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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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책으로는 두 번째로 구입한 작품이고, 읽기로는 처음 읽는 작품이라 사뭇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조지 에들지라는 파르시(인도에 거주하는 조로아스터교도_두산백과)로 태어난 영국국교회 목사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사람 혹은 사람들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 사무변호사다.

다른 한 사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로 이름은 아서 코난 도일이고 <셜록 홈즈>의 작가이자 영국의 귀족으로 임명 받은 유명인이다.

 1 권에서는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도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줄에 아서의 눈에 조지의 이름이 들어오는 것으로 끝이 나면서 2 권에서는 둘 사이에 어떤 사건, 혹은 일이 발생할 것을 암시한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처음 읽은 작품이라 문체나 서술 방식이 어떻다는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이 작품만 놓고 보면, 구성은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지만 방백 형식의 독백으로 인물의 심리 묘사와 앞으로의 행동을 암시하는 방식은 종종 지루함을 느끼게 했다. 이 지루함은 사실 문체 자체에서 왔다기보다 주인공인 것이 분명한 두 인물 사이에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음에서 오는 조바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줄거리를 조금 살펴보면, 조지 에들지는 백인이 아니다. 아버지는 영국국교회의 목사로 그의 가족은 목사관에서 머물며 신의 은총을 구하고 정직과 신실의 말씀을 실천하기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정말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기묘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배달되고, 집을 내놓은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집을 얻으러 왔다며 찾아오며, 이웃의 물건이 사라지거나 하는 소소한 범죄가 일어나는데 이 범죄들이 마치 조지가 저지른 것처럼 말하는 편지들이 자꾸만 날아든다. 아버지는 경찰서를 찾아가 수사와 중재를 구하지만 경찰은 조지가 그 모든 것들을 저질렀음이 분명하다며 되려 모욕스런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러다 어느 날 부터인가 그 모든 괴롭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몇 년 후, 그 괴롭힘은 다시 시작되고, 이번에는 마을의 소와 말들이 누군가가 가한 상해로 인해 하나둘 씩 죽어가게 된다. 이 범죄의 범인으로 조지가 지목되고 결국 조지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결백하고 무고함을 알았기에 세상의 정의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언제나 정의가 선한 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져 간다.

 아서 코난 도일은 주정뱅이에 정신병으로 요양원에서 생활하다 죽은 찰스 도일의 맏아들이다. 아버지 찰스 도일은 수채화를 그려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지만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남자였다. 아서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신이 어머니와 가족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지켜내는 기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한다. 시간이 흐르고 아서는 안과 의사가 되고 결혼도 한다. 그리고 '홈즈'라는 케릭터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곧 유명해진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어머니와 가족을 지켜낼 수 있게 되어 기뻐한다. 하지만 그를 따라다니던 아내 투이가 결핵에 걸리게 되고, 3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지켜내야 한다고 믿었기에 모든 수단을 다해 아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아내는 3개월을 넘기고, 1년, 2년 계속해서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 그는 나날이 유명해졌고, 활기찼으며, 건강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진'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아내가 살아 있었기에 그는 아내를 배신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진과의 사랑을 플라토닉한 사랑이라고 칭하며 아내와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한다. 당연한 결과로 그는 그 과정에서 커다란 회의감과 무수한 자기비난과 맞닥드린다. 그럼에도 그는 모두를 지켜내겠다며 대상을 알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


 1권은 마치 세트장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본격적인 촬영을 위해 배경을 그리고, 배우를 선택하며, 사건의 단서들을 나열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그 배경 가운데는 아서 코난 도일이라는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작가의 탄생과 성장, 사랑과 투쟁이 있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이교도 혹은 유색인종에 대한 영국 사회의 악의적인 괴롭힘과 편견도 깔려있다. 

 누구보다 정직하고 결백한 젊은이, 변호사가 되어 명성과 함께 가족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바람으로 가득한 유망한 인재의 미래는 인종차별의 벽 앞에 간단히 부서지는 것처럼 보인다. 

