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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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이다.

로봇, 외계인, 식물인간(?), 곰팡이 세상, 이끼... 그런 이들이 가장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그려냈던 작가님.

뭔가 미래 과학 SF 소설인데 서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인가 보다.

이번에는 좀비다.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다른 종말보다 더 끔찍한 이유가 뭔줄 알아? ()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야 해.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시체가 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해. 이게 가장 끔찍한 종말이야.“ _ 1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종말은 좀비다.” 천선란은 이 문장으로 3부작의 문을 열며, 좀비를 익숙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잊힘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붙드는 존재로 그려낸다. 그가 말하는 좀비의 비극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서도 폭력과 상실, 병과 장애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잊어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천선란은 그 상처를 지닌 자들을 좀비로 불러낸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부터 폐허를 살아온 그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기억을 붙든다. 어떻게든 해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게 천선란의 좀비는 잊혀가는 세계 속에서도 잊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몸짓을 보여준다.

 

1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는 좀비가 되어도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마음, ‘너를 살려야 나도 살 수 있다3부작의 핵심 정서를 여는 출발점이 된다. 인류가 아직 재앙을 예감하기도 전에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향해 출항한 이주선을 배경으로, 동면에서 깨어난 옥주는 지구에서 감염 사태가 일어나 문명이 붕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러나 우주선에서도 비극은 되풀이된다. 좀비가 된 동료가 대부분의 선원을 죽였고, 오직 옥주가 사랑하는 묵호만이 죽지 않은 채 좀비가 된 몸으로 남아 있다. 옥주와 묵호는 가정폭력 속에서 자라며 일찍부터 폐허 속을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온 인물들이다. 묵호는 좀비가 된 이후에도 옥주를 물지 않고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 하며, 옥주는 그 마음을 느낀다.

 

당장 죽을 것 같고, 가끔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몸에도 이토록 단단한 뼈가 있구나. 무너지지 않겠구나. 나약하지 않구나.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걸 마음에서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는데 미리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해야지.”

_ 2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중에서

 

2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는 멸망 이후의 지구, 그 잔해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대부분의 인간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거나 좀비가 되었고, 남은 이들은 좀비가 된 가족을 곁에 둔 채 버텨 나간다. ‘제비는 의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엄마를 돌보며, 자신과 엄마를 지켜주던 아버지 비둘기가 사라진 뒤 스스로 가장이 되어 생존해 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리 하나를 잃은 채 딸 노윤과 살아가는 은미를 만난다. 은미는 정신 발달 장애를 가진 노윤을 보살피며 폐허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제비는 그런 은미의 목숨을 구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끝내 마음속에서도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는,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의지를 보여준다.

 

천국은 바라지도 않아. 어디든 저승의 남은 땅에 같이 있게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데.“

_ 3우리를 아십니까중에서

 

3우리를 아십니까는 전 인류가 떠나거나 죽어버린 뒤 오직 좀비와 동식물만 남은 지구에서,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기억과 의식을 지닌 화자가 좀비가 된 아내를 리넨 카트에 싣고 바다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그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동안 아내가 좀비가 되기 직전까지 남긴 녹음을 길잡이 삼아 걸으며, 두 사람이 함께 돌보던 거북이 장풍을 고향인 바다로 돌려보내려 한다. 이 마지막 동행은 도피나 생존의 발버둥이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 발을 들인 존재가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밟는 과정에 가깝다. 화자는 녹음 속 아내의 목소리와 자신의 머릿속에 파편적으로 남은 기억을 통해 아내가 지키고자 했던 인간성을 되새기며, 살아 있음이란 맥박이나 온도가 아니라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야말로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유일한 힘임을 이해하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서 죽였다. 살길 바라면서도 내 안에서 내가 죽여버린 사람.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 살아 있음을 너무 힘겹게 증명해야 하는 사람.”

_ 작가의 말중에서

 

재미라는 말보다 이 작품은 슬프다.

처음 읽을 때는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이야기인지 감을 잡지 못 해서 몇 번을 앞으로 보면서 다시 읽었다.

내가 집중력이 떨어져서이겠지.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쉽지 않네.

아름답고 강인한 좀비 이야기를 이번에 쓰셨으니 이제 유쾌하고 가녀린 좀비 이야기를 한 번 더 쓰신다고 하니 기다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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