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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평점 :
제목을 보고서 혈흔이 낭자하는 그런 복수를 상상했던 분 손!
근데 제목과는 살짝 다르게 표지에는 복수니 혈흔이니 그런 느낌이 전혀 안들고 하얀 눈이 조용히 내려앉은 소나무와 에도시대를 나타내는 건물이 고급스럽고 아름답고 처연하기도 하면서 따뜻함이 느껴지는..이 책 뭔가 있겠구나 싶었다.
배경은 에도 시대의 정월 그믐날. 눈이 내리는 밤 모리타 극장 뒷길..
화려한 후리소대를 입고 종이 우산을 쓴 여인이 서있고 도박꾼인 사쿠베에가 지나는 길에 아가씨를 보고 수작을 걸려는 찰나. 우산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후리소데를 벗어던지는 아가씨는 아가씨가 아닌 열대여섯의 미소년.
"나는 이노 세이자에몬의 아들 기쿠노스케. 그대 사쿠베에는 내 아버지의 원수. 여기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
라며 복수극이 시작되고 시뻘건 피가 흰 눈위로 튀면서 기쿠노스케의 흰옷도 붉게 물들며 사쿠베에의 잘라진 머리를 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진 기쿠노스케.
이렇게 '고비키초의 복수'가 막을 내리고..
이 복수극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찾아온 기쿠노스케의 절친이 목격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첫 목격자로 문전 게이샤 잇파치를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하던 에도시대의 분위기와 극장.기루.유녀 등의 설명을 자세히 들을수 있었던것 같다.
무사가문이었지만 세상의 부조리함에 뛰쳐나와 무술 연기 배우가 된 요사부로.
화장터지기였던 여장배우 호타루.
목각 직인 규조와 그의 아내 오요네.
상급 무사 가문 출신이지만 각본가가 된 긴지.
이렇게 다섯 목격자들의 목격담과 그들의 인생이야기 그리고 그들과 기쿠노스케의 관계..
책을 읽어가면서 복수는 처음 몇장에서 다뤄졌을뿐이고..극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생과 빈부격차 신분차이 나이 그런것과는 상관없는..그저 인간대 인간으로써 삶에서의 '정'.
그런 이야기들이구나 싶었는데..
마지막에 드러난 반전. 읽다보면 자연스레 다들 짐작하게 될 반전이긴 하지만..
'언제 알아차리든 이 소설의 반전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책 소개글이 정확히 와닿은 반전이었다.
고비키초의 복수라는 연극을 한편 본듯한 느낌의 책
"도망쳐도 괜찮은데."
하고 보리차를 홀짝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복수라는 원대한 뜻을 세운 어린 무사를 상대로 저와 비슷하다는 소리를 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입니다만. 도리와 가문에 얽매인 모습이 딱해 보여서요. 물러설 수 없는 사정이란,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그렇게 정하는 것입니다. 길을 벗어나도 의외로 다부지게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지요.
p.067
"나를 키워준 화장터지기 할아버지가 그랬어. 누구나 결국은 불타서 뼈만 남는 법이라고. 무사니까 어찌해야 한다. 사내니까 어찌해야 한다, 그런 쓸데없는 의무감은 버려도돼. 어차피 결국은 뼈만 남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p.183~184
"복 받았다는 것은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일세. 하지만 그래서는 살아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아. 하릴없이 공허해지지. 복에 겨운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더는 못 견딜 것 같은 때가 있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 느끼는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싫어.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늘 생각 한다네."
p.267
그렇게 기쿠노스케를 보고 있자니, 문전 게이샤 잇파치뿐만이 아니더군. 무술 연기 담당 요사부로며, 의상방의 호타루며, 소도구 담당 규조 부부까지도 기쿠노스케 씨, 기쿠노스케 씨, 하며 그 녀석을 아꼈어. 나도 포함해 이 악처에 모여드는 자들은 모두 세상의 섭리라는 놈에게 버림받아, 튕겨 나가고 구르던 끝에 여기에 당도한 인간들이야. 그런데도 아직 무사의 섭리를 내려놓지 못하고 복수를 맹세한 녀석에게 어째선지 마음이 끌리더라 그 말일세.
p.294~295
그 마음에는 무사고 평민이고 없어. 있는 것은 정뿐이야.
p.295
홀로 에도에 가서 깨달은 점 중 하나는, 때때로 남을 믿고 의지할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이야. 뭐든지 혼자 짊어지겠다는 마음가짐은 대견하지만,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래서 나도 이 사람을 믿고 이야기해 보기로 마음먹었어.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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