 정상적인 영국인이었으며, 영국의 종교를 갖고 있던 조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추측컨대 그의 인종과 피부색으로 인해 이방인이 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아서에게도 의문은 있었다. 그는 영국인이고, 어머니와 함께 영국국교회로 개종한 상태며, 예수 님을 부정하거나 불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카톨릭이나, 기타 종교에 의문을 품고 있으며, 심령술의 과학적인 면에 이끌린다. 언젠가 그러한 이끌림이 자신에게 치욕과 비난을 가져올지라도 그는 그런 이끌림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아서는 완벽한 영국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면에서 그는 완벽한 이방인인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이야기 속에는 두 명의 이방인이 탄생하게 된다. '이방인처럼 보이는 영국인'과 '영국인이지만 이방인인' 그런 두 사람 말이다. 다음 이야기에서 어떤 사건들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게 될 지는 아직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오래 무대를 준비한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기대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장르 소설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디에 밑줄을 긋고 깊이 들여다보거나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감각적이고 감상적인 표현도 작품의 분위기를 위함인지 자제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한 곳, 밑줄 그은 부분을 여기에 적어두고자 한다.


 

 59쪽

희생물의 신비함. 그의 사고방식에서 뭔가가 변했다. 그는 눈 내리는 하늘 아래 총으로 오리를 사냥했고, 자신의 사격술을 자랑스레 여겼다. 하지만 그 마음 아래에는 잡을 수는 있으나 담을 수는 어떤 감정이 있었다. 총에 맞아 떨어지는 모든 새들은 지도에도 실리지 않은 땅의 돌들을 모래주머니에 품고 있었다.

 


 분명히 '이거다'하는 어떤 것을 떠올린 것은 아니지만 이 총에 맞아 떨어지는 모든 새들이 품고 있는 '지도에도 실리지 않은 땅의 돌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초에 이 희생물은 무엇을 위한 희생물인가? 그는 사냥을 했다. 고래를 잡았고, 바다표범을 때려잡았으며, 새를 총으로 쐈다. 그리고 그 희생물들의 죽어가는 눈에서 꺼져가는 희미한 그 무엇을 발견한다. 

 인간은 인간이 가장 위대한 동물이라는 확신 속에 산다. 마치 자연의 모든 생물들은 인간을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 이런 생각은 동물과 인간을 넘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계속 된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사냥한 새의 모래주머니에 든 돌은 지금까지 인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어떤 미지의 땅에서 왔을지도 모를 일이며, 인간이 확신하는 신이나 구원, 천국의 존재 역시 불확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 것이라며 뽐내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이제 시작됐을 뿐이다. 아직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어떤 결말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 무엇하나 알려주고 있지 않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바로 다음 이야기를 읽는 것.


다음 이야기에서 조지와 아서의 어떤 이야기가 기다릴지, 기대하며 시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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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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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 콜필드는 열여섯 살 난 고등학생이다. 이제 곧 퇴학당할 것이기에 '퇴학 예정 고등학생'이지만 말이다. 홀든 콜필드는 몹시도 지루해 하고 있다. 아니다. 정확히는 외로워하고 있고 슬퍼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친구들은 하나 같이 영화관으로 몰려가거나 시시하고 '연극같은' 연극에서 받은 얘기들을 나누는데 열중할 뿐이다. 좋은 대학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게 되기를 꿈꾸는 시시껄렁한 얘기들 말이다. 

 홀든 콜필드가 지루함이나 슬픔 혹은 외로움의 크기를 표현하는 방법은 독특하다. 상황이나 느낌을 무척 과장해서 말하는 거다. 번번히 '목이 부러질 뻔'하거나 몇 번이나 몇 십 번일 것을 수백 수천 배로 부풀리는 식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고통'만큼은 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룸메이트인 스트라드레이터에게 윗입술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그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스스로를 '강인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벨보이에게 배를 얻어 맞았을 때도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싶을 정도의 통증이었음에도 그 이상의 묘사를 하지는 않는 거다. 


