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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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정말 눈물 콧물 다 흘리다가 히히 낄낄 웃다가 누가 보면 흡사 미친 사람처럼 읽었던 기억이 있다. 색다르고 좋은 경험이어서 이후 작가 님 작품을 찾아서 귀하게 재미있게 읽어왔는데 드디어, 반갑게도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

제목부터 소개글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골 마을에 레지가 이사왔다로 시작하는 소개글을 보고 나도 처음에는 당연하게 다방 레지인줄 알았다.(이렇게 레즈비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나는 작품이 있었나?)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너무 흥미진진 재미있고 몰입되어 끊을 수 없고 덮을 수 없기 때문에 이동수단이나 짧은 짜투리 시간에 읽으려고 펼치는 건 절대 말리고 싶다. 나도 우연히 지하철에서 펼쳤다가 끊고 싶지가 않고 잠깐이라도 책을 덮고 싶지 않아 식겁했기 때문이다.(아니, 길에서 걸으면서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출판사 소개글에서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수평마을 한가운데로 단숨에 끌고 들어간다. 오전 여덟시 반, 마을회관에 긴급 소집된 노인들 앞에서 자칭 지식인이자 마을의 실세인 윤 선생이 비장하게 폭로한 중대 사건은 서울에서 귀촌한 두 젊은 여성 성진과 혜진, 일명 찌니들여자끼리 좋아하는” ‘레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촌로들이 아는 레지는 레즈비언이 아니라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을 일컫던 옛말. “새 레지가 왔으먼 나가 모를 리가 없제라는 여든일곱 한씨의 호언장담에 엄숙했던 회의는 순식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말의 뜻을 겨우 알아들은 뒤에도 절골댁은 태연하게 묻는다. “좋응게 항꾼에 살겄지라. 싫으먼 암만 같은 여자라도 항꾼에 살겄소?” 진짜 갈등은 이제부터다. 여자끼리 함께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뿌리 깊은 믿음 앞에서 찌니들은 졸지에 해괴하고 위험한 존재가 된다. 윤 선생은 마귀 새끼를 당장 쫓아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세상의 날 선 시선을 피해 수평마을까지 흘러온 찌니들은 다시 문을 걸어 잠근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찌니들은 그들의 폭력적인 무례함을 견딜 수 없다. 고요하던 수평마을에는 마침내 일촉즉발의 찌니주의보가 발령된다. 이후 펼쳐지는 대환장 파티들..

하지만 윤 선생의 계획은 좀처럼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장의 베트남인 아내 쑤언이 찌니들을 몰아내려는 마을 사람들 앞을 가로막는다. 이십년 전 낯선 땅으로 시집와 이방인으로 살아온 쑤언에게 찌니들의 처지는 남의 일이 아니다.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 머슬 워쨌다고 지랄옘벵을 떨어싼대?”

수평마을 누구보다 거침없는 언변을 자랑하는 쑤언의 등장은 이야기에 예측 불허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찌니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완고한 시선보다 촌로들의 모순된 행동이다. 내쫓아야 한다고 수군거리면서도 찌니들의 집 문고리에 시래깃국과 가지나물을 슬며시 걸어두고, 낯 뜨거운 질문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고는 돌아서다 말고 갓 부친 호박전을 손에 쥐여준다. 자신들을 미워하는 것인지 아끼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혀놓고 음식을 먹이는기묘한 이웃들 앞에서 찌니들이 굳게 믿어온 선과 악, 예의와 무례의 경계도 조금씩 흔들린다. 여기에 찌니들의 서울 친구 기희가 반려 닭 삐돌이와 삐순이를 데리고 나타나면서 마을은 또 한번 발칵 뒤집힌다. 닭을 자식처럼 유모차에 태우는 도시 여성과 평생 닭을 가축 이외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 없는 노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소동은 폭소를 자아내는 동시에,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얼마나 엉뚱한 방식으로 뒤섞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처음 펼치면서 윤 선생과 이웃들의 무례함과 편견에 화가 났는데 볼수록 한 명, 한 명 사연들이 보통이 아니다. 누구나 비밀이 있고 사연이 있고, 조금씩은 나쁘고 이상한 이 마을, 아니 이 세상에서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서로 얽히며 기묘한 나눔과 도움, 무례를 주고 받는 당황스러운 전개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예전 해학과 풍자극을 보는 듯 하다. 작가 님은 참 생활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해학적으로 잘 풀어내신다. 물론, 그래도 막말과 무례함 등으로 끝까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어디서 보아왔고 경험했기에 그런 사람들의 무례함이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인생이 그렇잖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무례하고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겪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러면서 위안을 받고 서로 도움도 주고 받는 게 인생이었지.

 

이 작품에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넘쳐난다. 단연코 제일 멋있는 쑤언(이장의 부인이자 베트남 이주여성인데 이렇게 멋진 캐릭터라니, 그녀의 시어머니가 더욱 고맙다.), 작품에 갈등과 다양한 흥미를 주는 윤 선생(정말 안 만나고 싶은 캐릭터지만 이웃, 사회 속에 꼭 있는 캐릭터), 대환장 웃음과 폭소를 담당하는 닭에 미친 기희 등을 비롯하여 여기에 나열하지 못 한 캐릭터들이 하나하나 너무 재미있다.

 

퀴어와 이주, 노년과 가족, 돌봄과 공동체라는 오늘의 문제가 생생하게 담겨 있고, 그렇다고 아름답게 완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주지도 않지만, 흉을 보고 다투면서도 누군가 아프면 밥을 챙기고, 미운 이웃이 위험에 빠지면 먼저 손을 내미는 구체적인 시간이 있는 오래된 마을의 정겨움과 새로운 관계가 얽혀서 참 유쾌하고 행복한 읽기의 시간이었다.

 

... 큰 일이다. 작가님 어떡해요...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고요.

물이 오르셨다는데(황석영 선생님 추천평에서 감히 가져다 씁니다.).. 다음은 더 좋아지는 거죠?^^

 

건강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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