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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ㅣ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성해나 님을 ‘두고 온 여름’에서 만나 ‘혼모노’로 빠져들었고 ‘빛을 걷으면 빛’에서 사랑하게 되었다.
요즘 위픽 시리즈에 꽂혀 찾아 읽고 있는데 이번에는 심지어 성해나 님 작품이다.
한마디로 우선 말하자면 너~~~무 좋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만큼...
옛것에 대한 사랑과 건축에 깊은 조예가 느껴지는 작가 님의 글. 이렇게 어울리는 주제라니...
건축학도인 재서는 이번 대학교 문교수님 서머스쿨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문 교수는 캐드와 스케치업 같은 3D 프로그램이 일반화된 시대에 80~90년대에나 유행하던 연필 제도를 고집하는 사람이다. 한 학기 내내 등고선만 그린 재서는 뜻밖에도 이 수업에서 A플러스를 받는다. 최고점을 받고도 성적 이의서를 낼 만큼 자기 의심이 많고, 확신도 부족한 재서와는 달리 이본은 무엇이든 똑 부러지게 해내는 우등생이다.
누군가의 숙제인 재서와 모두의 귀감 이본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의 과제는 경주의 이백 년 된 낡은 고택을 수리 보수하는 일.
두 번의 지진을 겪으며 무너졌던 지붕과 비효율적인 동선, 기둥과 보를 연결하는 접합부의 실금까지……. 집을 고쳐서 다시 쓰기를 원하는 의뢰인 권정연 씨의 의사와는 달리 두 사람의 의견은 “기둥이랑 보는 무너트리고 주요 구조부를 철근으로 재시공”(66쪽)하는 것, ‘재건’으로 기운다. 문 교수는 실측과 연필 제도를 권유했지만 시간에 쫓긴 재서와 이본은 고택의 기존 도면을 참고해 캐드로 옮긴 결과를 제출한다. 문 교수의 싸늘한 비판을 받고 그제야 고택이 놓인 풍경, 경주라는 도시를 찬찬히 둘러본다.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경주라는 도시를 이해하게 된다. 소설은 한 채의 집을 지어 올리듯 꼼꼼하고 빈틈 없는 문장들로 ‘잠깐 들렀다 가는 손님’인 재서와 이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운명처럼 살아가는 권정연 씨 모녀와 첨성대 길라잡이 할아버지, 마을 사람들까지 샅샅이 짚어낸다. 집 그 자체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빌려주고, “잘 살거라, 속으로 비는”(85쪽) ‘짓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쩜 이렇게 글들이 사랑스러울까?
옛 고택에 대한 사랑과, 오해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해하며 풀어가는 이웃들의 정도 사랑스럽고. 재서가 이본에 대해서 유독 자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필연적으로 얘네들은 친구가 되겠구나 짐작을 했지만 진짜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고... 나도 그들이 정성을 다해 지을 그 고택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며..
제목이기도 한 이 책의 한 문장을 넣어본다.
사람의 수명을 백 년이라 가정할 때,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어야 비로소 천 년이 흐르는 셈입니다.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지요? 이 탑은 그보다 더 긴 세월을 버텨주었어요. 흔들리기도 하고 기울어지기도 하면서요. 대견하지 않습니까? - p.88
이 자리에서 나는 ‘차경’을 배웠다. 경치를 빌린다는 뜻의 차경은 건축학과에서 ‘과제’ 다음으로 자주 쓰이는 단어 중 하나였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데, 뭉게구름이 방향을 바꾸며 흘러가고, 나무는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고, 겨울에는 눈이 조용히 쌓이는 이 창가 자리에서 풍경은 소유가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이며 그 누림이 건축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50-51
비름이 말이야. 잡초지만 신통해. 영양분을 끌어모아서 농사를 돕거든. 땅에서 난 것들은 다 쓸모가 있어. 쓸모를 찾는 건 그 땅에 머무는 사람들이고. - p.7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