 '거침' 혹은 '강인함'을 꿈꾸는 사춘기 특유의 허세인지 아니면 고통 혹은 통증과 마주하기를 꺼려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 근원은 불분명하다. 다만 정말 사랑했던 여동생 앨리가 일찍 죽었던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볼 뿐이다. 홀든 콜필드는 이야기나눌 사람을 찾아 뉴욕을 헤메고 다닌다. 죽어라 담배를 피워대고, 술을 마시고, 누군가 적당한 사람에게 연락을 시도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거나 만나더라도 여전히 외로움에 시달린다. 홀든 콜필드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말을 할 사람을 찾는 것'인 셈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생각해주지 않는다. 저마다의 일로 바쁘고 분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이 대표적인 성장소설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홀든 콜필드는 여전히 홀든 콜필드고 극적인 화해나, 반전도 없이 그저 '흘러가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못하고 헤메다닌 덕에 결국 병을 얻었다는 식으로 퇴학 사실에 대한 어떤 처벌이나 곤란 없이 다시 집으로, 가족 안으로 들어갔다는 식의 이야기처럼 읽힌 거다. 하지만 내내 앨리만을 가장 좋아하던 홀든 콜필드가 여동생 피비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돌림과 동시에 자신이 있을 곳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과정에서 깨닫게 됐다.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단 한 사람, 작고 약한 여자 아이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자기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다만 그런 한사람조차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고, 그래서 방황이 그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게 아닌가 한다. 

 모든 숫자와 가능성, 상황과 위험을 과장하기 좋아하는 열여섯 소년 콜필드는 자기 스스로를 잘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번번이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충동적으로 해버리고는 후회하기를 반복한다.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앞으로는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장담도 없다. 어쩌면 정신분석을 좀 더 일찍 받아서 치료를 받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정신분석을 받고 그 치료를 통해 좋아졌다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를 낫게 하는 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 존재의 힘이다. 


 콜든 홀필드의 바람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낭떠러지인 줄도 모르고 달려가는 아이들을 붙들어주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인 거다. 종종 그렇듯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주고 싶어하거나 해주기 마련이다. 홀든 콜필드가 가장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거다. 자신을 붙들어줄 사람, 외로움과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간절했던 거다. 그토록 사랑스럽던 여동생 앨리를 잃은 상처도 아직 다 치유되지 않았었다. 앨리가 죽던 날 차고의 유리창을 주먹으로 부수는 바람에 입은 상처로 주먹을 쥘 수도 없게 된 오른손처럼 겉으로는 나은 것처럼 보여도 이미 엉망으로 망가져 있던 거였다. 키가 크고, 머리가 세었어도 그것으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마음이 자란 다음인 거다. 마음이 어린아이여서는 언제까지고 어른이 될 수 없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마찬가지다. 그런 '행위'가 성장이나 성숙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로 그런 행위에 의존하는 건 불안이나 부족을 드러내는 행동인 거다. 불안하고 초조하기에 의존적인 행동을 더 자주, 더 심하게 하는 것으로 진실을 가리려는 시도를 거듭하는 거다.


 이 이야기의 다음에 홀든 콜필드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었을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 내게는 그저 입버릇 나쁘고 무진장 담배를 피우는데다, 술까지 마셔대는 키가 크고 센 머리가 많은 불량한 고등학생이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훌륭한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다. 작고 어리지만 훌륭한 파수꾼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파수꾼이 한 사람씩은 붙어다녔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외로움과 슬픔이 조금은 덜어질텐데 말이다.

그렇게 슬픔과 외로움이 덜어지면 길가다 코나 입으로 흘러드는 담배연기에 불쾌해 하는 일도 줄어들테고, 술 주정으로 일어나는 불상사도 적어질텐데. 

 우스갯소리다. 그래도, 그런 파수꾼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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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2 - 7년 후 다시 만난 쉴라와 헤이든, 그리고...
토리 헤이든 지음, 이수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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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는 학업을 마치고 나서 다시 쉴라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쉴라와 헤어진 지 7년이 지난 후 어느날, 쉴라와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재회한 쉴라는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도, 상상하던 모습도 아닌 시시껄렁한 펑크 스타일의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저 한 아이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토리는 자신이 그토록 애썼던 시간이 쉴라의 무엇도 바꾸지 못했음을 알고 실망하게 되고, 자꾸만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니 화가 날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은 다시 충돌하기 시작한다. 

