키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았다. 굵고 가는 줄들이 가지런히 들어섰고 버팀목들이 들어선 모양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대열과 같았다.

  ― 니문아, 이것은 곧 사람의 몸이로구나. 끌어안고 뜯어보아라._200쪽」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비어야 한다. 하지만 비어 있음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실히 있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비움이다.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을 담을 뿐 아니라 사람의 두 손이 능히 넘나들 수 있는 현의 수가 열두 줄이다. 그보다 많으면 능히 넘나들 수 없겠고, 그보다 적어서는 세상의 넓이와 모든 시간을 담아내지 못할 거다.

 이것은 균형이 맞는 거다.

 줄만 걸어서는 오른편이 튕겨내는 소리를 왼편이 데리고 놀 수 없기에 줄에 버팀목을 고였다. 

 이것은 이치다.

 그 금의 길이와 폭이 사람의 몸과 비슷하다. 

 이것은 사람이다.


결국 우륵은 하나의 금을 만드는데 사람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담았다. 제가끔에 맞는 모든 소리를 담고 있기에 누구나 자기의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소리를 내기 위함이라 해도 비워야만 한다는 거다.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이치에 따라 균형을 잃지 말아야만 한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누구의 소리를 내는가? 

악기의 현을 울리는 사람의 소리다. 


현의 노래는 가야의 이야기도, 신라의 이야기도, 신라 장군 이사부나, 대장장이 야로, 우륵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저마다의 소리로 울려댈 독자와 그 독자의 가능성이 만들어갈 세상의 이야기다.


제가끔으로 읽어 울려야 좋은 이야기로구나.



혹 작가 님이 들으신다면 묻고 싶은데, 왜 이렇게 어렵게 그려내셔야만 했습니까.

우문이지요. 그래야만 하셨을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