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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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서 만난 책

 

독서모임은 참 좋다. 가장 좋은 점은 평소 읽지 않을 책을, 존재도 몰랐던 책을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 덕에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소설... 그것도 서사가 완벽한 이야기, 대중적인 이야기들을 주로 읽고 있는 나는 노벨상 수상작은 오히려 꺼려하고 모르는 작가에 대한 모험도 시도하지 않는다.(좋아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서 그 분들 신작을 챙기기도 너무 바쁘거든요.) 이 책은 많은 독서모임에서 읽고 있다고 한다. 서평도 엄청 많네. 책을 추천하신 분도 주변에서 추천을 많이 받았다고 하신다. 장점이라면 정말 얇다. 독서모임을 잡고도 항상 일상은 바쁘다. 책을 바로 사놓고 읽을 여유가 없어 미루고 미루다 독서모임 전날 부랴부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펼친 느낌.... 분량이 적고 내용은 더 적고 사건도 사고도 없는데... 뭐랄까 표현할 수 없다. 재미를 물어본다면 일도 대답할 수 없고 사실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더라.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 님의 추천평을 보고 조금 이해했다고 할까?

추천평

나는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꿈꾸어왔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위대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부신 이야기를. 누구나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두 가지 주제, 바로 삶과 죽음을 특별한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작가는 이 어려운 작업을 아주 능청맞고도 사랑스럽게 해낸다. 삶과 죽음 사이에 들어찬 모든 문장에 좀처럼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잠시 휴식하기 위한 쉼표만을 사용하면서, 죽음과 삶의 과정이 결국 하나의 끝나지 않는 문장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 이야기 속에서 삶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은 삶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무지갯빛 색실로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것처럼, 작가는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이라는 아름다운 벽화를 천의무봉의 손길로 직조해낸다. 이 이야기와 함께하는 순간, ‘이토록 가까운 삶저토록 머나먼 죽음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왈츠를 추고 있는 듯하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시작에는 아이의 탄생이 나온다. 탄생의 장면이 뭔가 바쁘고 정신없으면서도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데 쉼표만 가득하고 마침표가 없는 스타일의 문장으로 연속적인 의성어, 의태어만 등장하여 무슨 상황인가 했지.

그러다 바로 죽음의 상황이 등장한다.

 

바지런한 산파의 움직임, 산모의 고통어린 숨, 이제 곧 아버지가 되려는 남자의 기대와 걱정. 소설은 노르웨이 해안마을 어딘가, 한 살림집에서의 출산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이 잘못되어 아내나 아이나 아내와 아이 모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찬 남자의 내적 독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상념은 분명 그들을 도와 온갖 나쁜 일로부터 구원해줄 신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 남자에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처 단어가 되지 못한 외마디 모음과 뒤섞인 아내의 비명이 길게 이어진 후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면서 초조한 시간은 끝난다. 그렇게, 요한네스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다.

장이 바뀌고 그사이 긴 시간이 흘러, 요한네스는 노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가족을 이루고 너무 외진 곳이었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이곳에 터전을 잡았고 고깃배를 타고 나가 생계를 꾸렸다. 아내도 친구도 곁을 떠난 지금, 적막하고 고독하기만 한 요한네스의 삶에서 근처에 사는 막내딸만이 의지처가 되어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다. 썰렁한 집안에서 혼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빵을 먹는다. 별다른 기대가 없는 일상,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고 원래 그대로인데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듯하다. 늙은 몸도 무게가 거의 없는 듯이 가뿐하다. 눈에 들어오는 사물들, 풍경이 어쩐지 너무 달라 보인다. 요한네스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여하튼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할 수 없다, 달라진 것이 있어도, 그것은 아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게 가장 그럴듯할 것이다, 아니면 혹시 밖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을까? 저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을까, 대수로운 게 아니라도, 그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그저 뭔가 아주 사소하지만 모든 것을 완전히 달라 보이게 하는 그런 일이? 하지만 그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아닌가? (본문 49p)

그리고 여느 때처럼 서쪽 만으로 산책을 나간 길에, 페테르를 만난다. 같이 배를 탔고 오십 년 넘게 서로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던 절친한 친구,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를. 여느 때처럼 위층 다락방에서 잠들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려오지 않았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아내가 집안의 불을 밝히고 기다리다 그를 위해 커피를 끓인다. 막내딸과 마주치지만 그가 보이지 않는 듯 지나가버린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지만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이날, 도대체 요한네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모든 게 그저 그의 상상인가? 또 번호 없이 여백으로만 구분된 마지막 장에는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가?

요한네스라는 아이가 세상에 나온다, 요한네스라는 늙은 어부가 생의 마지막날을 맞이하려 한다. 이 양끝 사이의 삶은 요한네스의 착각이나 환각, 그리고 조각난 기억들로 채워진다. 죽은 자들이 숨을 불어넣어 되살리는 그 기억은 요한네스가 지나온 삶에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끼게 만들고, 확신했던 일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렇듯 이야기 속에서 삶과 죽음이, 물질적 현실계와 형이상적 세계가 자연스레 겹친다. 시간 또한 선적으로 흐르지 않아서 현재와 과거가, 과거와 미래가 스며들어 있다.

작품의 형식 또한 이를 구현해내고 있다. 이 작품에는 마침표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쉼표로 잠시 침묵한 뒤 다음 문장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간다. “죽음과 삶의 과정이 결국 하나의 끝나지 않는 문장 속으로 들어와 있다(정여울).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주고 시간이 흐른 뒤 그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제 아이에게 물려주듯이, 삶과 죽음의 세계는 마치 문장의 사슬처럼 서로 이어지고, 겹치고, 스며든다.

이처럼 저편으로 넘어가는존재의 상태는 연구자 크뤼거가 욘 포세 인물들의 특징으로 설명한 멜랑콜리커와도 닿아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요한네스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불안한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한다. “멜랑콜리커는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며, 사후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불안을 받아들인다.”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

요한네스의 삶과 죽음에 혼자인 듯 했지만 항상 누군가가 함께 했다.

과연 나의 죽음에 마중 나올 이는 누구일까? 나는 죽음에서 누구를 만나면 행복하게 떠날 수 있을까?

그런거...

 

새로운 책을 만나 반가웠다. 그러나 나는 노벨상과는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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