 쉴라의 아빠는 여전히 알콜중독과 마약중독으로 교도소와 병원을 오갔고, 7 년이라는 시간동안 쉴라는 10곳 정도나 되는 가정을 옮겨다니며 위탁 양육을 받거나 어린이집에서 생활을 했다. 위탁 가정에서 강간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늘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외면당한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탓에 하나의 지식을 전달받았을 때 너무 많은 경우를 떠올리게 되어 그 지식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검증하고 확인하려 했기에 선생님들에게도 방해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토리가 재회하던 때의 쉴라의 상황이다. 여섯 살 때 삼촌 제리가 저지른 사건으로 쉴라는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어 있었으며 남자에 대한 극도의 경계와 사랑에 대한 불신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신기한 건 그토록 간절히 생각하던 엄마와 동생조차 거의 잊어버렸다는 점이다. 내부의 방어회로의 작동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안타깝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쉴라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거였다. 마약이나 술에 찌든 생활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저 고독하게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거다.


 토리는 이런 쉴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점이 바로 그러한 점이다. 토리는 쉴라가 아직도 여섯 살 때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자신이 지켜주고 보호해줘야 하며 가르치고 고쳐줘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는 거다. 아이의 생각이나, 기억, 성향을 모두 부정하다시피 하는데 그걸 쉴라가 받아들일 리 없다. 

 토리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주려 하지만 쉴라가 살아온 시간은 그런 모습, 그런 삶이 꿈만 같다고 느끼게 했을 거다. 결국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이 책이 쉴라에게든, 쉴라보다 덜하거나 더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됐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불안해 하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쉴라와 토리가 화해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얼핏보면 토리의 시도가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불로 태워 죽일 뻔한 문제아.

 지능이 보통 이상보다 높지만 불완전한 아이.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없고 불신으로 가득한 아이.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채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려고만 하는 아이.

 폭력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만 자신의 욕구와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

쉴라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토리는 그런 아이를 '길들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야생의 여우를 길들인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쉴라는 자신을 여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미라고 여긴다고 말한다. 특별하고 싶었던 거였을 거다.

쉴라는 단지 그 특별함을 실감하고 싶었을 뿐이었을 거다. 


 세상의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오거나, 자신이 죽겠다는 말에 놀라 전화를 하거나, 화를 내고 투정을 부리고, 심술궂게 굴어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 믿고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간절히 찾던 엄마가 그런 존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엄마는 찾을 수 없었고, 엄마를 대신해 토리 선생님이 엄마와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리는 그저 '선생님'일 뿐이었다. 쉴라는 어렸을 때도 조금 더 나이들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다. 그래서 시험하고 화를 내고 다시 시험하기를 거듭했던 것이리라.


 이 책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쓰여지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한 아이 1>도 그렇다. 제프의 말이 옳다. 토리의 병원 동료였던 제프는 "기억이란 건 언제나 경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두 이야기는 토리의 해석을 거친 쉴라의 이야기지 쉴라의 이야기는 될 수 없는 거다. 그렇기에 쉴라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의 자기가 곧 자기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쉴라가 과거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또 받아들이고 난 후에 다시 이 책을 보거나, 누군가 이 책의 이야기를 하는 일을 경험한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쉴라에게 들이닥쳐서는 쉽게 물러가지 않았던 불행한 삶, 두려웠던 시간이 순간순간 되살아나지는 않을까? 나는 이런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토리 헤이든은 분명 뛰어난 선생님이다. 열정도, 용기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아이가 보통의 아이와는 다른 특수한 아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교육을 '가르치거나', '부여하거나', '고치거나', '바로잡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는듯 하다. 하지만 진짜 교육은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이 바라는 것, 바라지 않는 것을 찾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 교육이 아닐까. 

마음을 닦는 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마음이 흐려지지 않도록 늘 말끔히 닦아내는 일이 교육이 아닐까 하는 말이다.

 아이들은 점점 더 똑똑해져 간다. 그러면 마음도 점점 더 맑아져 가는 걸까? 아무래도 나는 그걸 확신할 수가 없다. 

아이들 안에서 아이들을 발견해주는 교육이 실현되기는 분명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다면 아이들은 자기 말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배우게 될까.

 자기가 아닌 것을 깨닫고 알아가면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걸까? 

