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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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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농부다운 고집스러움과 체념에 가까운 순응력을 가진 보리같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그 보리가 뿌려진 대지 같은 사람이었으며, 그 대지에서 스토너는 나고 자랐다.
가난한 농부였던 스토너의 부모의 바람은 교육을 통해 더 나은 '농사'를 짓게 되는 거였다. 그래서 아들을 시내의 대학에 보낼 결심을 했고 종자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듯 아들의 학업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스토너의 처음 마음은 부모님의 의지를 이어 농업에 대해 배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나 배움을 계속하는 동안 저절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보리가 뿌려진 땅에서는 보리가 나고, 콩이 뿌려진 땅에서는 콩이 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인 동시에 어느 땅에든 뿌린 적 없는 잡초가 무수히 돋아나는 것과 같은 거였다.
스토너의 부모에게 스토너의 결심은 잡초나 다름 없는 의외의, 예상 밖의 결과였겠으나 스토너에게는 자신이 심은 씨앗을 키워나가는 당연한 결과였다는 거다.
스토너는 대학에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는다. 친구들이 전장으로 나갈 때 그는 대학에 머물 것을 결심하고, 제자들이 전장으로 나갈 때도 고요하게 자리를 지킨다.
겉으로 드러나는 스토너의 삶은 온통 마침표 뿐이다. 어느 곳에도 느낌표와 물음표가 없는 것만 같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그곳에 머물렀고, 그런 생활을 했으며, 받아들이고 수용하는데 익숙했고, 거절하거나 항의하려는 적극성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으며, 해야할 말을 했고, 해야 할 것을 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는 '정직'했다.
지나치게 정직해서 자신의 갈등과 괴로움을 감추지도 못했고, 열정 또한 숨기지 못했다. 그는 표가 나는 사람이었다. 조용한, 고요한, 보이지 않는 표지를 품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상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고요해 보이는 바다라고 해도 수면 아래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 치는 무수한 해류를 품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너무나 조용히 마음으로 파고 드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스토너 역시 농부의 아들이었다. 농부의 아들이라는 것, 땅을 일구고 그 땅이 내놓는 소출로 삶을 꾸려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 하나의 뚜렷한 성향을 남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것을 '수용'이라고 적으려고 한다. 농부는 자연이 주는 은총을 먹고 산다. 한 계절, 한 달, 한 주, 때로는 단 하루의 한 시간이 한 해의 소출을 결정짓는 게 농부의 삶이다. 어떤 의미에서 농부는 기도와 소망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 어떤 사람보다 육체적인 노동에 익숙한 동시에 영적인 삶을 사는 게 농부의 삶이라는 거다.
시기에 맞춰 땅을 일구고, 종자를 뿌리며, 자연이 주는 해와 비와 바람을 읽고, 받고, 넘는다. 인간의 할 도리를 다하고 자연의 은혜를 기다리는 최선의 삶. 그것이 농부의 삶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농부의 삶을 여전히 동경한다. 아마도 그런 동경으로 인해 더 이상하게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토너는 대학에서 한 해를 보내고 난 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은 농부의 길이 아닌 학자의 길임을 깨닫는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깨달아졌다는 게 중요하다. 대학에 남기로 한 결정 이후로 몇 번인가의 결정적인 삶의 갈림길에 섰을 때도 스토너는 저절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깨닫는다. 마치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며 비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통이든 기쁨이든 고난이든지를 넘어선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의 이후의 삶에 여실히 새겨진다. 마치 농부의 노력에 따라 작물의 생장이 달라지는 것처럼, 자연의 의지에 따라 그 해의 소출이 결정되는 것처럼 뚜렷이 나타나는 거다.
스토너의 삶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 자연스러움, 그 격렬함과 고통스러움이 내 것이었으면하고 바랐다.
스토너는 결코 소심하거나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삶에 머뭇거림이 없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될 거다. 행복한 삶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삶이어도 괜찮다고 느낄만한 삶이었다는 거다.
<스토너>를 읽으며 두 번쯤 숨을 몰아쉬며 나를 돌아봐야 했던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스토너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농부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스토너의 죽음도 닮아있으며, 나의 아버지나 나의 죽음 역시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 번은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고 깨닫게 된 순간이 있었다. 어디쯤을 읽던 중이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때의 기분만큼은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
낯익은 나와 낯선 나를 동시에 마주한 느낌이었다.
'혼자인 나'와 '그리워하는 나'는 이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언제나 나였던 존재였다.
스토너는 꿈꾸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꿈을 꾸고 있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언뜻 그의 삶에 격렬함이 없어 보이는 이유 역시 그것이 꿈같기 때문일거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단조롭고 절제된 삶, 지루하고 따분할 것 같은 삶, 고요하고 침잠해있을 것 같은 그의 삶이 그토록 격렬했다는 것을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식물은 바람이 불때나 흔들리고, 비가 올 때나 춤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생물보다 격렬한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다. 동물보다 수십, 수백 배 빨리 자라고, 자기만의 영역을 가지며, 어느 시기에든 자기만의 결실을 세상에 내놓는다.
스토너는 식물같은 삶을 살았다. 내가 바라는 삶과 닮은 그런 삶을.
드러나지 않는 격렬함을 양분으로 삼아 내면의 기관을 쉴새 없이 돌려 나아가는,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자연을 닮은 공장같은 삶을 살았다. 이야기 속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에게는 그를 알아주는 '존재'가 있었고, 그를 빛나게 하는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인생을 바칠만한 일을 가진 그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면, 달리 어떤 삶을 동경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 읽고 났을 때, 조금은 어리둥절해졌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횡설수설에 혼란을 더한 이유 역시 그 어리둥절함이 지금까지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왜 그토록 매력적이었는지, 매료시키고 몰입시켰는지 사실 그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앞서 뭐라고 적었든 그저 그의 삶이 타인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는 것 밖에는 달리 깨달아지는 바가 없다.
고요하지만 누구보다 격렬한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초상.
대지에 뿌리내린 한 해 살이 식물처럼 격렬한 열정으로 삶을 소모하는 한 인간의 표상.
그 자연스러움과 미련함과 고집스러움과 무의미함이 몹시도 애처로워 잊히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