아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렇듯 진짜 교육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주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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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1 -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 한 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이희재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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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적은 거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토리 헤이든은 특수아동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토리는 7명의 아이들을 받아 이민자 출신의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전문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안톤을 보조교사로 두고 중학생인 휘트니를 도우미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학기 초의 혼란이 잠잠해지고 아이들도 학교 생활에 익숙해져갈 무렵 토리는 또 하나의 아이가 그 반에 들어오게 될 거라는 사실을 전달 받는다. 토리는 지금 '다루고'있는 아이들도 힘에 부친다며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담당관인 에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결국 1월 어느날 한 아이를 교실로 데리고 온다. 

 그 한 아이의 이름은 '쉴라'로 최근에 세살 난 아이를 데리고 나가 불을 질러 죽일 뻔 한 이력을 가진 '정신 나간' 아이였다. 쉴라는 이 반에 임시로 맡겨진 것으로 주립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만 머무르기로 한다. 첫날부터 토리와 쉴라는 부딪히기 시작해 충돌은 갈수록 심해져 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토리와 쉴라의 사이가 나아지는 것처럼 보여지고, 쉴라가 실제로는 아이큐가 180이 넘는 천재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하지만, 쉴라의 뛰어난 지능은 그 아이의 과거와 맞물려 최악의 결과들을 내놓기도 한다. 쉴라는 친엄마가 도로에 버리고 간 아이였다. 그 바람에 다리가 부러져서 흉터가 남았다. 또 쉴라의 아빠는 알콜중독자에 마약중독자이기도 했다. 더 최악인 것은 쉴라의 삼촌인 제리가 여섯 살인 쉴라를 강간하려고 하다 잘 되지 않자 칼로 쉴라의 성기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는 거다. 

 이 만신창이인 아이가 맡겨진 게 토리 헤이든의 반이었다. 도대체 신이 있다면, 이 아이에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음울한 이야기다. 

 한 아이의 마음이 매 순간 찢어지고 찢기고 갈라지고 부서져 그 통증이 내게 옮아오는 듯했다. 더 놀라운 건 이 아이의 강인함이었다. 아니다. 그것은 강인함이 아니라 무지였는지도 모른다. 쉴라는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인 줄 알았으리라.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고 이상하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엄마가 자신은 버리고 남동생만 데리고 간 것도 자기가 잘못해서라고, 자기가 미워서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세상에 유일한 의지처가 늘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해 툭하면 자신을 벌주고 때리는 아빠라고 해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쉴라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리고 쉴라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죽음을 떠올리기조차 너무 어린 아이에게 부당한 대우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건 오히려 가혹한 처사다. 설사 떠난다 해도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는 아이가 누구와 함께, 누구의 곁에서 행복을 꿈꿀 수 있었겠는가.


 토리 헤이든은 20대 중반 혹은 후반 쯤 된 특수교사다. 학교에서 교수들이 가르치던 전통적 방식을 떠나 아이들에게 몰입해서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이 치료와 교육에 효과를 더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중산층 출신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사람이며, 채드라는 변호사와 사귀고 있고 특수교사로서 일하는 데에 커다란 만족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은 잘 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이 이야기에는 토리의 남자 친구들 이야기는 나오지만 가족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물론 필요 없었기에 적지 않았을 수 있지만, 쉴라에게 향하는 집착에 가까운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이야기는 쉴라가 토리의 반으로 온 1월부터 학기가 끝나는 6월까지의 5개월 동안에 있던 일들이다. 쉴라는 끊임 없이 반항하고, 일을 꾸미고, 토리를 시험하려 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마음이 열리고 마지막에는 거의 완전히 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쉴라는 토리가 읽어준 생택쥐 페리의 <어린왕자> 속의 여우와 어린왕자 이야기에 매료된다. 그러면서 '토리 선생님이 자기를 길들'였기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토리 역시 쉴라가 자기를 길들였으니 책임이 있다는 말로 되받는다. 

 학기가 끝나고도 쉴라는 토리의 반에 남기를 바라지만 학기가 끝나면서 그 반은 해체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토리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더 할 계획도 세워두었다. 처음에 쉴라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를 기만'했다며 소리지르고 화를 낸다. 토리 선생님이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나 다름 없다며 비난하는 거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여섯 살, 고작 여섯 살이다.

여섯 살 난 아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말로 설득하거나 이해시킬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규칙을 앞세워 무엇을 하게 만들거나, 체벌로 겁을 주어 하지 못하게 하는 게 효과가 있을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보지도 않고,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묻지도 않으면서 아이와의 관계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잠꼬대가 또 있을까?

아이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덩달아 함께 화를 낸다면 그 아이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 외에 무엇이 찾아들겠는가?


 토리 헤이든은 물론 헌신적이고 훌륭한 교사다. 집념도 강하고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도 깊다. 하지만 토리는 위에 늘어놓은 물음들에 얽힌 실수를 거듭하고 반복한다. 


 마시멜로 테스트라는 게 있다.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주고 이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더 많은 걸 주겠다고 했을 때 기다린 아이들이 기다리지 않은 아이들보다 성장했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아이의 자기 통제와 인내력을 측정하는 실험에 그치는 게 아니다. 만약 아이가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렸음에도 실험 전에 약속한 것을 주지 않았을 때 아이는 오히려 성공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아이는 믿고 참고 기다렸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커다란 상처가 된 거다. 

 마시멜로 실험은 신뢰의 실험이다. 아이에게 한 약속은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토리 헤이든은 번번이 선생님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른다. 그러면서 '아이가 왜 불안해 하는 지 모르겠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도무지 믿게 만들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잘못은 쉴라에게 있지 않았다. 마음을 주고 받았으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쉴라가 "나는 길들여 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거나 "나를 믿으라고 한 적 없다."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토리는 쉴라에게 충분한 믿음을 줬다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자기만의 착각이었고, 자기 만족에 불과했다. 아이에게는 한 없이 부족했다. 그 마음을 토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마음을 쏟지 않고 규칙 안에서의 교육만을 행한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불러올 지도 모를 행동이라는 거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공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순탄한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토리가 그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삶을 살아온 쉴라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자연스럽다. 거기에는 화를 낼 여지도, 슬퍼할 이유도 없다. 


 이 책이 여러 나라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하지만 이 책 속 이야기만으로는 무엇 하나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많은 게 불만이었다. 그저 그런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어 나가려고 애쓰는 쉴라의 모습만이 감동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었다. 마음을 줄수록 아픈 상황, 길들여질수록 버려질 미래가 확실해져간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이 영특한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황량했을까.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거며 아프고 두려웠을까. 

"다 괜찮을 거다"라고 아무 것도 모르고 위로하는 사랑하는 선생님을 보며 몇 날 며칠을 울었을까.


 아동교육의 권위자들이 이 책을 극찬했을 광경을 떠올리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당사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쉴라를 조금이라도 부러워했을까? 쉴라가 토리를 만나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을까? 

 오래 전 "태양이 없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내 말에 한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이미 늦었어. 태양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잖아."


 토리를 만나기 전의 쉴라는 어둠 속에 있었다. 거기에는 빛도 온기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럽고 불결했으며 가혹한 생활을 하고 있어도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는 못했으리라. 하지만 토리를 만나는 순간 빛을 알아버렸다. 이후 쉴라의 삶은 밝아졌을 거고, 자기 주변이 더는 가릴 수도 없을만큼 추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매순간 받아들여야만 했으리라.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이런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지 토리 헤이든 선생님이 생각이나 해봤을지 알 수 없다. 쉴라는 집으로 돌아갔고, 토리는 떠났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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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생각은 많아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는 아무래도 거북한 게 인지상정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에게는 '삶이 전부'이고, '죽음은 전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거다. 

저자 역시 죽음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더 나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인간답게 살기를 원한다. 이러한 바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지속되는 변하지 않는다. 대체로 변덕스럽기 마련인 사람의 바람이 한결 같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게 된다.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큰 마음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드러내지 않는 이 암묵적인 바람은 바로 인간답게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젊음을 깎아 노년의 창고를 채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젊음이 지나간 후의 삶도 만족스러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거다. 

우리는 죽음에 '이어간다'는 표현을 달지 않는다. 이어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삶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거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가 온통 삶을 향하는 그 이유 말이다.





 이 책은 모두 8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5장은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는 노년의 삶의 희극과 비극을 담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엇갈린 삶 가운데 가장 소중했을 시간들에 대한 기록들이 왜 우리가 '좋은 삶'을 희망해야 하는지, 약해질대로 약해진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더 좋은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삶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나머지 3장은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과정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가 보냈던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통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시켜주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피해갈 수 없다면 부딪혀야 하고, 부딪혀 부술 수 없다면 넘어서야만 한다.  

 죽음에 극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적어도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만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해주는 건 더 좋은 삶에 대한 희망이다. 더 좋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을 지 모른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의식을 잃거나, 혼미한 상태로 무균 상태의 병실에서 무수한 선과 호스를 달고, 단지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삶보다는 더 좋은 삶이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할머니가 계신다. 할머니는 70년 넘게 왕성한 활동을 하며, 부지런하고 또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분이다. 6년 전 할머니는 욕실에서 넘어지셨다. 왜 넘어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결과는 무척 좋지 못했다. 뇌에 출혈이 있었고, 오른쪽 반신은 차디차게 변해서 전혀 쓰지 못하게 됐으며, 말조차 할 수 없게 됐다. 

 병원 생활이 시작됐고, 찾아갈 때면 늘 답답한듯 가슴을 치며 눈물지으셨다. 애처로움, 안타까움을 넘어 그건 너무나 비참하고 가혹해 보였다. 할머니는 퇴원해서 집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치료와 투약이 이유였지만 결국 저마다의 사정으로 할머니의 병원 생활이 시작된 거다. 이제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는 여전히 병원 생활을 하고 계신다. 몇 번인가 병원을 옮겼고, 처음과 달리 음식을 거부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속 마음이 어떤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책 속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할머니에게 일어난 일은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_119쪽」


 이 느낌에 조금이라도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갇힌 거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 생활의 명목은 '안전'과 '보호'다. 하지만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건 아무도 없다. 당사자조차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생각해 본 일조차 없는 일이 허다하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분명하다. 


 삶이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노화와 질병의 위협 속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지, 그 순간이 온다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정해둬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술을 하고, 장치를 달고, 진정한 의미의 삶은 누리지도 못한 채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만 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는 것 혹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삶과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받아들일 거다. 그렇다면 '삶'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봐야만 한다. 단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상태를 두고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게 맞다. 하지만 삶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멀게는 뉴스, 영화, 드라마에서 가깝게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수술과 항암 치료가 삶을 어떻게 망치는지 익히 보고 들어왔을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막상 자기의 일이 되었을 때 그런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일인 것마냥 당황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거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두려움이 오래 지속되고 당황과 두려움 속에서 삶의 다음 단계를 선택했을 때의 위험은 어쩌면 치명적일 수 있다.


 저자는 의사다.

저자의 아버지도 의사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환자에게 선고하는 일에는 익숙했을지 몰라도 선고를 받는 일에는 놀라고 당황해했으며 두려워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것, 그것이 죽음의 근원적 속성이기에 두려워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저자가 의사라는 사실을 거듭 적은 이유는 저자가 의학과 의술에 의지해서 삶을 지속시키는 일에 커다란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술과 화학치료, 약물치료가 최선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연구에서 오히려 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게 밝혀졌고, 그렇기에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다. 의학적 치료가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환자에 대한 치료와 의학적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만큼의, 지나치지 않은 의학적 치료와 함께 호스피스 케어와 가족의 관심과 같은 의학 외적인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런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잠꼬대처럼 들릴 지 모른다. 

"그럴 수 있다면 벌써 그렇게 하고 있겠지!"하고 꼬집어 말할 지 모른다. 

나부터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에 더더욱 뜬금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학적인 시술과 치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죽음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찾아드는 것이기에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는 거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직 삶이다. 어떤 삶을 원하는지, 여건과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좋은 삶을 구해아 한다는 것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인 셈이다.


 언제 죽음이 나를 찾을지, 혹은 어느 때 소중한 사람들에게 죽음이 들이닥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생각하려고 애쓸 거다. 무엇이 나의 소중한 사람을 위한 일인지, 그 소중한 사람이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지 함께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거다. 

 

 이 책은 죽음이 개인의 일이지만, 동시에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깨닫게 했다. 삶은 소중하다. 그 소중한 삶을 위해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만이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무가 아닐까.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우리에게 반드시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카르페 디엠

Carpe Diem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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